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종근의 역사문화 이야기 69> 전라감사 이석형, 한국판 히포크라테스 선서 '의원정심(醫員正心) 규제(規制)'
“세종 22년(1140년)에 이석형이 진사와 생원 시험에 이어 문과에서도 장원을 했다. 세종은 인재를 얻음을 크게 기뻐하며 정6품인 사간원 좌정언 지제교에 임명했다. 또 광화문 밖에서 잔치를 베풀고 여러 왕자들로 하여금 이를 보게 하였다.(이석형 행장)"
조선시대의 의원 중에도 감언이설로 환자를 유혹한 사례가 있다. 세조 시절에 보성현에 꽤 알려진 의사 장덕이 있었다. 빼어난 실력의 그는 인근 몇 십리 안에 의원이 없는 지리적 이점까지 활용해 돈을 긁어모았다. 그러나 인격수양이 덜 되었던 모양이다. 독점적 지위를 악용했다. 갈수록 갑이 되었다. 특진 명목으로 많은 돈을 요구하고, 일반으로 접수하면 건성으로 진료했다. 환자들은 착취임을 알면서도 달리 방법이 없었다.
게다가 수려한 외모의 여인이 오면 작업도 걸었다. 전문용어를 가장한 괴상한 말로 꾀고, 감언으로 유혹했다. 그녀들의 심장을 뛰게 한 뒤 농락했다. 바르지 못한 방법으로 돈을 모으고, 여성을 희롱한 그는 관리들에게 상납도 했다. 튼튼한 안전장치를 한 그는 비리혐의로 고발되어도 전혀 문제가 되지 않았다, 오히려 억울함을 관에 호소한 피해자들이 무고를 한 가해자로 몰리기도 했다. 날이 갈수록 장덕과 관에 대한 원성이 고조됐다.
세조 2년인 1456년 전라감사로 간 저헌(樗軒) 이석형(李石亨, 1415-1477).
그는 민정시찰차 지역을 순회하던 이석형은 강진의 만덕사에서 잠깐 휴식을 취했다. 이곳의 부처는 지극히 영험하다고 소문이 나 있었다. 집안에 환자가 있는 사람들의 공양이 그치지 않았다. 환자 가족들은 절에 머무는 동안 서로의 처지를 위로하며 대화를 했다. 그들은 이야기 중에 의원 장덕을 성토하곤 했다.
이석형은 사건 조사를 지시했다. 장덕의 죄상은 낱낱이 드러났다. 이석형은 그를 의법 처리했다. 감사의 임기를 마치고 서울로 올라온 이석형은 의원들의 갑질을 바로잡는 방법을 고민했다.
민정 시찰 과정에서 사실을 알게 된 이석형은 관리들이 비호하는 그를 의법 처리했다. 서울로 올라온 이석형은 대사헌으로 재직하던 1461년, 조선판 히포크라테스 선언문인 '의원정심규제(醫員正心規制)'를 제정했다. 5년 뒤에는 팔도도체찰사로 전국을 순회하며 널리 알렸다.
세종은 동양 최대의 의학사전인 의방유취를 출판했다. 이 책에는 당시 의원들의 그릇된 도덕관을 걱정하던 세종의 뜻이 담겨 있다. '의원정심규제'는 이 책의 핵심과 맥락이 같다.
'의원정심규제'는 이석형의 친구인 김수온(金守溫)의 시문집 '식우집(拭疣集)에 소개돼 있다.
고증을 위해 저헌 이석형의 18대손으로 저헌학문연구소 임원인 이춘기 서울대 의대 명예교수에게 자문을 구했고, 과학사에 밝은 카이스트 교수 신동원(전북대 교수)에게 문의했다. 이로써 이석형이 지은 조선의 히포크라테스 선언문이 세상에 알려졌다.
'의원정심규제'는 다섯 항목이다.
하나. 의원은 의술의 갈고 닦음을 꾸준히 한다. 심사숙고하여 잘못을 저지르지 않는다.(一 醫者 不殆硏究 深思熟考 勿爲失數之至)
둘, 의원은 환자의 조건이나 빈부고하를 차별하지 않는다. 진료에 정성과 최선을 다한다.(二 醫員 夫患者 何條件貧富高下 莫論 無次別待遇 診療最善 誠實爲主)
셋, 의술은 인술이다. 은혜로 베풀며 축재의 상술로 삼지 않는다.(三 醫術 仁術也 慈惠濟象 非商道 勿把蓄財之道)
넷, 의사의 길은 정직함이다. 진료를 통해 안 병과 환자의 부끄러운 내용을 발설하지 않는다.(四 醫道 正直診療中 病原因愆過 秘密保障 一切他方 不許發說)
다섯, 의사는 세상 사람의 존경을 받아야 한다. 누구에게나 정성으로 대하고 교만하지 않는다. 치료를 빙자하여 다른 이익을 취하지 않는다.(五 醫學者 世間之尊敬人 恒時 以聖心對人 不爲驕慢 治療憑藉 不許他方利用
그야말로 한국판 (히포크라테스 선서)인 셈이이다. 두 강령을 비교해 보면 놀랍게도 거의 비슷하고, `인류 봉사', `양심과 품위', `비밀 엄수', `환자의 지위 불문'과 `의학 지식의 사용' 같은 항목은 동일하다.
