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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북스토리

<이종근의 역사문화 이야기 80> '선전'과 이인성이 그린 전주 부채, 그리고 지우산

<이종근의 역사문화 이야기 80> '선전'과 이인성이 그린 전주 부채, 그리고 지우산

1. '선전'과 이인성이 그린 전주 부채

'선전’으로 약칭되는 조선미술전람회는 1930년대에 많은 미술가들을 배출하고 성장하였던 미술작품 공모전이다. 
조선미술전람회는  1922년. 일제강점기에 조선총독부가 개최한 미술작품 공모전. 약칭으로 선전(鮮展)이라 부른다. 1922년부터 1944년까지 23회를 거듭한다.
당시 조선미술전람회에서 가장 많은 찬사를 받았던 대표적인 화가로는 이인성이 있다.

한국 근대화단에서 약관의 나이로 조선미술전람회를 통해 혜성처럼 나타난 아소(我笑) 이인성(李仁星: 1912-1950)은 1930년대 일제 강점기에 '조선의 지보(至寶)', '양화계의 거벽(巨擘)'으로 불리며 명성을 떨쳤다.

그는 대구에서 초등학교를 졸업 후, 1929년의 8회 조선미전에 입선하면서 화가의 길을 걷기 시작했다. 
그가 19세가 되던 해 ‘선전’에서 특선을 수상하며 일본의 요미우리(読売新聞, よみうりしんぶん) 신문에 ‘천재소년 이인성’이라는 기사가 실리기도 했다.

 이후에도 그는 조선미술전람회에서 여러 차례의 입선, 총독상 그리고 창덕궁상과 같은 최고의 상을 수상, ‘화단의 귀재’라는 찬사를 받으며, 그 명성을 이어갔다. 

1934년 제13회 조선미술전람회에서 특선을 수상한 이인성의 '가을 어느날'은 바구니를 팔에 걸쳐든 반나체의 여인과 그녀의 아들로 보이는 어린이가 시골 들판에 서있다. 하늘과 땅을 푸르고 붉게 표현했고, 오염되지 않은 풍경의 모습을 강렬하고 토속적인 원색으로 나타냈다. 

이 그림은 현실과 상상을 조합하여 재구성한 조선의 가을 풍경이라고 전해진다. 그런데 이 작품을 자세히 들여다보면 조금 이상한 점을 발견할 수 있다. 우선 작품의 제목이 '가을 어느날'인 점을 고려했을 때, 그림 속 여인과 어린이는 반나체의 모습으로 다소 계절에 어울리지 않는 옷차림을 하고 있다. 

가을의 모습이라기보단 더운 열대지방의 풍경을 묘사한 느낌이다. 종합해 볼 때 이인성은 아마 실제 조선의 가을 풍경을 그렸다기보다는 상상 속 풍경을 작품으로 구현하였다는 점을 짐작할 수 있다. 

사실 이 작품이 계절적인 요소뿐만 아니라, 당시 시대적 상황과도 다소 동떨어진 부분이 많다. 이 부분은 동시대에 조선미술전람회에 소개된 다른 화가들의 출품작들을 통해서도 알 수 있다.

향토성을 대표하는 이인성 화가의 작품은 고갱의 작품과 나란히 보았을 때도 부족하지 않을 만큼 기법적으로 뛰어난 부분이 많다. 소재적인 측면에서는 당시 조선인들을 실상과는 다소 달랐더라도, 한국의 근대 미술에 있어 서양의 후기 인상주의를 수용하는 모습도 보여주었다.

안타깝게도 일제강점기 시대에 조선미술전람회에 출품된 작품을 평가하고 수상권을 결정지었던 심사위원들은 모두 일본인이었다. 
일본 심사위원들은 조선 화가들이 목가적이고 원시적인 풍경을 그린 작품들에 높은 점수를 주었으며, 그러한 향토적 소재가 조선을 대표하는 작품들이라며 적극 권장했다. 

당시 일본이 문화적으로 매우 근대화되었던 시기임에도 불구하고 조선인 화가들에게는 다소 원시적인 소재에 착안하도록 강요한 점을 고려할 때, 이러한 심사위원들의 평가 기준이 다소 모순적이었다고 볼 수 있다.

