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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북스토리

'순종 황제의 비' 순정효황후가 부산에 피난오면서 채용신의 ’백납병‘ 가져와

순종 황제의 비 순정효황후가 한국전쟁때 부산에 피난오면서 석지(石芝) 채용신(蔡龍臣, 1850~1941)의 ’백납병‘을 가져온 사실이 알려져 흥미를 더한다.
채용신은 극세필로 사물을 정확히 묘사한 것으로 정평이 나 있다. 어느 면에서는 흡사 사진을 찍은 듯이 세밀하여 천연색 사진을 보는 느낌이다. 사진이나 극사실주의 회화가 화면 전체를 표현하는데 비하여 그의 그림은 한국화적인 여백을 두었다는 점에서 차이가 난다.
그는 인물을 그리는데 있어 시작은 마치 사진을 보는 듯 극사실적으로 그리다가 나중에는 사진매체를 직접 응용했고, 사후에는 사진을 통해 자신의 유작에 대한 증거를 후대에 남겼다. 채용신의 아들 상묵이 종로에서 우미관이란 사진관을 경영함으로써 1943년 석지의 유작 전시회가 사진으로 남아 우리에게 그의 족적을 생생히 기억하게 해주기 때문이다. 사진은 당시로서는 새로운 기술이었다. 기술을 예술형식에 접목시킨 것은 그의 탁월한 필력이 밑받침되었기에 가능했을 것이다.
회화사를 전공한 부산시와 경남도 문화재위원인 이현주 범어사성보박물관 부관장이 ‘완상, 옛그림 속 부산을 거닐다’(두손컴)를 냈다. 10여 년 써온 46편의 글 한 데 묶었다. 부산박물관 소장품 ‘채용신의 백납병’은 조선 후기 최고의 초상 화가 작품이다.
'백납병(百衲屛)'은 다양한 형태로 화선지를 제작, 소품 형태로 글씨와 그림 등을 쓰고 그려 그것을 한 화면에 담아 여러 폭의 병풍으로 표장(表裝)하여 감상하는 것이다. 이 작품 속의 하나하나 소품들은 각기 독립적이면서 일기(一氣)로 일관되며 조화를 이루고 있다. '백납병'의 형태는 원형, 사각형, 팔각형, 선면형 등으로 매우 다양하다.
순종 황제의 비인 순정효황후가 한국전쟁 때 부산에 피난 오면서 가져왔을 정도로 값진 작품인데 해운대에 있던 증조부 묘소를 잘 관리하는 집안에 준 것이 인연이 돼 현재 부산에 있다.
채용신의 초명은 동근(東根). 호는 석지(石芝)·석강(石江)·정산(定山)이다. 서울에서 태어난 그는 무과에 급제, 무관직을 맡기도 하고 고종의 어진을 그려 군수를 역임했으나 1906년에 관직을 그만두고 56세때 전주로 낙향했다. 선대의 고향인 전북으로 내려와 익산, 김제 등지에 거주하면서 오로지 그림을 그리는 일에 몰두했다. 1909년엔 금마면으로 거처를 옮기고 '금마산방(金馬山房)'을 운영했다. 1923년엔 정읍시 신태인읍으로 이주, '채석강도화소(蔡石江圖畵所)'를 만들고 주문 제작 방식의 초상화 전문 공방을 운영했다. 그는 1941년 정읍에서 생을 마감했다.
채용신의 예술적 재능에는 또 다른 이면이 있다. 일견에 확인할 수 있는 작품이 바로 백납병 2폭이다. 부산박물관에 기증된 채용신의 백납병 2폭은 순정효왕후께서 부산의 한 가문에 하사한 것으로, 채용신의 진취적인 신문화 수용과 폭넓은 회화 취미를 감지할 수 있다. 순정효황후(純貞孝皇后, 1894~1966)는 피난길에서도 다른 진보(珍寶)를 마다하고 이 병풍을 품에 안아 부산으로 갔다. 이 병풍이 바로 채용신이 그린 것으로, 채색이 맑고 선명한 것이 특징이다. 원래는 열두 폭에 60점이었는데, 현재는 9점의 그림만이 남아 있다.
채용신과 해평 윤씨 집안과의 인연은 1900년으로 거슬로 올라간다. 당시 태조어진 모사의 주관 화사로 발탁된 채용신은 모사할 어진을 함경도 영흥의 준원전(濬源殿)에서 직접 이안해온 도제조 윤용선을 만나게 된다. 채용신의 작업을 가까이서 지켜본 윤정승은 부친상으로 관직을 그만두고 향리로 돌아간 그를 천거, 충남 정산군수의 보임을 맡게 했다. 채용신에게는 정산군의 군수직이 그의 마지막 실직이어서인지 이후의 그림에 ‘정선군수’라는 직함과 ‘정산’이라는 호를 자주 사용했다. 아마도 이 백납병은 황실의 명에 의해 제작됐을 수도 있으나, 이와 같은 배려에 대한 보답으로 더욱 정성껏 그린 것이라고도 볼 수 있다.
