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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북스토리

전주 서문교회 종각, 등록문화재 됐다

전주 서문교회 종각이 등록문화재가 됐다.


전북특별자치도는 22일  ‘전주 서문교회 종각’을 등록문화재로 등록 고시했다.
전주 서문교회의 종탑이 국내에서 가장 오래된 독립된 것으로 확인됐다.
서문교회의 한옥 종탑은 1892년 7인의 선교사로 들어와 1908년, 별세한 남편 전킨을 기념해 부인 매리 레이번여사가 기증한 직경 90cm짜리 큰 종을 달기 위해 만들었다.
이 종은 미국에서 제작돼 군산항을 걸쳐 오게 되는 바, 황소가 땀을 흘리면서 가져오는 사진이 눈길을 끌고 있다. 하지만 1944년 일본이 전쟁 무기를 제조하기 위해 공출할 때 ‘전킨 목사 기념종’이 빼앗기면서 그 모습과 그 소리를 잃게 된다. 1945년 해방 후 국내에서 제작된 종을 구입해 허전했던 그 자리를 메꾸어 달아 놓은 것이 현재에 이르고 있다. 높이 6m80cm인 종각의 처음 위치는 현재의 예배당 정문 계단에 자리했지만 그 후 수 차례 옮기다가 현 위치에 서 있으며, 국내에서 가장 오래된 독립된 종탑으로 평가받고 있다.
서문교회 종각은 호남 선교의 선구자 선교사 전킨(William M. Junkin, 1865⁓1908)을 기념하여 축조되었으며, 1908년에 신축된 이후 1934년 종각 위치가 이설됐다가, 1986년 원 위치로 복원 이설했다.
 종각은 정면과 측면 모두 1칸의 목조 건축물에 팔작지붕이 올려진 형태다.
전주 서문교회는 19세기 기독교 선교의 가장 중요한 거점 역할을 했다. 종각은 건립 당시의 형태를 유지하고 있고, 부분적인 변형이나 부재의 교체 등에 대한 기록이 체계적으로 존재하는 등 학술적·기독교사적 가치가 크다는 평가다.
레이번은 남편의 숭고한 선교 업적을 기념하며 종을 주문해 교회에 헌납했다.  미국을 출발, 기선을 타고 태평양을 건너 직경 90㎝였던 종은 미국을 출발해 기선을 타고 태평양을 건너 인천, 만경강 포구, 김제 쌍강포를 거쳐 쇠달구지에 실려 교회까지 왔다.
110년 전 전킨을 애도하며 울려 퍼진 맑은 종소리는 20리 밖까지 들렸다고 한다. 그 복음의 종소리가 지금도 들리는 듯하다./이종근기자



미국, 인천, 김제 쌍강포 거쳐 쇠달구지에 실려온 서문교회 종

 