'의원정심 규제'에서 흥미로운 점을 발견했다. 규정을 의자(醫者), 의원(醫員), 의술(醫術), 의도(醫道), 의학자(醫學者) 별로 항목을 구분하여 만든 것이다. 우선 의료인을 의자, 의원, 의학자로 분류했다. 의자는 하급의 의사이지만 공부와 연구를 게을리 하지 않아 환자 진료 시 실수하지 않아야 한다.
의사라면 반드시 누구나 충분한 지식과 기술을 갖추어야 한다는 뜻이다. 한 단계 위인 의원은 모든 환자에게 최선을 다해 성실하게 치료해 주어야 한다. 가장 높은 단계인 의학자는 존경받는 사람이어야 한다. 성聖스러운 마음으로 환자를 대하고, 치료를 이익의 방법으로 이용하지 않기 때문이다. 이 분류는 또한 의사가 성숙해지면서 점차 발전해야 할 방향을 제시한 것이라고도 볼 수 있다.
의술과 의도에 관한 표현도 의미심장하다. 우선 `의술은 인술이다.' 인술이니 근본적으로 베푸는 행위이다. 실제 진료행위에서 뿐만 아니라 마음가짐과 태도에서도 다른 사람 보다 훌륭하고 능력이 있어야 베풀 수 있다. 따라서 의사는 정신적 육체적으로 강건하고 남에게 줄 여유가 있어야 한다.
두 번 째로 `의도는 정직'이라고 했다. 놀랍도록 의학의 정곡을 꿰뚫는 정의이다. 물론 사이비 치료 등으로 환자를 현혹하지 말아야 한다는 의미도 있지만 나는 다른 뜻도 있다고 생각한다.
아직도 미완의 세계에서 헤매고 있는 의료진료와 의학연구을 발전시키려면 정직이라는 원칙을 지켜야 한다. 우리가 현재의 상황을 가식없이 있는 그대로 기술해야 미래에 이를 바탕으로 발전하고 해결할 수가 있다.
그러나 환자의 비밀은 보장해 주어야 한다. 이런 태도가 어디 의학의 길에서만 필요하겠는가? 모든 길에서 사람이 지켜야 할 바를 다시 한 번 강조하는 의미일 것이다. 규정의 순서로 보아 의원이 인술과 의도를 갖추어야 의학자가 될 수 있다.
우연의 일치인가. 이석형 공의 집터가 현재 서울의대 학생 기숙사 자리이다. 공은 젊을 때 진사, 초시, 중시, 삼장의 과거에 거듭 장원급제를 해 세상을 놀라게 한 수재였다. 집현전 직제학, 춘추관, 관찰사, 한성부윤, 대사헌, 팔도 도례찰사 등을 역임했고, '고려사(高麗史)'편찬에도 참여하였다. 그는 학문 뿐 아니라 글씨와 그림에도 능하고 온유한 성품에 재산도 많아 부족한 것이 없었다고 한다.
이석형 공이 집 뜰에 연못을 파고 있는데 김수온 공이 찾아와, 물이 많이 차면 물도랑이 열려 적정 수위를 유지하는 연못을 만들어 주었다. 부족한 것이 없는 공에게 “넘치지 않게 살라”고 경계하는 의미였다. 소박한 정자도 만들어 '계일정(戒溢亭)'이라 했다.
넘치는 것을 경계하는 계일정신은 공의 생활신조가 되어 명예와 권력, 재물과 복을 얻는데 과다하지 않도록 늘 주의했단다. 이런 가훈으로 후손에서 8명의 대제학과 9명의 삼정승이 나와 연안 이씨는 명문가가 되었다.
김수온은 저한과 문과에 같이 급제한 동료이면서도 학문과 벼슬에서 좋은 경쟁자였다. 수재인 이석형은 학문적 능력과 사상적 깊이로 '의원정심 규제'를 만들었고 김수온의 문집에 실려 오늘날 세상에 알려지게 됐다. 그러나 '식우집' 원본에 수록되었다는 이 내용이 현재 소장본에는 누락되어 있고 아직 확인 못해 학문적으로 인정받지 못하고 있다.
이석형 공의 생가 터에 훗날 의과대학과 병원이 세워져 의학을 가르치고 연구하고 또 진료하고 있는 것이 얼마나 기막힌 인연인가! '의원정심 규제'에 있는 공의 기본이념을 실행, 인연을 완성하는 것이 우리의 몫이 아닐까. 문헌고증인 의학역사학적 숙제를 포함해서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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