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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북스토리

전북미술사 발굴, 연구해야

 

 

고창무장 출신 이형록 궁중화원 활동

혜원 신윤복과 어진화사 채용신도

 

본보가 25일자에 소개한 이형록(李亨祿,1808~1883)19세기에 활동한 화가로 철종까지 궁중화원으로 다수의 궁중행사에 참여했다. 그는 고창 무장 전주이씨 화원 집안에서 태어났다. 증조부 이성린으로부터 조부 이종현, 부친 이윤민(1774-1841)을 이어받아 자신은 물론 아들 3명에, 장손자까지 화원을 이었다고 한다.

이형록은 조선시대 화가로는 드물게 두 번이나 이름을 바꾸었다. 57세인 1864(고종 원년)에 이름을 응록(膺祿)’으로 바꾸더니 불과 7년후 64세인 1871년에 다시 택균(宅均)’으로 개명했다. 이 사실은 승정원일기(承政院日記)에 기록되어 있다. 화원이기 때문에 이름을 바꾸는 데도 임금의 허가가 필요했던 것이다. 이 때문에 이형록의 작품은 이름만 갖고도 대략 제작 시기를 추정해 볼 수 있다. ‘이형록이란 인장이 보이면 대략 1863년까지이고, ‘이응록이라면 57세인 1864년에서 1871년 사이이며, ‘이택균이라면 64세인 1871년 이후의 작품인 것이다. ‘승정원일기; 고종 20(1883), 98일 기사를 보면 이택균이 지방에서 벼슬살이를 하고 있는 것으로 나타나므로 그의 몰년은 1883년 이후로 추측할 수 있다. 이름 변경은 화풍에도 어느 정도 영향을 미쳤을 가능성이 있다. 이형록이 책거리를 잘 그릴 수 있었던 것은 유명한 화원 집안 출신이었기 때문인 것으로 추측된다. 할아버지 이종현(李宗賢, 1748-1803)과 아버지인 이윤민(李潤民, 1774-1832) 모두 책거리로 이름을 떨쳤다. 이윤민과 이형록 부자가 책거리에 능하였음은 유재건이 지은 이향견문록에 다음과 같이 전한다. ’화사 이윤민은 자가 재화(載化). 문방제구(文房諸具)를 잘 그려서, 사대부가의 병풍은 그의 손에서 나온 것이 많았다. 당시에 고묘(高妙)하여 짝이 될 이가 없다고 일컬어졌다. 그의 아들 형록도 가업을 계승하여 정공(精工)이 극치에 이르렀다. 내게 여러 첩의 문방도병풍(文房圖屛風)이 있는데 매양 방에 쳐놓으면 간혹 와서 보는 사람이 책들이 책꽂이에 가득 찼다고 여기다가, 가까이와서 살펴보고는 웃었다. 그 정묘하고 핍진함이 이와 같았다

이형록의 증조부인 이성린(李聖麟, 1718-1777)은 영조연간의 대표적인 화원으로 1773(영조 49)의 연행(燕行)을 통해 체험한 서양화법을 집안의 후손들에게 전해주었을 개연성이 크다고 할 수 있다. 그의 아들 이종현, 손자 이윤민을 이어 증손자인 이형록에 이르기까지 책가도를 가업으로 삼은 전통의 연원은 이성린으로부터 비롯되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이성린이 책가도를 그린 기록은 없지만, 그의 후손이 책가도의 전문화원으로 성장한 데에는 이성린이 책가도의 화법적 기반을 마련해주었다고 짐작할 수 있다.

이형록의 아들인 이재기(李在基, 1830-?)와 이재선(李在善, 1843-?)도 가업인 화업을 이었다. 이형록의 장남인 이재기는 1860(철종 11)부터 본격적으로 활동을 시작한 것으로 보인다. 1864년 아버지인 이형록이 이응록으로 개명할 때, 이재기도 이창옥李昌鈺으로 개명하였다. 이창옥의 동생 이재선은 18세때부터 자비대령화원으로 활동할 정도로 실력이 뛰어났다. 이들 형제는 분명히 가업을 이어 책가도를 그렸으리라 짐작되지만, 이들의 이름으로 전하는 책가도는 아직 확인된 것이 없다.

그는 어진 화사로 1852년과 1861년의 철종 어진 도사에 참여했다.

신윤복에 대해선 알려진 바가 거의 없다. 1758년경 태어나 1813년 이후 세상을 떠났다는 사실과 그가 남긴 그림뿐이다. 신윤복은 고령 신씨 신숙주의 동생인 신말주의 11대손이다. 신말주는 단종에 대한 충성심과 곧은 절개 덕분에 조선시대부터 명망이 높은 인물이다. 신윤복은 명문가의 후손이었고, 신윤복의 아버지인 신한평은 조선시대의 유명한 화원(畫員)이었다. 화원은 왕실 직속으로 또는 도화서(圖畫署)에서 그림을 그리던 직업 화가를 말한다.

조선말 이래 근대기 초상화로 명성을 날린 어진화사(임금 어진을 그린 화가) 채용신(18501941)의 활약상도 대단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