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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북스토리

<이종근의 역사문화 이야기 92> 전주남문교회의 종과 마로덕

<이종근의 역사문화 이야기 92> 전주남문교회의 종과 마로덕

‘어찌하여 이름이 마로덕이던가(何如作名馬路德), 올라탄 말 재촉하며 포교하러 다닌 덕이리라(促馬行路布敎德)’

전북 동남부의 산악지대를 찾아다니며 복음을 전해 무려 80여 개의 교회를 개척한 마로덕의 위대한 자취는 세상을 떠난 지 60여년이 되었음에도 여전히 전설로 남아있다.

전주남문교회는 1905년 전주서문교회에 출석하던 마로덕 선교사와 최국현 장로, 강견대씨 등 20여명이 중심이 되어 창립됐다.

또 남문교회는 100여년의 역사속에서 지역의 대표적인 교회로서 복음전파와 구제활동을 통한 예수그리스도의 이웃사랑을 몸소 실천해 왔다.

1919년 도내 최초 3.1운동을 주도하고 1928년 문앵 퇴치를 위한 영생보육원(현 전주대)를 개설, 일제 36년간 선교의 구심점으로 어머니 교회 역할을 담당했다.

남문교회는 △살아있는 영적예배가 있는 교회 △땅끝까지 이르러 증인되는 교회 △사도의 가르침을 받아 행하는 교회 △서로 교제하며 섬기는 교회 △받은 은사를 따라 사역하는 교회 △하나님의 공의를 세우는 교회 △사회봉사에 앞장서는 교회라는 7대 비전의 틀 안에서 진행된다.

마로덕 선교사라 부르는 루터 올리버 맥커친(Luther Oliver McCutchen)은 미국 남캐롤라이나에서 태어나 데이비슨 대학과 대학원에서 공부를 마치고 버지니아의 유니온 신학교와 콜롬비아 신학교를 졸업하였다. 그리고 한국으로 건너와 1903년 전주에 오게 되었다.

그는 주로 전북의 동남쪽을 선교지로 삼아 활동하였다. 그는 동부 산악지역을 말을 타고 다녔다. 그래서 붙여진 이름이 마로덕(馬路德)이었다. 말을 타고 길을 돌아다닌 덕분에 많은 선교를 할 수 있었다는 뜻이라 했다.

'어찌하여 마로덕 이름이더냐
포교 길 말 재촉 다닌 덕이냐
머나먼 길 바다 건너 여기에 와
삼십 총각 전주에 몸을 맡겼네.
예수 복음 천지를 뒤흔드니
유생 학자 묘 속에서 뛰어나와도
밝은 종교 모인 민중 받아들였으니
호남의 목자들 오래 떠받들리라'

지금의 예수병원이 들어서 있는 도로인 서원로가 개설되기 전에는 중화산동에서 시내로 들어오는 길은 높고 꼬불꼬불한 강당재였다. 강당재는 지금도 옛 모습을 간직한 채 그대로 남아 있다.

이 고개에는 예전의 예수병원이었던 엠마오 사랑병원이 있다. 그리고 엠마오 사랑병원 입구 맞은 편에 오래된 작은 양옥집이 한 채 있다. 거기 입구의 큰 나무 옆에 “마로덕 선교사 기념관”이라는 안내석이 서 있다.

이곳이 1902년 미국 남장로회 해외선교부에서 한국 선교사로 파병을 받아 한국에 와서 선교활동을 벌였던 마로덕 선교사 부부가 살던 사택이다.

그리고 이 작은 건물이 전주에서 가장 오래된 양옥인 것이다. 그래서 기독교 사적 제29호로 지정하여 보호하고 있다.

 마로덕 선교사는 1873년 미국 비숍 빌에서 출생하여 사우스캐롤라이나 장로교 신학대학교를 졸업하고 유니온 신학대학원까지 마친 뒤 1902년 서울에 도착하여 군산과 목포에서 한국어와 한국문학을 공부한 사람이었다.

