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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북스토리

만석보지와 황토현전적지 위치 바로 잡아야

 

왕현종 연세대 역사문화학과 교수, 만석보 터와 황토현에 대한 기록이 담긴 충청남도·전라북도 사료채방복명서발견... '동학농민혁명연구' 2호에 발표

 

 

고부군수 조병갑이 농민 수탈을 위해 축조했다가 훗날 동학혁명의 도화선이 된 만석보터가 지금까지 알려진 장소와 다르다는 주장이 제기됐다.

, 전봉준 장군이 4,000여 농민군을 이끌고 첫 승리를 기록한 황토현의 위치를 바로잡아야 한다는 지적도 함께 나왔다.

만석보지(만석보유지비)와 황토현전적지(정읍 황토현전적)는 각각 전북도 시도기념물과 국가유산청 사적으로 지정돼 있어 정확한 위치가 확인될 경우 동학혁명 유적지는 정정이 불가피하다.

왕현종 연세대 역사문화학과 교수는 만석보터와 황토현에 대한 기록이 담긴 충청남도·전라북도 사료채방복명서를 발견했다고 밝혔다. 발견한 사료와 사료해설서는 31일 동학농민혁명기념재단 발간한 학술지 동학농민혁명연구2’에 실렸다.

복명서는 조선총독부 조선사편수회가 1934년 펴낸 것으로, 편수회에서 근대사 편찬 주임을 지낸 다보하시 기요시가 1934년에 열흘 동안 충남과 전남북 일대 동학농민혁명 유적을 답사한 뒤 작성한 것이다.

충청남도·전라북도 사료채방복명서에 첨부된 정읍군약도를 보면 사시봉이 있는 위치 일대에 황토치라는 글자가 적혀 있다.

정읍군약도의 검은색 원은 각각 만석보지’, ‘황토치라고 적힌 곳을 표시한 것이다. 빨간색 원은 현재 만석보 유지비 위치, 파란색 원은 황토현 전적비 위치다.

발견된 복명서에 첨부된 정읍군약도를 보면, 일본식 한자로 적힌 두전리란 지명 옆에 만석보지라는 글자가 쓰여 있다. 이곳은 현재 만석보 유지비에서 서쪽인 동진강 하류 쪽으로 약 2떨어져 있다. 이 기록은 다보하시가 1940년 펴낸 근대 일선(일본과 조선)관계의 연구에서 밝힌 만석보는 고부군 답내면 두전리 동진강 남안에 설치됐다는 내용과도 일치한다.

만석보터 논란은 처음이 아니다. 동학농민혁명기념재단은 만석보터가 알려진 곳이 아닌 원래 자리에서 500m 정도 떨어진 곳이라고 의심해왔다. 2000년대에 말목(땅의 단단함을 더하기 위해 설치하는 말뚝)으로 추정되는 유구가 발견된 뒤다. 그런데 이번에 발견된 정읍군약도에 표시된 장소는 재단이 추정한 곳에서도 하류 쪽으로 약 1.5떨어진 지점이다.

만석보유지비 인근에 있는 설명문에는 ‘1894년 조병갑의 포악한 정치와 과중한 세금으로 힘들어하던 농민들은 만석보를 헐었다. 이는 동학농민혁명의 발단이 됐으며 1973년 이곳을 기념하기 위해 사적비를 세웠다고 적혀 있다. 하지만 만석보 유지비는 정읍천이 동진강에 합류하기 전에 있어, 만석보 위치를 설명하는 다른 기록과 차이를 보인다.

왕교수는 해당 지역에서 발견된 말목이 실제 만석보를 만들기 위해 설치한 것인지 확인이 필요하다고 했다.

()라는 것은 논에 물을 대기 위해 둑을 쌓고 냇물을 가두어 두는 곳을 말한다. 원래 정읍천과 태인천 상류에 농민들이 설치한 보가 있었으나, 고종 30(1893) 고부군수 조병갑이 농민들을 강제로 동원하여 두 하천이 합류하는 하류지점에 새로 만석보를 축조하였다. 만석보가 완공된 후 가을에 새 보에 대한 수세라는 명목으로 많은 양의 쌀을 착취하자 농민들이 분개하여 1894년 전봉준을 중심으로 민란을 일으켜 동학농민운동의 발단이 됐다. 만석보는 농민들에 의하여 파괴되어 지금은 둑을 쌓았던 흔적만이 남아있다. 1973년 동학농민운동의 근원지인 이곳을 기념하기 위해 비를 세웠다.

정읍군약도 오른쪽 아래에선 망제봉이라는 지명 위에 황토치라고 쓰인 글자도 확인된다. 황토치는 황토현 전투가 있었던 황토 언덕을 뜻한다. 지도에 표기된 지역은 현재 황토현전적비가 있는 언덕에서 11.5떨어진 곳으로, 지금의 사시봉으로 추정되는 곳이다. 동학농민혁명기념재단 누리집을 보면 사시봉에서 전투 당시 사망자들의 유골이 발견됐다는 증언도 나온다. 현재 황토현 전적비가 있는 언덕과 사시봉은 각각 관군과 농민군이 주둔했던 곳으로 알려져 있다. 현재 사시봉은 유해 발굴 필요성까지 제기됐지만 주변으로 농장과 과수원 등이 들어서 접근이 어렵다.

황토현전적지는 동학농민운동 당시 농민군이 관군을 크게 물리친 곳이다. 동학농민군은 1893년 고부군수 조병갑의 학정에 대항하여 일어나, 다음 해인 18941월 고부관아를 습격하였다. 농민군은 10여 일 만에 해산했지만 정부가 사태 해결을 위해 파견된 관리가 잘못을 농민군에게 돌려 탄압하자, 이에 농민군은 전봉준의 지휘 아래 보국안민(輔國安民), 제폭구민(除暴救民)을 내세우고 다시 일어나게 된다. 고부관아를 점령한 농민군은 주변의 곡창지대를 한눈에 내려다 볼 수 있는 백산으로 진출하였고, 이 소식을 접한 전주감사는 관군을 보내 이를 막도록 하였다. 이리하여 관군과 농민군은 정읍 황토현에서 대치, 밤을 이용한 기습공격으로 농민군은 관군을 크게 물리치게 됐다.

황토현전투의 승리로 인해 기세가 높아진 농민군은 정읍, 흥덕, 고창, 무장을 비롯한 주변 지역으로 세력을 확장하였으며, 나아가 전주까지 장악하게 됐다. 죄없이 갇힌 죄수들을 석방하고 무기도 탈취했으며, 무장으로 진격하여 교도 40여 명을 구출했다. 이곳에서 전봉준은 동학운동의 의의를 나타내는 포고문을 발표했다. 황토현 싸움에서의 승리는 동학농민운동을 크게 확대시키는 계기가 되었다. 이후 우금치 전투에서 관군과 일본군에게 패하여 동학농민운동의 막이 내려지지만, 이 운동에서 보여준 개혁정신과 민족자주정신은 민족독립운동의 전개에 커다란 영향을 끼치게 된다.

황토현전적지는 2011728일 정읍 황토현 전적으로 명칭변경됐다.

사료를 작성한 다보하시 기요시는 19세기의 역사 편찬에 관한 최고 권위자로, 그가 여러 날에 걸쳐서 정밀하게 조사한 결과물이라는 점을 고려해야 한다./이종근기자

 

정읍군약도. 검은색 원은 각각 만석보지’, ‘황토치라고 적힌 곳을 표시한 것이다. 빨간색 원은 현재 만석보 유지비 위치, 파란색 원은 황토현 전적비 위치. 왕현종 교수 제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