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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북스토리

<이종근의 역사문화 이야기 109> 친구라면, 우리나라 최초의 라면 '삼양라면', 그 진원지는 익산

<이종근의 역사문화 이야기 109> 친구라면, 우리나라 최초의 라면 '삼양라면', 그 진원지는 익산

1960~70년대 전북 고창 오지마을에서 유년기를 보낸 기자에게 라면은 국수에 섞어 먹던 ‘귀한 음식’이었다. 

1980년대 초·중반 중·고등학교에 다니며 생활을 하던 시절에는 박스째 쌓아 놓고 먹던 주식이었고, 대학 졸업 후 사회생활을 하고부터는 야참이자 해장음식이 됐다.

  돌이켜 보면 밥 못지않게 즐겨 먹은 음식이 라면이었다. 그만큼 먹었으면 물릴 법도 하건만 지금도 어디선가 라면 끓이는 냄새만 나면 침이 꼴깍 넘어간다.

 평생 먹어도 질리지 않는 중독성 강한 음식이 라면 아닌가 싶다. 저렴하면서 조리가 간편해 남녀노소 불문하고 즐겨 먹는 음식이기도 하다.

전북 익산에서 삼양라면이 처음 세상에 나온 1963년.

라면 한 봉지의 무게는 100g, 가격은 10원이었는데, 우리보다 5년 앞서 나온 일본의 '치킨라면'은 대략 한 봉지 무게가 85g이었고, 가격은 35엔(우동 한 그릇이 60엔)이었다.
담배 한 갑이 25원, 자장면 한 그릇이 40원이었으니 삼양라면을 얼마나 싸게 내놓았는지 알 수 있다.

실제로 라면은 값싼 가격에 맛과 영양을 만족시켜 서민들의 구휼식품 역할을 했고 쌀을 비롯한 주곡의 대체효과도 매우 컸다.

 ‘삼양라면’이 첫 선을 보인 1963년만에도 쌀 3천800여석의 대체효과를, 그리고 1976년에는 145만 8,000여석, 1980년에는 184만 8,205석의 대체효과를 거둔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삼양식품 창업주인 고 전중윤 명예회장은 남대문 시장에서 ‘꿀꿀이 죽’을 먹는 서민들을 보고, 배고픔을 해소하기 위해 일본에서 라면을 들여오기로 결심한 뒤 일본 묘조식품을 설득해 라면기술을 전수받아 1963년 국내 최초 라면인 ‘삼양라면’을 출시했다.

강원도 철원이 고향인 전 명예회장은 당시 아무런 연고도 없는 익산시에 삼양라면 공장을 세웠던 건 오로지 ‘정과 의리’ 때문이다.

전 명예회장은 1961년 삼양식품의 모태인 삼양제유주식회사를 창립하고, 2년 후 ‘삼양라면’을 출시했다. 전 명예회장이 라면을 도입한 이유는 당시 많은 사람들이 ‘가난과 배고픔’을 겪었기 때문이다.

전 명예회장은 1960년대 초 서울 남대문시장에서 ‘꿀꿀이죽’을 사먹기 위해 줄을 길게 선 노동자들을 목격했다. 먹을 것이 없어 미군이 버린 음식을 끓여 한 끼를 때울 수밖에 없는 사람들의 모습을 보고, 어떻게 하면 이들이 배고픔을 이겨낼 수 있을지 고민했다.

그 때 떠오른 것이 1950년대 말 보험회사를 운영하면서 일본에서 경영연수를 받을 때 맛봤던 ‘라면’이었다. 

전 명예회장은 라면의 국내 도입이 식량난의 유일한 해결책이라고 판단하고, 일본의 묘조식품으로부터 라면 제조기계와 기술을 도입, 1963년 9월 15일 국내 최초의 라면인 ‘삼양라면’을 선보였다.

당시 일본라면 중량은 85그램(g)인 반면에 삼양라면은 100g으로 출시됐다. 가격도 최대한 많은 사람들이 값싸게 먹을 수 있도록 10원으로 책정했다. 꿀꿀이죽 한 그릇 5원, 커피 한 잔 35원, 담배 한 갑 25원 등 그 때의 물가를 감안하면 상당히 저렴한 편이었다. 

때문에 오쿠이 묘조식품 사장은 전 명예회장에게 “라면가격을 너무 낮게 책정한 것 아니냐”고 물을 정도였다. 하지만 전 명예회장은 “이 사업으로 돈을 버는 것이 중요한 게 아니다”며 “식량난이 심한 조국의 상황에서 누구나 배부르게 먹으려면 이 정도 가격이 적당하다”며 답했다고 한다.
삼양라면이 처음 나왔을 때 시장반응은 꽤 냉담했다. 