한국에서의 사역을 위해 준비를 단단히 한 사람이라 할 수 있다. 그는 전북지역에서 복음을 전파했는데 무주, 장수, 금산, 익산, 삼례, 고산, 그리고 임실, 남원 등 동부와 남부지역에서 복음을 전파하였다. 1908년 잠시 미국으로 건너가 선교사 요셉 빈과 결혼을 한 후 부인과 같이 다시 한국으로 건너와 전도에 힘썼다.

그는 말을 타고 소양을 지나 높은 위봉고개를 넘어갔다. 그곳은 전국적으로 오지로 소문난 동상면이었다. 위봉폭포 부근에서 위봉교회를 세운 그는 학동교회, 수만교회, 신월교회를 연이어 설립했다. 그때가 1905년에서 1907년 사이였다.
위봉교회 인근의 소농교회와 봉동의 덕천교회 등도 그가 세웠다.

마로덕 선교사가 전주 초곡면 신기리에 호성교회를 설립한 것은 1912년이었다. 지금의 전주역 자리였고 “초곡교회”라 이름 붙였다.

1936년에 지금의 호성교회 자리인 완주군 초포면 송전리에 목조 초가 13평짜리 교회로 옮겨가게 되었는데 송전교회라 불렀다. 지금의 덕진구 호성신중길 6번지가 그곳이다.

전주 서문교회의 종탑이 국내에서 가장 오래된 독립된 것으로 확인됐다.

전주 서문교회의 한옥 종탑은 1892년 7인의 선교사로 들어와 1908년, 별세한 남편 전킨을 기념해 부인 매리 레이번여사가 기증한 직경 90cm짜리 큰 종을 달기 위해 만들었다. 이 종은 미국에서 제작돼 군산항을 걸쳐 오게 되는 바, 황소가 땀을 흘리면서 가져오는 사진이 눈길을 끌고 있다. 

직경이 약 90cm나 되며 종이 울리면 웅장하면서도 맑은 소리가 20리 밖에서도 들렸다다. 

하지만 1944년 일본이 전쟁 무기를 제조하기 위해 공출할 때 ‘전킨 목사 기념종’이 빼앗기면서 그 모습과 그 소리를 잃게 된다. 1945년 해방 후 국내에서 제작된 종을 구입해 허전했던 그 자리를 메꾸어 달아 놓은 것이 현재에 이르고 있다. 높이 6m80cm인 종각의 처음 위치는 현재의 예배당 정문 계단에 자리했지만 그 후 수 차례 옮기다가 현 위치에 서 있으며, 국내에서 가장 오래된 독립된 종탑으로 평가받고 있다. 최근들어 등록문화재가 됐다.
전주 남문교회엔 종탑과 종이 남아있다. 남문교회의 1대 당회장인 마로덕은 일제강점기 노회 시절 당시에 주요 개척한 교회들에 같은 종을 만들어 가져온 것으로 추정된다.  이들 종은 대구에서 가져왔다고 전한다.

봉동의 덕천교회 종도 그가 기증했다. 일제말 공출로 빼앗기지 않으려고 교회 장로가 숨겨 놓았다가 해방 후에 종탑에 걸어놓았다. 종두(鐘頭)가 없이 종만 걸려 있다. 하지만 전주 남문교회 종은 종두가 있어 줄로 잡아당겨 종을 치고 있다. 일제가 종을 공출해 갈 때 빼앗기지 않으려고 종을 떼어 보관해 놓았던 교회들은 종두가 사라지고 나중에 종만 유물로 걸어놓았다.
이로 보면 서문교회 종은 공출의 화를 피하지 못하고 해방 후에 만들어졌을 가능성이 크다.
당시 일본 경찰서가 전주 중앙초등학교에 있어 수탈의 손에서 자유롭지 못했으리라. 해방 후 종의 유래를 알고 마로덕 목사의 성원에 감사하며 현재의 위치에 세운 것으로  추정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