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종근의 역사문화 이야기 66> 전주 미원탑이 그립다
1970년대 술집의 대중화와 소주, 막걸리의 음주 확산이 색주가와 다른 공간에 해장국집이 들어서는 계기가 됐다. 동문거리 콩나물국밥집의 조성이 그 본보기다.
1970년대 전주시청과 전주시의회, 금융기관 등 국가공공기관이 미원탑 사거리에 집중되어 있었다.
밤늦게까지 술을 마신 공무원들이 아침 일찍 동문거리의 콩나물국밥집에서 ‘속풀이해장국’으로 콩나물국밥을 먹는 관행이 생겨났다. 그것도 근현대화 과정에서 태동한 신문화라 할 수 있다.
구 전주시청(미원탑사거리) 길 건너에 백도극장(후에 아카데미극장으로 변경) 뒷골목에 콩나물국밥집이 성업했다.
이곳은 전주시청 중심의 관공서 공무원들이 아침 일찍부터 자주 찾은 해장국집 거리였다. 희석식소주의 영향인지 속풀이해장국이 콩나물국밥 외에 시레기국밥과 선지국밥, 순대국밥 등으로 다양해져 갔다.
1970년대 동문거리 콩나물국밥집이 성업했던 전통은 동문사거리 근처 왱이콩나물국밥집을 중심으로 그 전통을 승계하고 있다.
팔달로는 전주를 상징하는 길이다. 기린로와 관통로가 없던 60년대부터 전주의 주 간선로로서 전주의 근대 역사를 함께 했다.
전주천에서부터 풍남문과 미원탑 사거리, 전주역전 오거리, 서중학교 앞 로터리, 터미널 사거리, 전북대학교 앞, 덕진역 광장, 팔복동 공단까지 팔달로는 전주 시내를 꿰뚫는 교통의 중추였다. 이곳의 미원탑은 전주사람이면 누구나 다 기억하는 전주의 명물이요, 랜드마크 같은 탑이었다.
하지만 전주시 구 시청앞 사거리에 있었다던 전주 미원탑은 언제 어떤 일로 없어지게 되었는지 이를 잘 아는 사람들은 드물다.
1960-1970년대는 친구나, 연인과의 만남의 장소로 미원탑 앞이 인기였다. 지금은 시내 곳곳이 만남의 장소로 손색이 없는 곳이 많지만 그 당시만 해도 시청앞 미원탑은 젊은 연인들의 만남의 장소로 인기 순위 1위였을 것이다.
지난 1967년 조미료인 미원을 광고하기 위해 당시 가장 번화가 팔달로 시청 네거리(현 기업은행 자리)에 세워진 미원탑 사진도 포함됐다.
미원탑은 밤에는 조명이 밝게 빛나 도시의 대표적인 랜드마크였다.
휴대전화가 없던 시절 만남의 장소로 활용된 미원탑은 1979년 철거와 함께 시민들의 옛 추억으로 남겨져 있다.
약속 장소로 '몇시에 미원탑 앞에서 만나.' 이 말 한마디면 만남이 어긋나는 일이 거의 없었다.
미원탑은 1967년 4월 23일부터 1979년 6월 26일까지 존재하면서 친구나, 연인과의 만남의 장소로 인기 절정을 달렸다.
지금은 흔하디 흔한 네온싸인 불빛이 시내 어디를 가도 휘황찬란하지만 그 당시만 해도 오색 찬란한 네온싸인은 미원탑이 전부였다.
시골 사람들은 미원탑 네온싸인을 보고 넋을 다 잃을 정도였다니, 지금 생각하면 참 우스운 일이다.
350만원을 들여 만든 미원탑은 1960년대 정읍출신 임대홍 미원그룹 회장이 舊 전주시청(현 중소기업은행)사거리에 교통 신호등과 조미료인 미원을 선전하는 광고 기능을 겸한 광고탑을 설치하였으며, 당시만 하더라도 교통 신호등 이 시설된 곳이 별로 없었고 또한 미원탑을 선전하기 위한 장식을 많이 하여 미관이 괜찮았다고 생각된다.
