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종근의 역사문화 이야기 77> 고창 무장현 출신 궁중 화원 이형록의 ‘문방도'
고창 무장현출신 궁중 화원 이형록(李亨祿,1808~1883년)은 그림을 업으로 삼은 가문 출신에서 태어났다. 증조부, 조부, 부친, 숙부가 모두 화원(畵員)이었다.
그도 많은 궁중 행사에 동원돼 그림을 그렸다. 1852년과 1861년에는 철종 초상화 제작에 참여했다.
이형록은 특히 책가도(冊架圖)로 명성을 날렸다.
조선 후기에 유행한 책가도는 책장에 서책과 문방구, 골동품을 그려 넣은 그림이다. 투시법과 음영법이 적용돼 서양화 영향을 받은 회화 장르로 평가된다.
흥미로운 사실은 이형록이 두 번이나 이름을 바꿨다는 점이다. 1864년에는 이응록, 1871년에는 이택균으로 개명했다. 이름 변경은 화풍에도 어느 정도 영향을 미쳤을 가능성이 있다.
국립중앙박물관이 펴낸 도록 '조선시대 채색장식화, 문방도·책가도'에서 민길홍 학예연구사는 이응록 시기 '책가도'를 분석, "기물을 묘사한 필선이 능숙하고 색감 완성도가 높은 전성기 작품"이라고 평가했다.
이어 "옆면을 채색하면서 뒤로 물러날수록 여러 단계에 걸쳐 어두워지도록 색을 구사한 것은 공간감을 의도한 것으로, 이형록·응록·택균 세 시기에 모두 보인다"며 "이택균 시기에는 색상이 급작스럽게 어두워지는데, 기계적으로 처리한 결과"라고 짚었다.
민 연구사는 이형록 시기의 문방도(文房圖)도 검토해 "책장과 서안(書案·책상) 등 좌식 가구가 없는 문방도"라며 "이형록의 자 '여통'(汝通)이 좌우 반전된 도장이 그려져 있다"고 밝혔다. 문방도는 바닥에 책과 기물이 놓인 모습을 묘사한 그림이다.
그는 "책갑(冊匣·책을 넣을 수 있는 상자)의 비단 패턴, 병의 무늬 등에 금니(金泥·금물)가 사용됐는데, 그림이 궁중 또는 높은 신분의 주문자를 위해 제작됐을 가능성을 보여준다"고 덧붙였다.
이수경 국립중앙박물관 학예연구관은 '이형록인'이라는 도장이 있는 문방도가 이형록 계통 문방도와 기물 구성·배치, 채색 기법이 다르다고 지적했다.
이 연구관은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문방도 가운데 기물이 매우 크고 빽빽하게 배치된 사례"라며 "이형록 이름을 새긴 도장을 근거로 그의 그림이라고 단정하는 접근법에 한계가 있음을 알려준다"고 강조했다.
이러한 견해에 따라 도록에 이 그림의 작가는 '이형록'이 아닌 '작가 모름'으로 기술됐다.
책가도·문방도는 조선 후기 사람들의 취향·꿈을 담아내는 병풍류가 주를 이룬다.
조선 후기에 등장한 독특한 양식과 내용의 그림이 있다. 바로 ‘책가도’(冊架圖)다.
반듯한 책장에 많은 책을 쌓고, 문방구와 각종 진귀한 골동품 등을 함께 배치한 그림이다.
학문과 책을 중요시한 당시 문인들의 가치관, 또 취향이 적극 반영된 유물이다.
조선의 문예부흥을 이끈 임금 정조(재위 1776~1800년)는 어좌 뒤에 책가도 병풍을 놓아 학문 숭상을 강조한 것으로 잘 알려져 있다.
책가도의 하나라 할 수있는 ‘문방도’(文房圖)도 있다.
책가도가 책을 올려 둔 책장이 있다면 ‘문방도’(文房圖)는 책가도와 같은 소재들이 그려졌지만 책장이 없다. 특히 선비들의 필수품이던 ‘문방사우’(종이·붓·먹·벼루) 등이 배치된다.
18세기 궁중과 사대부 관료문인들에서 시작된 것으로 보이는 책가도·문방도는 19세기에 이르러 민간으로 확산된다.