이에 일각에서는 조선 화가들이 본인들도 모르는 사이에 전람회에서의 좋은 성적을 목표로 일본인들이 설정한 틀에 세뇌 당한 것은 아니냐는 부정적인 평가가 있다. 이와 함께 향토성을 띠는 목가적인 풍경화는 일본 작품들의 근대적인 모습과 비교할 때, 상대적으로 조선을 더 미개하게 느끼도록 만드는 의도가 있었던 것이 아니냐는 시각을 제시했다. 반면 향토색에 대한 긍정적인 의견도 있다.

1920년대 초부터 일본 유학생들에 의해 단편적으로 소개되기 시작했던 모더니즘 미술은, 20년대 후반부터 본격적으로 조선 화가들에게도 수용되기 시작했다. 반 고흐, 고갱, 세잔 등 후기 인상파를 비롯. 주관적이면서도 자연주의적 형상성을 존중하는 모더니즘은 특히 조선미술전람회를 통해 유통됐다. 그중에서도 일본에서 유학을 했던 화가들은 유럽의 영향을 받은 일본의 화풍을 그대로 흡수하여 인상주의적인 화풍을 가지게 됐다. 이러한 시대적 동향을 대표한 작가가 이인성이다. 

그는 1931년 도쿄 유학을 떠난 뒤에는 주경야독하며 일본 제국미술전람회 입상, 일본 수채화회전 최고상 등을 수상했다. 그의 작품은 인상주의, 후기인상주의 화풍을 나름대로 발전시켜 민족의 현실을 상징적으로 구상화한 향토적 서정주의의 전형을 이뤘다는 평가를 받는다.

이인성은 유학 이후인 1933년부터 유화와 수채화를 다루며 기법적인 부분에서 세잔과 고갱의 영향을 받은 후기 인상파의 화풍을 반영하기 시작했다. 
이인성의 '가을 어느날'과 '경주의 산곡에서'  등은 폴 고갱의 강렬한 색채와 기법 등을 연상케한다.

이인성과 고갱의 작품은 기법뿐 아니라 풍경이나 인물의 표현에도 비슷한 부분이 많다. 두 화가 모두 인물을 반나체와 맨발의 모습으로 묘사했으며 색감 또한 어두운 갈색으로 채색했다. 
이러한 묘사는 목가적이며 원시적인 농촌 생활을 떠올리게 한다. 흥미로운 점은 이인성과 고갱은 시각적인 측면뿐만 아니라 정치적인 측면에서도 닮은 점이 많다는 점이다. 

고갱은 프랑스 화가이지만 타히티 섬에 오랜 기간 동안 체류하며 많은 작품들을 탄생시켰다. 타히티는 1844년 프랑스에 의해 왕조가 멸망되어 식민지로 통치된 섬이었다. 

고갱은 프랑스의 문명세계에서 벗어나 타히티의 순수함, 원시성을 전달하고자 하였으며, 많은 사람들이 이러한 고갱의 그림에 열광했다. 자신들의 식민지였던 타히티의 원시적인 모습을 그린 고갱의 작품에 프랑스인들이 열광한 이유는 무엇일까? 

어쩌면 그들은 타히티인들을 자신들과 다른 인종으로 인식하고 있었으며, 고갱의 작품을 통해 그 이미지를 확립했던 것일지 모른다. 하지만 고갱의 작품에 대해 부정적인 시각만이 남아있는 것은 아니다. 

 'When will you marry?'는 강렬한 색상과 단순한 형태를 제안하며 후기 인상주의를 이끌었던 작품으로, 2015년 3000억 원대에 판매되며 당시의 세계 최고가 경매 기록을 경신했다.

한편 향토성을 대표하는 이인성의 작품은 고갱의 작품과 나란히 보았을 때도 부족하지 않을 만큼 기법적으로 뛰어난 부분이 많다. 소재적인 측면에서는 당시 조선인들을 실상과는 다소 달랐더라도, 한국의 근대 미술에 있어 서양의 후기 인상주의를 수용하는 모습도 보여주었다.
향토성에 대한 발굴은 식민지 조선의 처절한 현실을 부각시켰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이인성을 포함한 1930년대의 작품들은 당시의 한국을 보여주는 사료다.

우리가 만일 작품을 감상할 때 작가의 생애나 당시의 정치적, 문화적 배경을 이해하고 감상하는 방향으로 접근한다면 더욱 다양한 해석도 가능할 것이다. 일제강점기 시대의 그림을 감상하며 향토색을 찾기 위한 당시 화가들의 노력 안에 담긴 애환의 감정에 대해 떠올려본다면, 감성을 자극하는 애잔한 감동으로 심금이 울릴 터이다.

