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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북스토리

이름을 두 번 바꾼 이형록

이형록은 조선시대 화가로는 드물게 두 번이나 이름을 바꾸었다. 57세인 1864년(고종 원년)에 이름을 ‘응록膺祿’으로 바꾸더니 불과 7년후 64세인 1871년에 다시 ‘택균宅均’으로 개명했다. 이 사실은 《승정원일기承政院日記》에 기록되어 있다. 화원이기 때문에 이름을 바꾸는 데도 임금의 허가가 필요했던 것이다. 이 때문에 이형록의 작품은 이름만 갖고도 대략 제작 시기를 추정해 볼 수 있다. ‘이형록’이란 인장이 보이면 대략 1863년까지이고, ‘이응록’이라면 57세인 1864년에서 1871년 사이이며, ‘이택균’이라면 64세인 1871년 이후의 작품인 것이다. 《승정원일기》고종 20년(1883), 9월 8일 기사를 보면 이택균이 지방에서 벼슬살이를 하고 있는 것으로 나타나므로 그의 몰년은 1883년 이후로 추측할 수 있다.

이형록이 책거리를 잘 그릴 수 있었던 것은 유명한 화원 집안 출신이었기 때문인 것으로 추측된다. 할아버지 이종현(李宗賢, 1748-1803)과 아버지인 이윤민(李潤民, 1774-1832) 모두 책거리로 이름을 떨쳤다. 이윤민과 이형록 부자가 책거리에 능하였음은 유재건이 지은 7《이향견문록》에 다음과 같이 전한다.

화사 이윤민은 자가 재화載化다. 문방제구文房諸具를 잘 그려서, 사대부가의 병풍은 그의 손에서 나온 것이 많았다. 당시에 고묘高妙하여 짝이 될 이가 없다고 일컬어졌다. 그의 아들 형록도 가업을 계승하여 정공精工이 극치에 이르렀다. 내게 여러 첩의 문방도병풍文房圖屛風이 있는데 매양 방에 쳐놓으면 간혹 와서 보는 사람이 책들이 책꽂이에 가득 찼다고 여기다가, 가까이와서 살펴보고는 웃었다. 그 정묘하고 핍진함이 이와 같았다.



李畵師潤民, 字載化. 善畵文房, 搢紳家屛障, 多出於其手, 時稱高妙無儔. 其子亨祿, 亦承箕裘, 極其精工. 余有數幅文房圖屛, 每設於房舍, 或有來見者, 認以冊帙滿架, 近察而哂之. 其精妙逼眞如此.



이형록의 증조부인 이성린(李聖麟, 1718-1777)은 영조연간의 대표적인 화원으로 1773년(영조 49)의 연행燕行을 통해 체험한 서양화법을 집안의 후손들에게 전해주었을 개연성이 크다고 할 수 있다. 그의 아들 이종현, 손자 이윤민을 이어 증손자인 이형록에 이르기까지 책가도를 가업으로 삼은 전통의 연원은 이성린으로부터 비롯되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이성린이 책가도를 그린 기록은 없지만, 그의 후손이 책가도의 전문화원으로 성장한 데에는 이성린이 책가도의 화법적 기반을 마련해주었다고 짐작할 수 있다.

이형록의 아들인 이재기(李在基, 1830-?)와 이재선(李在善, 1843-?)도 가업인 화업을 이었다. 이형록의 장남인 이재기는 1860년(철종 11)부터 본격적으로 활동을 시작한 것으로 보인다. 1864년 아버지인 이형록이 이응록으로 개명할 때, 이재기도 ‘이창옥李昌鈺’으로 개명하였다. 이창옥의 동생 이재선은 18세때부터 자비대령화원으로 활동할 정도로 실력이 뛰어났다. 이들 형제는 분명히 가업을 이어 책가도를 그렸으리라 짐작되지만, 이들의 이름으로 전하는 책가도는 아직 확인된 것이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