기존 소재에 부귀와 장수, 출세, 다산 등의 상징이 담긴 각종 동식물·사물들을 화면에 함께 그린 것이다.
당대 사람들의 바램과 꿈을 담은 민화의 하나로 자리잡으면서 사랑방의 장식품으로는 물론 잔치같은 각종 행사에 활용되기도 했다.
궁중 화원인 이형록(李亨祿,1808~1883년)의 작품 ‘문방도 6폭 병풍(19세기, 비단에 먹·안료, 204.4×288㎝ )은 그가 그린 문방도의 특징을 살펴볼 수 있다.
이형록의 본관은 전주(全州), 자는 여통(汝通), 호는 송석(松石). 전라도 무장(戊長)에서 출생했고, 1864년에 이응록(李膺祿)으로, 이어 1871년에 이택균(李宅均)으로 이름을 두 번 개명했다.
조선 후기의 대표적 화원 가문 출신으로, 증조부 이성린(李聖麟), 조부 이종현(李宗賢), 부친 이윤민(李潤民), 숙부 이수민(李壽民) · 이순민(李淳民) 등 일가가 모두 화원이었고, 그의 아들 세 명도 모두 화원이었다.
벼슬은 첨지중추부사(僉知中樞府事)를 지냈다. 1877년과 1883년에 화사 군관(畵師軍官)으로 지방에 파견되어 근무했다.
이형록(李亨祿)은 도화서 화원으로, 1827년부터 1863년까지 다수의 궁중 행사에 동원되어 도화(圖畫) 업무를 담당했다.
1827년의 존호도감(純祖純元王后上號都監), 1830년 효명세자 예장도감(孝明世子葬禮都監), 1834년 창경궁 영건도감(昌慶宮營建都監), 1835년 순조 국장도감(純祖國葬都監), 1843년 효현왕후 빈전혼전도감(孝顯王后殯殿魂殿都監), 1855년 익종 수릉 천봉도감(翼宗綏陵遷奉都監), 1863년 수빈 휘경원 천봉도감(綏嬪徽慶園遷奉都監) 등에 차출되어 일했다.
어진 화사로 1852년과 1861년의 철종 어진 도사에 참여했다. 또한 1833년부터 1863년까지 30년 동안 규장각 차비대령화원으로 활동했으며, 녹취재에서 성적이 가장 우수한 사람에게 주는 사과(司果) · 사정(司正)에 여러 차례 부록(付祿)되어 회화적 기량을 인정받았다.
이형록은 조부 이종현과 부친 이윤민에 이어 3대째 책가도로 이름을 날렸다. 이형록은 서양식 투시도법을 적용시켜 입체감이 살아 있는 책가(선반)에 서책과 문방구 · 기명 · 화훼 등을 진열한 책가도를 잘 그렸고, 이 외에 책장 없이 서책과 기물을 화면에 분산 배치한 새로운 형식의 책거리 그림도 그렸다.
현존하는 이형록의 작품은, 책가도에 이형록, 이응록, 이택균이라는 이름이 새겨진 인장이 있어 그의 작품으로 추정된다.
이형록의 인장이 남은 것으로는 삼성미술관 리움 소장의 '책가도' 8폭 병풍(1863년 이전)과 국립중앙박물관 소장의 '책가도' 8폭 병풍(1863년 이전)이 있으며, 이응록의 인장이 남은 것으로는 국립중앙박물관 소장의 '책가도' 10폭 병풍(1864~1871) 등이 있다.
또, 이택균의 인장이 남은 것으로는 통도사성보박물관 소장의 1864~1871년 10폭 병풍(1871년 이후)이 있다.
문방도와 책가도에는 왕실에서 민간에 이르기까지 책을 중요하게 여겼던 조선시대 사람들의 마음이 담겨 있다. 나는 오늘 무엇에 마음을 담고 있나.
<사진>
이형록이 이응록 시절 그린 '책가도'(국립중앙박물관 제공)
'이형록인' 도장이 있는 문방도(국립중앙박물관 제공)
이형록의 문방도 6폭 병풍(국립민속박물관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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