'전주부사'에 단선‧선자, 우산에 대한 다음과 같은 기록이 있다.

“이 세 가지 모두 제작은 오로지 수공업에 의존하고 있다. 선자는 7단계의 분업으로 만들어지는데, 선자의 손잡이나 뼈대 등에 낙죽(烙竹)이라 불리는, 낙화(烙畵)를 그리는 것이 있다. 이것은 인두로 섬세한 모양 등을 대나무 표면에 그리는 것인데 특수한 기술을 필요로 하기 때문에 전문가는 매우 적다. 예전에는 박병수(朴炳洙)가 이에 뛰어났으며,  지금은 백남철(白南哲, 완산정)의 이름이 높다고 한다”

전주 우산의 역사도 소개된다.

“우산에 붙이는 문양은 향토색이 짙은 진기한 것이기 때문에 풍류를 아는 사람들의 사랑을 받고 있다. 조선 우산도 전주 특산인데 유래는 명료하지 않다. 일설에 의하면 1895년의 전쟁 무렵, 동학교도 중 남고산으로 달아나 숨어 살던 자들이 생활비를 벌기 위해 양산(洋傘)의 제작법을 모방하여 그것을 창제한 것이라고 한다. 참고로 죽골(竹骨)에 종이를 바른 작은 우산은 약 300년 이전부터 경기전 내의 용인(傭人) 등이 부업으로 제작, 판매했다고 한다”  

1934년 정태량 등이 전주제산조합을 만들어 250만개를 중국과 미국 등에 수출했다고 한다.

이인성이 1939년  전주 단선의 화면을 그린다. 
전주산업조합이 단선의 이해 3월 3년의 계획으로 실행한다.
단선은 전주를 방문한 사람들의 기념품으로 인기가 높은데 이에 그린 풍속화가 너무 속됐기 때문이다. 이때 5장의 의장을 도안했다. 

동아일보 1939년 5월 21일자에 이같은 기록이 보인다. 

같은 신문 1938년 3월 26일자는
'날개도친 부채 미국으로 수출됐다고 한다. 이어 1940년 조선총독부의 조선수출공예품 전람회에서 입상한다.

'실용품에서 훌륭한 예술품이 되어 외국시장에 내놓아도 부끄러움이 없다'는 1940년 1월 12일자 동아일보의 기록이 더 더욱 눈길을 끈다.

2.전주 지우산

전주의 우산은 동학 교도와 관련이 있다고 한다.
윤규상 전북 무형문화재 제45호 우산장은 국내 유일의 지우산 장인이다. 
1943년 완주군 용진면 삼삼리에서 목수 윤덕용의 막내아들로 태어난  그는 손재주가 좋았다.
대나무로 만든 살에 기름먹인 한지를 발라 만든 지우산이 대중화됐던 시대. 대나무 살대는 바람이 불어도 뒤집어지는 일이 없고, 기름먹인 한지는 가죽만큼이나 튼튼하고 견고했다. 
특히 질 좋은 전주 한지로 만든 전주의 지우산은 전국은 물론 일본과 독일로 수출까지 했다. 

지우산은 '말 그대로 종이로 만든 우산'을 말한다. 대살에 기름먹인 한지를 붙여 만든다. 지우산은 불과 1950~60년대까지만 해도 서민들이 사용하던 생활필수품이었음에도, 현재는 그 존재 자체가 거의 희미해진 물건이다. 그러나 1970년대 비닐우산이 등장하고, 1980년대 우산을 대량으로 생산하는 공장이 등장하면서 자취를 감췄다.

윤문화재는 지우산엔 우리 민족의 역사와 정서가 녹아있다고 말한다. 때문에 대나무를 골라 살 대를 만들고 한지에 들기름을 바르는 일까지 80여 차례의 손길이 가는 제작 공정을 고집스럽게 직접 해낸다. 이런 노력들로 만든 지우산은 전통예술 공연과 사극 영화 등에서 인기다.

그는 16세에 전주 장재마을의 한 우산공장에 견습공으로 입사하면서 우산과 인연을 맺었다. 장재마을은 초곡면 장재리에서 유래한다. '장재(長財)'는 재물이 많다는 의미로, 그저 많은 재물을 그치지 않고 길이길이 이어왔기 때문이리라. 여기서는 장(長)자가 길다는 뜻이 아닌 많다는 의미같다.

