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전북스토리

<이종근의 역사문화이야기 89> ‘뇌물 받고 '떡값' 받았다 하지 말라’ 흥덕현감 임은과 ‘장오인록안(臟汚人錄案)’



"사헌부에서 아뢰기를, '임은(林垠)이 흥덕현감이 되었을 때에 오래된 무덤을 발굴하여 살이 썩어 없어진 뼈를 그대로 드러내놓은 채 많은 은그릇과 유기그릇를 훔쳐 몰래 본가로 보냈으니, 청컨대 벼슬을 거두고 ‘장오인록안(臟汚人錄案)’에 기록하여 길이 다시 쓰지 않게 하소서' 하니, 그대로 따랐다
 성종실록(성종7년 1476년 음력 3월 29일, 양력 4월 22일자)에서 보이는 것처럼 조선 시대 뇌물을 먹은 관리들의 이름을 적은 ‘장오인록안(臟汚人錄案)’이란 책이다. 여기서 ‘장오(臟汚)’란 뇌물을 포함해 관리가 백성의 것을 가로채는 것을 말한다. 
 조정에서는 뇌물을 받은 관리를 엄중히 다스리려고 이 책에 이름을 적어놓고, 본인뿐 아니라 자손까지 좋은 자리에 앉히지 않았다. 의정부, 육조, 한성부, 승정원, 관찰사, 수령 따위엔 오를 수가 없었다. 세종 때 황희 정승은 영의정일 때 자신이 뇌물을 받았다는 투서가 들어오자 비록 무고였음에도 사직을 청했을 정도였고, 역시 세종 때 대사헌 윤형은 임금에게 올린 글에서 악한 것은 장오보다 더 큰 것이 없다'고 말했다. 이 시대 공직자 가운데에도 황희 정승과 같은 생각을 하는 사람이 물론 있겠지만.
 한자 ‘뇌(뇌물 줄 뇌 賂)’자는 ‘조개 패(貝)’자에 ‘뒤져올 치( )’부 아래 ‘입구 구(口)자’ 즉 ‘각각(各)’이 조합된 글자로 ‘앞에 온 사람과 뒤에 온 사람의 말이 서로 다르다’는 뜻으로 돈을 준 사람과 돈을 받은 자의 말이 다른, 정당하지 못한 금전거래를 뜻한다. 중국 고대에서는 조개를 화폐로 사용하였다. 그러므로 ‘조개 패(貝)’자는 화폐, 즉 재물을 의미한다.
 조선시대에도 뇌물은 있었다. 그런데 이 시대의 가장 보편화한 뇌물의 유형은 자리 보전과 승진을 위한 것이었다. 관리의 인사권을 가진 이조(吏曹)의 요직자나 인사에 막강한 영향력이 있는 정승들, 그리고 육경(六卿)의 집은 인사를 청탁하는 인물들로 발 디딜 틈이 없을 정도였다.
 세종 때 명승 황희도 영의정일 때 뇌물사건의 투서가 들어오자 비록 무고였음에도 사직을 청했을 정도였고, 세종 때의 대사헌 윤형은 임금에게 올린 글에서 “악한 것은 장오(臟汚)보다 더 큰 것이 없다”고 말했다고 한다. 조선시대 조정에서는 암행어사 제도를 만들어 수령들의 비리에 중앙 관료와의 결탁 여부를 조사하게 하고 뇌물을 받은 관리를 엄중히 다스리고자 뇌물을 먹은 관리들의 이름을 적은 ‘장오인록안(臟汚人錄案)’이란 책을 만들어 뇌물을 받은 관리들의 이름을 기록해 두고 본인 뿐 아니라 자손까지 의정부, 육조, 한성부, 승정원, 관찰사, 수령 따위엔 오를 수가 없도록 하고, 뇌물을 받은 관리에게 곤장을 안기고 오른쪽 어깨에 ‘관물을 도둑질한 자’라는 뜻으로 ‘도관물(盜官物)’이라는 지울 수 없는 낙인을 새기기도 하는 등 가혹한 형벌을 내렸음에도 뇌물은 근절되지 않았다.
조선시대 '인정물(人情物)'이라고 하던 '뇌물'이 요즘은 '떡값'이라는 말로 바뀌었다. 떡의 어원은 '덕(큰 덕: 德)'이 음운 변화를 거쳐 '떡'이 되었다는 설이 있다. 덕이란 베풀고 나누는데, 그 의미가 크다. 이렇듯 우리의 떡도 이웃에게 나누는 아름다운 미풍양속이 이어져 내려왔었다. 그런데 개인주의가 팽배한 현대사회에 이르러 이러한 떡을 나누는 미풍양속은 점점 사라지고 '뇌물'을 상징하는 '떡값'으로 변질하여 전통음식인 떡 문화에 대한 이미지를 그르치고 있다.
 임은(林垠)의 가계나 관력(官歷)에 대해서는 알 길이 없다. 다만 조선왕조실록에 장리(贓吏, 예전에, 뇌물을 받거나 나라나 민간의 재산을 횡령한 벼슬아치를 이르던 말)로 이름이 나온다. 그는 흥덕현감으로 재직하던 중, 옛 무덤을 파서 많은 은기(銀器)와 유기(鍮器)를 수습해 자기 집으로 가져갔다. 이 사실이 탄로 나서 추국을 받게 되자 도망했다. 조정에서는 임은의 직첩을 거두고 도굴죄만을 물었다. 임은은 사유(赦宥)를 받게 된 지 4년 만에 자신의 죄를 신원해 줄 것을 왕에게 상언(上言)했다. 그리하여 왕은 옛 무덤을 파서 유물을 빼돌린 임은을 국문하게 됐다. 성종은 이미 사유를 받았으나 도망갔다가 뒤늦게 나타나 자신의 신원을 요청한 임은을 율외(律外)로 다스리겠다는 의지를 밝혔다. 
 이에 신하들이 갑론을박하여 논의한 뒤 성종에게 “만일 사유(赦宥)를 지났다 하여 놓아 주고 다스리지 않는다면 악을 징계할 수 없으니, 청컨대 직첩을 거두고 ‘장안(贓案)’에 기록하소서”라고 하므로 그대로 따랐다. 이후 그의 이름이 죄를 지은 관리들의 명부인 ‘장안’에 수록됨으로써 자손들의 벼슬길이 막혔다고 한다. 요즘도 현대판 ‘장오인록안’이 있었으면 좋겠다. 그리고 그것이 인터넷에 공개되면 함부로 뇌물을 받는 풍조가 없어지겠으이라. 언제나 관리들이 국민의 공복이란 생각으로 양심껏 일해 ‘장오인록안’에 오를 사람이 없는 세상이 올까? 오늘날에도 ‘장안(贓案)’을 만들어 경계를 삼기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