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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북스토리

진천송씨 충숙공파 우산종중, 우산정사에서 '충숙관(忠肅館)' 낙성식.. 송만규화백 '우산전경도'그려



진천송씨 충숙공파 우산종중이 13일 오전 11시 완주군 봉동읍 우산종중 우산정사에서 '충숙관(忠肅館)' 낙성식을 갖는다.
충숙공 표옹 송영구(1556-1620)선생의 정신을 잇고자  진천송씨 충숙공파 우산종중의 다목적관 건물을 지은 것.
종회는 물론 시제 등 제사, 그리고 학습에 이르기까지 가문의 대소사를 효율적으로 추진할 수 있게 됐다.
'충숙관'은 '기억(ㄱ)'자 누마루 건물로 50 여 평으로 완성, 종중의 용솔, 삼정승 소나무와 연꽃 등을 전통 꽃담으로 구현했다.
누마루 대들보는 종중의 상징 우산솔을 채취에 만들었다.
이곳엔 송만규화백의 작품이 걸렸다.
'우산전경도'는 충숙공파 우산종중 우산정사를 배경으로 담았다.
작가는 소중한 기억들을 따뜻하고 편안한 시선으로 바라보았다. 부드럽고 온화한 한국화 특유의 색채로 평온하게 선조들의 정신을 생각하면서 그려냈다.
송영구의 유택과 신도비가 있는 우산정사 앞의 방죽에는 백련이 자라고 있는데 이곳이 우리나라 백련 시배지이기도 하다. 그가 명나라에 사신으로 갔을 때 백련을 들여와 이곳에 심었다고 한다. 연꽃이 피는 7, 8월이면 제촌지에 흐드러지게 핀 백련을 감상할 수 있으며 일대는 백련 향이 가득하다. 해 뜨기 전에 방문한다면 연꽃 터지는 소리를 듣는 낭만을 즐길 수 있다.
우산정사의 또 다른 볼거리는 소나무이다. 우산정사 주변에는 유독 소나무가 많다. 송영구의 며느리인 삭녕 최씨가 시집이 오면서 가지고 온 변산 솔씨를 뿌려서 가꾼 결과이다. 많은 소나무 중에 이름을 가지고 있는 두 그루의 소나무가 있다.
두 그루의 소나무는 용솔 혹은 효자솔과 삼정승 소나무이다.
용솔은 우산정사 안에 있으며 용이 하늘을 향해 날아오르는 듯한 모습을 하고 있다. 용솔은 효자솔이라고도 불리는데 송영구의 초상화를 모시고 있으며, 집안의 대소사를 치르는 건물의 지붕 위로 자라지 않기 때문이다. 집안의 어른을 모시고 있는 건물이기에 겸손하게 예를 갖추고 있다고 해석한다. 설마 진짜 소나무가 그런 깊은 뜻이 있기야 하겠나 싶지만 이야기를 들으며 고개가 끄덕여지고 그 말에 동의가 되는 것은 스토리텔링의 힘이다. 수령은 약 300년 정도로 추정한다.
삼정승 소나무는 백련 시배지인 제촌지를 돌아가면 산 입구에 하늘을 향해 위풍당당하게 서 있다. 이 소나무는 한 뿌리에서 3개의 줄기가 자라고 있기 때문이다. 삼정승 소나무는 삭녕 최씨가 뿌리고 가꾼 1세대 소나무로 추정되며 수령은 약 400년 정도이다. 삼정승 소나무 줄기에 깊은 상처가 남아 있는데, 일제 강점기 전쟁 중 연료를 확보하기 위해 송진까지도 공출해 간 흔적이다. 나라에 힘이 없으니 소나무까지도 힘겨운 삶을 살아야 했다.
이같은 내용을 작품에 담은 송화백은 1993년 첫 개인전 ‘이 바닥에 입술을 대고’를 시작으로 강을 주제로 한 대작을 선보이며 30여 회의 국내외 개인전 및 여러 단체전 등에 참여했다. ‘강의 묵객’, ‘물의 시인’이라 불리는 그는 현재 ‘한국묵자연구회’를 맡으며 인문학당을 운영하고 있다.
송호택 우산종중 의장은 “'충숙관' 낙성에 감회가 더욱 새롭다”면서 “ "훌륭한 조상을 둔 우리 진천송씨 자손으로 태어난 것에 자부심을 가진다"고 했다.
이어 전국 각지에서 참제해줄 종중 여러분들을 생각, 우리 진천장문의 밝은 미래를 기대하게 됐다. 오늘을 계기로 우산종중 후손의 화합 단결은 물론 무궁한 발전을 기원한다"고 덧붙였다.
충숙공 표옹 송영구는 익산에서 출생, 1584년 친시문과에 급제, 승정원의 주서와 사과를 역임했다. 1592년 임진왜란이 발발하였을 때 도체찰사 정철(鄭澈)의 종사관을 지냈다.
이후 사간원정언을 거쳐 사헌부지평으로 있을 때 성절사(聖節使)의 서장관이 되어 명나라에 다녀온 뒤에 사직하고 낙향했다. 송영구는 1599년 관직에 복귀, 충청도도사와 지평을 거쳐 1600년 이조정랑·의정부사인·사간원사간·청풍군수 등을 역임했고, 필선으로 재임 중 '선조실록(宣祖實錄)'편찬에 참여했다. 1612년 경상도관찰사를 지냈고, 1613년에는 사신으로 명나라에 다녀왔다. 현재 광암리에 남아 있는 선생의 집 '망모당(望慕堂)'의 당액(堂額)은 송영구가 사신으로 갔을 때 사귄 명나라 관리 '주지번(朱之蕃)'이 쓴 글씨이다. 1614년 송영구는 오위도총부부총관과 동지중추부사를 역임했고, 1615년 이이첨이 권력을 장악하고 폐모론을 일으키자 이에 반대하다가 파직당했다. 저서로 '표옹유고(瓢翁遺稿)'가 전하며,  묘소는  완주군 봉동읍 제내리에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