어린 나이에 대나무를 쪼개거나 다듬는 일은 매우 고단해 약한 윤규상의 두 손엔 대나무 가시에 찔린 핏살 흔적이 가시질 않았다. 그러나 윤규상은 2년여 만에 그만뒀다. 승급 기간이라는 2년 동안 급료도 한 푼 받지 않고 열심히 일했음에도 주인이 약속을 지켜주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어 그는 모래내시장의 엄주학씨의 우산 공방으로 옮겨 앉았다. 윤규상에게 있어선 이곳이 우산장이로 가는 지름길이었다.

이때가 20대 초반으로 2년 뒤 독립해서 공장을 냈는데 반촌마을이다. 이때 이 마을엔 35개의 공장이 있었다. 
반촌마을은 반대산(반다뫼, 반대묘, 반대미)의 '반자를 따서 붙인 마을'이란 의미다. 구 전주형무소가 있었던 자리로 주민 투표로 마을 이름이 정해졌다고 전한다. 

그는 25세 때 전주에서 독립했다. 당시 10여명의 기술자를 채용한 그의 공장에선 한 달에 보통 3,000여개의 우산이 생산되어 전국으로 팔려나갔다.
 1960년대엔 전주시 우아동 장재마을을 비롯, 산성마을 등 전주엔 우산공장이 35개 처였으나 현재는 그의 공방 단 1개만 남았다.
지우산은 완성까지 80여 차례의 손길이 간다. 각 과정마다 정성을 다해 세심한 주의를 기울여야 한다. 각각의 재료들이 한 치의 어긋남 없이 제자리에서 역할을 해줘야 우산이 펴진다.

전주 산성마을은 인근 남고사에서 전주부중으로 울려 퍼지는 저녁 종소리는 전원적 풍경과 어우러져 한 폭의 그림과 같은 아름다운 모습이라 하여 ‘남고모종(南固暮鐘)’으로 일컬어지며 ‘완산8경’의 하나로 꼽혔다.
또, 이 일대는 충경사, 동문지, 북장대, 억경대, 만경대, 남고진사적비, 남고사, 삼경사 등 문화유산이 기라성처럼 많다.

산성마을 입구엔 이택구화가의 작업실이 자리하고 있다. 
이 자리는 전주 지우산 공장이 자리한 곳으로 3동의 건물이 있었던 곳으로, 바로 위로 올라가면 500평 남짓한 곳에 대나무가 남아있어 가능하지 않았나 싶다.
전주 지우산의 기원은 널리 알려지지 않고 있다. 

다만, 300년 전 경기전 안에서 소립(小笠)을 만들었다는 기록이 보인다. 1939년엔 동서학동 남고산 길목 일대에서 죽재(竹材)가 170톤, 들기름 500관, 한지가 1,000괴가 소비됐다고 한다. 1괴는 전지 2,000장을 의미하며, 한지 1괴에 400개의 우산을 만들었다. 그렇게 보면 이곳에서 연간 40만개의 우산을 만들었다. 

윤문화재는 산성마을 이곳에서도 지우산을 만들었다고 전한다.

그 누구는 이곳의 대나무가 동학농민군들이 죽창으로 사용하기도 했다고 말하기도 하며 어느 누구는 전주 부채와 지우산을 만들 때 썼다고 말하기도 한다. 동학 교도들의 후손들이 먹고 살라고 이곳의 대나무로 죽창도 만들고 지우산도 만들었다는 것이다.

그러나 1970년대 이후 값싼 비닐우산의 보급과 천우산, 중국 수입산이 들어오면서 문을 닫게 됐다고 한다.
오방색의 한지에 햇빛이 비춰들면 꽃비가 내리는 것 같다. 비꽃처럼 아름다운 색이다. 그 전통의 미감을 만들어내는 지우산의 아름다움이 전주에서 오래토록 대물림되기 바란다.

작품 이미지 

*이인성, '가을 어느날(캔버스에 유채, 1934 (이미지 출처 : 호암미술관)'

*이인성, '경주의 산곡에서(캔버스에 유채, 1935 / 삼성리움미술관 소장 (이미지 출처: 뮤움)'

*동아일보 1938년 3월 26일자 기사

*윤규상 문화재가 만든 지우산

*윤규상 우산장(전북 무형문화재)

*전주 미래 유산 장재마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