아무래도 쌀 중심의 식생활에서 밀가루로 만든 라면이 낯선 탓이 컸다.
이후 전 명예회장을 비롯한 삼양식품 임직원들은 직접 극장·공원 등에서 무료시식행사를 열면서 적극 홍보하면서 사람들 사이에서 입소문을 냈다. 

때마침 정부도 1965년에 식량난을 해결하기 위해 혼분식 장려정책을 발표했다. 10원 라면 한 봉지로도 충분히 한 끼 식사가 될 수 있다는 인식이 확산되면서, 삼양라면은 날개 돋친 듯 팔리기 시작했다.

삼양식품은 삼양라면의 큰 인기 덕분에 급성장했다. 특히 라면을 선보인지 10여년이 지난 1972년 당시 매출액은 141억원으로, 당시 국내 재계순위 23위를 차지할 정도였다.

라면 수출도 삼양식품이 원조다. 1969년 국내 처음으로 베트남에 라면을 수출하며 ‘한국 라면의 세계화’를 본격적으로 열면서, 이후 해외 60여개국으로 삼양라면을 수출하는 성과를 거뒀다.

그는 6.25 전쟁 당시 구 이리역 부근까지 피난왔을 때 끼니를 거르는 그를 동네사람들이 보살펴줬던 것을 잊지 않고, 라면열풍이 불던 시절인 1970년 익산에 삼양식품 호남공장(이하 익산공장)을 세워 지역사람들에게 일자리를 제공했다.

현재 익산공장에는 200여명의 직원들이 라면과 스낵류를 생산하고 있다. 이는 삼양식품 전체 생산량의 20~30%를 차지한다.

익산공장에는 30여년간 라면을 생산한 라면달인도 빼놓을 수 없는 자랑거리다. 실제 제품을 생산하고 있던 그의 이름을 딴 ‘라춘쇠 라면’은 2005년 9월 ‘건방진 유통기한’이라는 이름으로 굉장한 인기를 끌었다.
때문에 한때 라춘쇠 라면 모으기 열풍이 불기도 했다. 
라면에 이어 2006년 출시한 라춘쇠 스낵도 인기몰이를 했다.
뽀글뽀글한 라면과자 속 별사탕을 찾는 재미가 쏠쏠한 장수과자 ‘뽀빠이’ 역시 익산이 고향이다. 

모현동에 위치한 삼양식품 익산공장은 2008년도부터 익산시 관내 저소득 가구를 위해 생산하고 있는 라면과 과자류 등을 꾸준히 후원하고 있다.
 청년들을 위해 다이로움 취업박람회를 참여해 일자리 제공 등 지역사회 발전과 이웃 사랑 실천에 앞장서고 있다.

 얇게 펴진 평평한 면이 기계를 통과하니 구불구불한 모양으로 변신한다. 길고 구불구불한 면은 스팀으로 익혀지고, 사각형 모양으로 작게 잘린다. 

잘린 면은 고온에서 튀겨진 뒤 냉각 과정을 거쳐 흔히 볼 수 있는 ‘라면’의 모양새를 갖춘다. 

이 면 위로 수프가 놓이고, 뒤이어 검은색 포장지가 면과 수프를 감싸면 매운 라면의 대명사 ‘불닭볶음면’이 탄생한다.   

 삼양식품 밀양공장에서 불닭볶음면의 생산 과정을 볼 수 있다. 

지난해 준공돼 가동을 시작한 밀양공장은 삼양식품이 해외 사업을 위해 마련한 수출 '전진기지'다. 이곳에서 생산되는 제품은 불닭볶음면과 건면 시리즈로 해외 수출을 위한 것이 대부분이다.

삼양식품은 지난 2022년 경상남도 밀양에 추가로 공장을 세웠다. 불닭볶음면의 글로벌 인기가 치솟으면서 기존 익산·원주공장만으로는 수출 물량을 감당하기 힘들었기 때문이다.

삼양식품 밀양공장의 연간 생산 목표는 4억5000만개다. 휴무일을 제외하면 하루 180만개의 라면이 생산된다. 

밀양공장 1호기에서 생산할 수 있는 분당 봉지면 생산량은 800개로 익산공장(220개)과 원주공장(432개) 보다 약 2~3배 높다.

밀양공장에서 생산된 제품 대부분은 중국, 미국, 동남아, 유럽 등 해외로 수출된다. 이 가운데 80% 이상이 중국으로 수출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