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꽂이를 통째로 옮겨 그린 듯한 책가도(冊架圖)는 책을 비롯, 당시의 여러 귀중품들을 함께 그린 그림을 말하며, 우리말로는 책거리라고도 한다. 책꽂이 형태를 8폭, 10폭의 병풍에 그린 후 그 안에 책과 기물이 가지런히 쌓여 있는 모습으로 그린 책가도와, 책꽂이는 생략하고 화면 위아래로 책과 물건만 나열하여 그린 책가도로 구별된다.
책가도는 당시로서는 서양화에서나 볼 수 있던 ‘투시도법’과 ‘명암법’을 응용해서 그려 조선 전통적 화법으로 그려진 그림에 비해 공간감과 입체감이 훨씬 살아 있다.
서민들의 풍속을 즐겨 그린 김홍도(金弘道)가 책가도를 잘 그렸다고 하며, 이윤민(李潤民)·이형록(李亨祿) 부자(父子)같은 화원도 책가도로 유명했다.
그렇다면 책가도는 언제 그려지기 시작하였던 것일까? 구체적으로 책가도가 우리나라에 전래된 기록은 찾기 어렵다. 다만, 조선 후기 북경 사행(使行)을 통해 당시 신문물이 전래되었던 정황을 볼 때 책가도 역시 그렇게 시작되었을 가능성이 크다. 중국에서는 강희康熙(1654~1722) 후반 이후 궁궐에서 서양화풍의 그림이 성행하고, 조청(朝淸) 관계가 정상화되어 연행(燕行)이 활성화되며 천주당 방문도 허락되었던 당시 상황에서 서양화풍의 중국 다보격 그림이 연행을 통해 조선에 전래되었을 가능성은 충분하다.
문방책가도는 일반적으로 병풍으로 그려졌다. 2폭 가리개로 그려지기도 하였지만, 8폭, 10폭 병풍이 대부분이다. 바람을 막아주는 동시에 행사가 있을 때 장식하는 역할도 할 수 있었다. 문방도 병풍이 일상생활에 활용되었던 사례는 일제강점기 및 근현대에 촬영된 사진 자료를 통해 알 수 있다.
대부분의 궁중회화와 민화에는 화가의 낙관이 없어 누가 그린 것인지 알 수 없다. 그런데 책가도 중에는 여러 물건 가운데 인장을 그려 넣으면서 인면(印面)이 보이도록 눕혀 표현한 경우가 있다고 한다.
도장을 그리는 것이 목적이었다면 굳이 눕혀서 그릴 필요가 없었을 텐데, 도장함과 여러 개의 도장을 그릴 때에도 도장 하나는 찍히는 면인 인면이 보이게 그렸다. 이를 숨겨진 도장, 즉 ‘은인(隱印)’이라고 한다. 화가는 자신의 이름을 후세에 남기고 싶었던 것일까? 다른 그림 어디에서도 볼 수 없는 책가도만의 흥미롭고 재치 있는 관습을 확인할 수 있습다. 궁중화원이었던 이형록(1808~1883 이후)은 책가도 병풍 제9폭에 자신의 이름을 새긴 도장을 그려 넣었다. 그래서 애초에 작가미상으로 알려졌다가 숨은 도장을 통해 화가가 이형록이라는 것이 알려지게 됐다고 민연구사는 말했다.
책가도 문방도를 모두 그린 화가로 궁중 화원으로 활동했던 이형록이 있다.
그의 책가도 속에 숨겨진 또 다른 재미는 ‘상징성’이다. 이 정도 규모의 책과 물건을 가진 선비라면, 학식은 기본이고 세상 부러울 게 없이 모든 걸 가진 사람이다. 제1폭에 그려진 살구꽃은 과거 급제와 입신양명을 상징한다. 수선화의 ‘선’에는 신선 선(仙) 자를 써서 신선처럼 살기를 바라는 마음을 담았다. 공작 깃털도 책가도의 단골 소재다. 공작은 문금(文禽)이라 불리며 문인의 관복 흉배에 새겨졌던 소재로, 문인으로서 높은 관직에 오르는 것을 상징한다. 시계 또한 실제로 보기 어려운 귀한 물건이었다. 자명종 시계가 우리나라에 들어온 것은 17세기라고 알려져 있지만, 19세기에도 실생활에서 보기 어려운 물건이었다. 석류는 씨가 많아 다산(多産)과 자손 번창을 기원하는 의미를 가진다. 제10폭에 등장하는 잉어는 용으로 변하는 ‘어변성룡(漁變成龍)’의 고사(故事)를 바탕으로 부귀와 출세를 기원하는 상징성이 있다.
그의 작품 속 재미는 책을 아슬아슬하게 쌓아서 보는 이로 하여금 시각적인 긴장감을 갖게 한다. 책들은 화면에서 위로 올라갈수록 아랫면이 보이고 아래로 배치될수록 윗면이 보이는 등, 책 표현에 일점투시도법에 가까운 원근법을 적용했다. 그러나 여기에 그치지 않고, 책을 지그재그로 배치, 단조로운 구성을 피하고자 했다. 책가 옆면의 갈색을 뒤로 갈수록 진하게 표현하여 책과 기물을 넣은 사각형 공간에 공간감을 주었다.
무엇보다 이 책가도는 진한 녹색 바탕과 갈색 테두리, 연녹색 상판 등 고급스러운 바탕색이 일품이다. 금선을 두른 고풍스러운 바탕색이 화려한 색감의 기물들과 잘 어우러져, 현존하는 책가도 가운데 가장 수준 높은 기량과 뛰어난 미적 감각을 보여준다.
차비대령화원 녹취재로 문방도가 출제됐고, 정조가 책가도를 애호하였던 것을 고려하면, 많은 화원 화가들이 책가도와 문방도를 그렸을 것이나, 화가가 ‘은인’을 통해 자신의 이름을 그림에 남긴 예는 드물기 때문에, 문방책가도 현전 작품이 꽤 많음에도 불구하고 누가 그렸는지 이름이 알려진 이는 많지 않다.
이형록은 이응록, 이택균으로 이름을 개명하면서 지속적으로 그림 속에 본인의 인장을 그려 넣었기 때문에, 책가도와 문방도를 꾸준히 그렸음이 확인된다. 그러나, 이형록 은인이 그려져 있는 문방책가도의 경우, 기물 구성과 배치, 채색 기법이 서로 달라 은인만으로 화가를 비정하는 경향의 한계를 보여주는 예도 존재한다.
책가도를 잘 그렸던 것으로 알려진 이형록은 역시 문방도에서도 뛰어난 기량을 보여준다. ‘문방도 6폭 병풍’은 화원화가인 이형록(1808~1883 이후)의 작품이다. 병풍의 제1폭에 그려진 인장에 은인(隱印)으로 백문방인 ‘이형록인(李亨祿印)’ 이 있다. 이처럼 작가가 밝혀질 경우 이 작품은 기준작이 된다.
대리석 재질과 전체적인 모양, 그리고 바닥에 비스듬하게 놓인 모습까지 동일하다. 그런데 글자 모양이 조금 다르다. 즉 ‘이’자와 ‘록’자는 같은데, ‘형’자와 ‘인’자는 좌우가 바뀐 모습이다. 원래 글자의 획순을 고려하면, 민속박물관 소장본의 글자가 방향이 맞다.
‘문방도 8폭 병풍’ 역시 전체적으로 안정감 있는 구도뿐 아니라 기물의 표현에서도 세밀하게 그려 화원 화가로서의 솜씨를 잘 보여 준다./이종근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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