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익산 동헌'에 사육신(死六臣)의 절의(節義)를 칭송한 글을 남긴 전라관찰사 이석형
동양에서는 예로부터 충(忠)과 효(孝)와 열(㤠)을 중요한 덕목으로 여겼다. 사람이 태어나서 부모님께는 효를 다하고, 나라에는 충성을 다해야 한다. 그리고 여인은 시집을 가서 남편을 잘 섬기고 절개를 잘 지켜야 한다는 것이다. 조선 초기 저헌(樗軒) 이석형(李石亨, 1415∼1477)은 사육신의 절의(節義)를 칭송하는 시를 남겨 정치적으로 위기를 겪기도 하였다. 이석형은 세종 때 문과에 장원급제 하였고, 춘추관직제학으로 재직시 정인지 등과 고려사 편찬에 참여하였다. 1453년 계유정난으로 세조가 병권과 정권을 장악하자, 정인지·신숙주 등과 더불어 훈구파의 대표적 인물로 부상했다. 전라도관찰사로 재직중 1456년 6월 사육신 사건이 일어나자, 사육신의 절의를 칭송하는 시를 익산 동헌에 남겼다. 대간에서 치죄하자는 논의가 있었으나 세조에 의해 예조참의에 오른 뒤 대사헌을 거쳐 팔도체찰사를 지내기도 하였다. 그가 지은 ‘詠懷(영회, 회포를 풀어봄)’라는 시는 다음과 같다.
虞時二女竹(우시이녀죽)
순임금 때 두 여인 대 남아 전하고
秦日大夫松(진일대부송)
진나라 때 대부 소나무 전해 오는데
縱有榮枯異(종유영고이)
영화롭고 형편없는 차이 있지만
寧爲冷熱容(영위냉열용)
차가웁고 따슨 모습 어찌 짓겠나?
이 시는 중국의 고사(故事)를 동원하여 조선 세조 당시의 사육신 사건을 풍자하고 있다. 기구에서는 아황(娥皇)과 여영(女英)의 절개를 칭송하고 있다. 우(虞)는 순임금 때 나라 이름인데, 순임금의 두 비인 아황과 여영은 순임금이 죽자 피눈물을 흘리며 슬퍼하다가 소상강에 빠져 죽었는데, 두 여인의 한이 소상강가의 반죽(斑竹)에 아롱져 남아있게 되었다고 한다. 승구에서는 진시황 때 대부송(大夫松)을 이녀죽(二女竹)에 대비시켰다. 진시황이 태산에 봉선제(封禪祭)를 지내러 갔다가 갑자기 소낙비를 맞게 되어, 다섯 그루의 소나무 맡에서 비를 피하였다. 그후 다섯 그루의 소나무를 ‘오대부(五大夫)’로 봉하게 되었다. 전구와 결구에서는 현재는 비록 영화롭고 형편없는 차이가 있지마는 차갑고 따스한 모습 지을 필요가 없다고 하였다. 여기서 영화로운 존재는 대부의 소나무이고, 형편없는 존재는 두 여인의 대나무이다. 현재 대부의 소나무는 세조의 공신들인 한명회, 신숙주, 권람 등을 지칭하고 있고, 두 여인의 소나무는 사육신인 성삼문, 하위지, 유응부 등을 지칭하고 있다. 따라서 사육신들은 절의를 지켜 두 여인의 대나무처럼 현재는 쓸쓸하고 형편없는 존재가 되어 버렸다. 그러나 세월이 흐르게 되면 아황과 여영처럼 절개를 지킨 인물로 추앙받을 수 있을 것이란 것이다. 현재 중국 호남성(湖南城) 남쪽 소상강가에는 소상반죽(瀟湘斑竹)의 흔적을 찾아보기 어렵고 유람선이 오가는 관광지가 되어 있다. 현지인들도 소상반죽(瀟湘斑竹)에 전해오는 옛 이야기를 기억하는 사람들이 거의 없다. 그러나 아황과 여영은 절의(節義)를 지킨 여인으로 여전히 숭상되고 있고, 사육신들도 당대에는 뜻을 이루지 못했지만 죽음도 불사한 충신으로 우리들의 마음 속에 각인(刻印)되어 있다.(변종현 경남대 국어교육과 명예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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