서문교회 종각은 초기 호남선교의 기초를 놓은 전킨 목사를 기념하는 상징물이다.
1908년 1월 2일 당시 담임목사로 섬기고 있던 윌리엄 전킨(William McCleary Junkin, 한국명 전위렴, 1865~1908) 선교사가 갑작스럽게 별세했다.
호남지역의 초기 선교사로서 군산과 전주지방에서 지역 선교를 위해 헌신적으로 일한 대표적인 인물이었지만 갑작스럽게 별세한 것이다. 선교의 아버지로 불리는 전킨 선교사의 묘비 바로 앞에는 시드니, 프랜시스, 조지의 묘비가 있다. 전킨 선교사는 군산 선교의 개척자로 1904년부터 4년간 전주서문교회 담임목사를 역임했으며, 군산 영명학교를 세웠다. 부인 메리 레이번은 기전여학교 초대 교장을 지냈다. 기전여학교의 ‘기전’은 ‘전킨 선교사를 기념한다’는 의미가 있다고 한다.
선교사들은 조선의 잦은 풍토병으로 고생했다. 전킨 선교사의 세 아들도 예외는 아니었다. 1893년 4월 큰아들 조지는 태어난 지 1년 만에, 1899년 시드니도 2개월 만에 사망했다. 1903년 프랜시스도 태어난 지 얼마 되지 않아 사망했다.
자식이 죽으면 가슴에 묻는다는 말이 있는데 태어나자마자, 또는 얼마 안 돼 생을 마쳤으니 부모의 마음이 얼마나 아팠으랴. 선교사들의 묘지를 둘러보며 자녀를 잃는 고통 가운데서도 포기하지 않고 복음 전파를 위해 척박한 땅을 일군 강력한 영혼의 힘을 묵상했다. 그들의 끊임없는 한국 사랑의 메시지가 안일한 시간을 보내는 나의 마음을 쿡쿡 찔렀다.
전킨 선교사는 16년간 헌신적 선교활동으로 호남 선교의 위대한 업적을 남겼다. 그는 선교 중 이런 말을 남겼다. “나는 말에서 떨어져 갈비뼈가 부러졌고 세 번의 편도선염을 겪었다. 편도선 제거 수술을 할 때는 마취가 충분히 되지 않아 너무 힘들었다. 내 어린 것들은 집에서 의사도 없이 태어나 며칠 후 폐렴으로 죽었다”
그러나 그는 자녀의 죽음 앞에서도 하나님이 주신 사명을 놓지 않았다. 1908년 폐렴으로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았지만 “선교사의 삶은 사랑이 넘치는 삶이며 행복이 넘치는 삶이다”라는 어록을 남겼다
서문교회와 유족들이 심각한 충격에 빠졌다. 전킨의 별세 소식을 들은 레이놀즈는 서울에서 급히 내려와서 장례식을 주관했고, 결국 다시 전주에 내려와서 서문교회를 돌보면서 주변의 교회들을 관리하는 일까지 감당하게 됐다.
전킨이 별세한 후 부인(메리 레이번 Mary Leyburn은 조선을 떠나 미국으로 돌아가야만 했다. 남편을 머나먼 이국땅에 주검으로 남겨놓은 채 미국으로 돌아갔을 때 본 교회의 성도들은 전킨이 별세할 때 섬겼던 교회에 그를 기념할 만한 무엇인가를 설치해서 그의 사역을 기억하게 하자는 뜻을 모으게 됐다. 교회의 신자들이 전킨 부인에게 무엇을 하는 것이 좋을지 물었을 때 전킨 부인은 남편이 생전에 서문교회에 설치하고 싶어 했던 종각을 세우는 것이 좋겠다는 뜻을 전했다.
교회의 신자들은 전킨 부인의 뜻에 따라서 서문교회에 종각을 설치하기로 하고 뜻을 모아서 연보를 했다. 종을 구입하는 경비는 물론 종을 미국에서부터 조선까지 운반하고 설치하기까지 모든 경비를 부담했다. 이렇게 해서 미국에서 준비한 종을 미국의 해외 선교 신문의 편집장인 윌리엄(H. F. William) 목사가 기선에 싣고 태평양을 건너 제물포까지 운반해왔다.
그러나 다시 이것을 전주로 옮겨와야 했다. 이때 육로로 운반하는 것이 여의치 않아 범선(帆船)을 이용, 서해를 거쳐 김제의 만경강 포구를 거슬러 올라와 회포면(回浦面) 쌍강포(전주에서 40리 거리)까지 옮겼다.
그리고 여기서 다시 육로로 소달구지를 이용해 서문교회까지 옮겼다. 이때 쌍강포 가까운 난산과 쇠평리 교회의 믿음의 형제들이 힘을 합하여 운반하는 일에 도움을 주었다. 이렇게 볼 때 서문교회 앞에서 만날 수 있는 종각은 결코 그냥 지나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종이 미국에서 도착하자 서문교회는 1908년 10월 26일(월) 제직회를 열어서 종을 설치할 수 있는 종각(鐘閣)을 건립할 것을 결의했다. 이 결의와 함께 종각을 설치할 경비를 마련하기 위한 연보를 하기로 하고 교우들의 뜻을 모았다. 그런데 이 종각을 건립하는 것은 서문교회의 신자들만이 아니라 인근의 교회들도 동참하였던 것을 볼 수 있는데, 이는 당시 서문교회에 설치된 종이 주는 의미가 단순하지 않은 것을 알게 한다.
종각을 건립하기 위하여 서문교회에서는 장로 장필수, 전도인 전영칠 집사, 신자 가운데 목수인 김학수 등 세 사람을 종각건립위원으로 세워서 맡겼다.
1908년 12월 초 한 달 반의 공사 기간을 거쳐서 종각을 완성하였고, 12월 10일 오후 4시 헌종예식(獻鐘禮式)을 거행했다. 이때 건립위원인 전영칠 집사가 쌍강포에서부터 서문교회까지 종을 운반하는 데 도움을 준 이웃교회 형제들의 도움과 협조에 감사하는 말과 함께 그 과정을 설명했다. 이어 레이놀즈 선교사가 미국에서부터 이 종이 보내지게 된 동기와 어떤 의미로 사용할 것인지 설명했다. 또, 미국에서부터 이 종을 운반해온 윌리엄 목사가 미국에서 종을 구입하게 된 사연과 함께 그 종이 ‘전킨 목사 기념종’이라는 사실을 설명했다. 그 다음에 김필수 장로가 감사의 기도를 드렸다. 이러한 과정을 마치고 나서 “윌리엄 목사와 레이놀즈 선교사, 그리고 류서백 목사, 전영칠 집사에 이어 교회에서 종을 관리하면서 종을 책임지고 치게 될 안경오 형제들이 차례로 종을 한 번씩 쳤다.”
미국에서 제작, 운반하여 설치한 이 종은 직경이 90cm에 이르는 대형 종이다. 이때부터 전주를 깨우는 새로운 소리가 사람들에게 들려졌고, 종소리 하나만으로도 교회의 존재는 물론 신자들에게는 교회를 향한 마음을 불러일으키게 하는 역할을 했다. 이제는 교회에서 울리는 종소리를 들을 수 없는 시대가 되었지만, 여전히 그 자리에서 전킨을 생각하게 하는 서문교회의 종각은 당시 전주시민들의 마음과 귀를 열게 했던 소리가 들리는 듯하다.
서문교회의 종각을 짓는 모습, 1908년 소달구지로 종을 운반하는 모습, 그리고 종각 상량식이 지금도 사진으로 남아 있다.
한편 전주선교사묘역에는 윌리엄 전킨 선교사를 비롯, 1898년 전주예수병원을 세운 매티 잉골드 의사 등 선교사와 가족 14명의 묘비가 있다./이종근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