신흥고 앨범과 산업합리화운동추진대회 현수막 뒤로 미원탑이 보인다는 사실을 감안하면 1968년 3월 21일 이전에 세워졌다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었다.
이유야 어떻든 위치가 시청 바로 정문 앞이었기 때문에 전주시민은 물론 도내 타 시․군 도민들도 특별한 약속 장소가 없을 때에는 의례히 미원탑으로 약속 장소를 정하여 만났던 기억들이 있다.
특히 젊은 연인들 사이에 인기 만점이었다. 그리고 그 당시 조미료는 우리나라에 큰 두 업체가 치열한 경쟁을 하고 있었는데. 전북의 미원과 미풍이란 제품이 있었다.
그러한 미원탑을 철거하게 된 배경은 1980년(제61회 전국체전, 9.27-10.13) 가을에 전주에서 전국 체전이 열리게 되었고, 또한 탑의 높이가 고정된 상태에서 차량의 차체가 커짐으로 인하여 화물차량 등의 통과가 어려워 졌기 때문이었다.
그 당시 인접한 충경로가 개설되어 그곳에 교통신호등이 설치되어 차도 4차선인 팔달로와 우체국 방향의 2차선 도로에서의 교통 신호등은 필요하지 않다는 그 당시 유관기관의 판단이 있었다.
또한 설치 연한이 상당기간이 지난 무거운 철 구조물이었기 때문에 붕괴의 위험성이 많아 큰 피해를 미리 막아 통행인을 보호하는 측면 그리고 미원이라는 특정 업체의 광고물을 공공성을 띤 도로상에 설치한 것은 공익에 맞지 않다는 의견이 집약되어 철거하게 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1980년대 들어 교통에 방해된다며 철거되는 운명을 맞았지만, 향토기업 ‘미원’(현 대상그룹)에 쏟는 지역민들의 애정은 각별했다.
2011년 전주시가 기업우대 분위기 확산을 위해 주요 기업들을 대상으로 ‘미원탑식(式)’ ‘1사 1랜드마크’ 운동을 타진한 적이 있었다.
전주시는 기업을 상대로 참여의사를 타진해 '미원탑' 같은 광고탑을 비롯해 상징물, 벤치.소공원 등 기업이 원하는 형식으로 랜드마크 사업을 지원키로 했다.
기업 우대 분위기를 확산시키고, 범시민 차원의 기업사랑 운동 차원에서 이같은 구상을 한 것이다.
하지만 말뿐이다가 2018년 4월 16일 전주시가 전통문화유산과에서 미원탑 복원 업무 협의를 가졌다.
그 화려한 네온의 불빛이 꺼진지도 40 여년이 되어 간다. 그 당시만 해도 가장 번화했었던 골목이 이제 불꺼진 거리가 되어 한산하기 그지 없는 텅 빈 거리가 되었지만, 지금의 5, 60대들은, 차가운 늦은 겨울 밤, 금방이라도 얼어 붙을 것만 같은 오색 네온불 밑에서 연인을 기다리던 그 낭만을 잊지 못할 것이다. 그 당시 나도 네온불 밑에서 바람 맞은 일이 있었으니까.
오늘따라 추억의 미원탑 네온싸인이 그리워진다. 그 때 나를 바람 맞춘 그 여인이 그리워 진다. 풍남문가 있을 때면 찾아갔던 미원탑 거리에는 많은 사람으로 인산인해를 이뤘다. 나의 형과 나의 누나와 함께 했던 전주 미원탑 거리, 옛 추억이 더욱 그리운 것은 왜 일까./이종근
'전북스토리' 카테고리의 다른 글
<이종근의 역사문화 이야기 68> 위도는 '고섬섬' (1) | 2024.02.09 |
---|---|
<이종근의 역사문화 이야기 67> 군산 배경 유일 시서화첩 '군산이우도' (0) | 2024.02.08 |
전주 한옥마을 최부잣집이 지어진 연대는 1937년 (0) | 2024.02.06 |
전주전통문화연수원에 '전주동헌' 문패 단다 (1) | 2024.02.05 |
<이종근의 역사문화 이야기 65> '석진단지(石珍斷指)', 아버지를 살리기 위해 손가락을 자른 완주 고산선비 유석진 (2) | 2024.02.02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