지금은 60점의 그림이 뿔뿔이 흩어져 9점의 그림만으로 이 병풍의 전모를 추정할 수밖에 없지만 흥미로운 화목들이 눈에 뛴다. 은일풍취(隱逸風趣)를 담은 ‘춘강선유도’나 ‘누각산수도’, 미불(1075~1151)를 배웠던 고극공(高克恭, 1248~1310)의 필치를 따르는 ‘미법산수도’등 전통적인 화의(畵意)를 극세필 극채색으로 그린 것이 있는 반면 청대 해상화파(海上畵派)의 산뜻하고 화려한 감각이 물씬 풍기는 ‘소과호접도’, 그리고 평안과 장수, 집안번창 등의 기복적 바람을 담은 ‘화조도’, ‘묘두응도’, ‘수하유견도’ 등이 그것이다. 그 가운데 ‘소과호접도’에서 보이는 배추와 열무, 장식적인 절지화의 선택과 배경 없이 확대하여 감각적인 색채로 처리한 방식들은 조선 말기~20세기 초 유입된 해상화파의 영향으로 여겨진다.
19세기에는 중국의 양주화파(揚洲畵派)가 막을 내리고 상해를 중심으로 해상화파가 새롭게 부상하였다. 장웅, 조지겸(趙之謙, 1829~1884), 임웅, 임백년, 오창석 등 해상화파들은 강한 채색과 파격적인 주제, 간결한 구도 등을 표방, 새로운 감각의 화조화를 창출했다. 특히 연지에 호분을 섞은 혼합 안료를 적극적으로 사용, 탁하면서도 독특한 효과를 나타내는 방식은 양주화파의 이선을 계승한 조지겸 회화의 한 특징이기도 하다.
또, ‘묘두응도’와 ‘수하유견도’에서는 고희와 장수, 액막이와 풍요를 상징하는 전통적 제재를 선택했으나 나뭇가지의 일부를 과감히 잘라버리는 화면구성방식과 수채화와 같은 선염법에서는 근대적 취향이 돋보인다. 이처럼 백납병 속 일련의 작품에서 엿보이는 무심했던 일상적 제재의 선택, 과감히 잘라내는 구도, 강렬한 색채의 직접적 전달 등은 모두 신사조를 받아들이고 사진술을 응용한 것과 무관하지 않다.
지금까지 채용신은 초상화에 있어 극세필과 음영법으로 사실성을 추구했을 뿐 아니라 화조영모화나 산수인물도 역시 ‘구륵진채법(鉤勒眞彩法)’, ‘극세극채법(極細極彩法)’ 등으로 화려하고 섬세하다는 평가를 받았다. 그러나 이러한 일반적인 평가는 백납병의 그림들로 인하여 수정하지 않을 수 없게 됐다.
그림에 나타난 남종화의 미법산수 화풍이나 소재와 색채에 있어 중국의 근대적 화파로 평가되는 해상화파과의 친연성, 풍속화적 제재와의 결합 등이 그것이다. 채용신은 여전히 극세필을 기본으로 하고 있으나, 조선 말기 유행하던 여러 화목과 당시 화단에 풍미하던 새로운 화풍을 인식하고 그것을 적극적으로 수용한 것이다.
게다가 지금까지 민화 계열로 분류되던 채용신의 화조영모와 병풍도 궁중회화로 재평가 받을 여지가 마련된 셈이다. 여기에 한 가지 더 하자면, 백납병의 수요층에 관한 재고 또한 필요하게 됐다.
백납병은 조선 말기에 특히 유행한다. 현존하는 백납병은 유숙(劉淑,1827~1873), 안건영(安健榮, 1841~1876) 등 조선 말기 문인적 취향을 보여주는 작품 말고는 작자 미상의 민화적 특징을 보여주는 작품이 대부분이었다. 그러나 이 병풍은 순정효황후가 1906년 동궁계비로 입궐한 것을 축하하거나 1907년 황후로 등극한 것을 경하하기 위해 제작된 작품일 가능성이 크다. 남아 전해지고 있는 9점의 작품들이 장수와 풍요, 번창과 평안 등 기복과 축하의 의미와 맥이 닿아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이를 통해 백납병의 수요층이 궁중까지 확대됐음을 알 수 있다.
현재 기증자의 전언에 의하면 아버지로부터 12폭 병풍에 60점의 그림이 그려진 완형의 백납병을 받았다고 한다.
‘활짝 핀 진달래 사이로 나비가 정겹게 날고, 사립 안 나무 아래 어미 개가 새끼들 젖 먹이고, 매화에 제비 깃드는데 개구리가 올챙이 노니는 양 바라보고, 누각에서 담소하는 선비로부터 여인이 가마로 강을 건너려는 풍경까지….’ 산수에서 기명절지나 화조영모 등 여러 풍경들이 두루 그려져 있었다고 한다. 마치 사진첩처럼.
기증자는 백납병을 폭으로 잘라 두루마리 형식으로 보관하다가, 집에 귀한 손님이 올 때마다 한 장씩 오려 선물했다고 한다. 60여 장이 넘는 낱낱의 그림이 인연 따라 병풍으로 만들어졌다가, 또 인연 따라 한 장 한 장 흩어진 내력을 생각하면 마음속에 애틋함이 생겨난다. 이곳저곳 흩어진 그림들이 언젠가 다시 인연 따라 한 곳에 모여 다시금 한 권의 역사가 되기를 기대해본다. 세월은 흘렀으나 채용신의 그림이 빛바랜 사진이 되지 않고 그 가치가 더 선명해지는 것은, 새로운 것을 쉼 없이 펼쳐낸 오롯한 작가 정신 때문이 아닐까./ 이종근기자. 도움말=이현주 범어사성보박물관 부관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