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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북스토리

<이종근의 역사문화 이야기 68> 위도는 '고섬섬'

<이종근의 역사문화 이야기 68> 위도는 '고섬섬'

문화재청 국립무형유산원과 한국문화재재단은 푸른 용의 해인 '갑진년(甲辰年)' 을 맞아 이 달 12일 위도띠뱃놀이  공개행사를 갖는다.
중요무형문화재 제82-3호인 띠뱃놀이는 170여년 전부터 위도주민들이 임금님 진상품인 칠산조기가 많이 잡히는 대리마을 앞 칠산바다에 산다는 용왕에게 만선과 행복을 적은 띠지와 오색기, 허수아비들과 어선 모양의 띠배를 제작, 바다에 띄우는 풍어제로 유명하다.

전북특별자치도 부안군 위도(蝟島)는 변산반도 서쪽 끝 격포항에서 여객선으로 50분 거리에 있다. '심청전'에 나오는 인당수의 무대이며, '홍길동전'의 율도국이 위도를 모델로 했다는 말이 전해진다. 전북특별자치도에서 가장 큰 섬으로 북동에서 남서 방향으로 길게 뻗어 있고, 6개의 유인도와 24개의 무인도로 이루어져 있다. 여의도의 다섯 배 크기다.

900여 년 전 송나라 서긍이 개성으로 가는 뱃길에 위도에 잠시 머물렀다. 서긍은 책 '고려도경'에서 고려의 제도와 풍습을 소개했다. 그때 위도를 고섬섬(苦苫苫)이라 했는데, 고슴도치 털을 고섬섬이라 했다. 섬에 바람이 많아 나무가 크게 자라지 않아 봉우리에 자그마한 소나무가 고슴도치 털처럼 솟아 있어서 고슴도치섬이라 했다고 했다. 그 뒤엔 섬의 모양이 고슴도치 형상이라 고슴도치 위(蝟)를 써서 위도라 한다. 지도를 살펴보면 삐죽삐죽 나와 있는 돌출부가 많기는 하다. 

서긍은 군산도에 이르기 전에 1123년 6월 5일 위도에 도착하여 하루 머물고 갔다. '선화봉사고려도경'에는 다음과 같은 내용이 기록되어 있다. 

“5일 병술. 날씨가 청명했는데 고섬섬(苦苫苫)을 지나갔다. 죽도에서 멀지 않고 그 산이 유사한데 역시 주민이 있었다. 고려의 습속으로는 자위모(刺蝟毛)를 ‘고섬섬’이라고 한다. 이 산의 나무들은 무성하나 크지 않아 바로 고슴도치 털 같기 때문에 그렇게 이름 지은 것이다. 이날 이 섬에 정박하니 고려인들이 배로 물을 싣고 와 바치니 쌀로 사례하였다. 동풍이 크게 일어 전진할 수 없어서 결국 여기서 묵었다.” 

서긍은 ‘고섬섬’이라는 말에 대해 ‘자위모’, 즉 ‘고슴도치의 털’이라고 풀이하였는데, 아마도 ‘고섬(苦苫)’은 고슴도치를 가리키고 맨 뒤의 섬(苫)은 우리말 ‘섬[島]’을 의미하는 것으로 보인다. 즉 ‘고슴[도치]섬’으로 불리는 섬을 한자로 ‘위도(蝟島)’라고 표기했다.

‘죽도와 보살섬에서 멀지 않은 곳에 고섬섬(고슴도치털섬)이 있다. 이 산의 나무들은 무성하나 크지 않아 고슴도치 털 같기에 그렇게 명명한 것이다.’

여기서 죽도는 지금의 안마도, 보살섬은 송이도, 고섬섬은 위도를 말한다. 실제로 등산로 주변에는 세찬 바닷바람으로 인해 큰 나무보다는 관목 수준의 소사나무가 많이 자란다.

위도는 50여 년 전까지 흑산도, 연평도와 함께 3대 어장으로 이름을 날리던 곳이다. 조기 산란기인 4~5월이면 섬과 섬을 배로 건너다닐 정도로 많은 배들이 몰려들었다고 한다. 위도는 지형이 들쑥날쑥해서 배를 정박하기에 좋은 천혜의 조건을 가지고 있다.

위도에는 12곳의 항구가 있는데 항구 이름에 ‘금’자가 들어간다. 파장금, 정금, 딴정금, 용담금, 도장금, 벌금, 깊은금, 미영금, 논금, 석금, 살막금, 대장금. 여기서 ‘금’은 우리말로 내만 깊숙이 들어온 곳에 바닷물이 차 있고 배를 안전하게 피할 수 있는 항구를 말한다.

위도는 변산 격포항에서 수평선 너머로 보일 정도로 가깝다. 작년에 격포항까지 갔다가 바람이 불어 위도로 건너가지 못하고 돌아온 적이 있다. 1993년 서해페리호 침몰 사고로 292명이 희생된 후 바람이 불어 파고가 조금만 높아도 출항 결정에 신중하다. 대형 사고는 그 전에도 있었다. 일제강점기인 1931년 한 해에 세 번이나 대형 해난사고가 있었고, 1958년 곰소-위도 여객선 사고로 58명이 실종된 일도 있었다. 그러니 조심스러울 수밖에 없다.  

 

전하는 얘기로는 격포 수성당 당할미인 개양할미와 위도 원당할미 심성을 건드려 심술을 부렸다는 얘기가 있다. 과거부터 위도는 풍랑이 거세어 용왕님께 사람을 바쳐 무사고와 풍어를 빌었다. 인당수에 빠진 심청이도 위도의 수장 풍습을 따랐다는 얘기다. 그러다가 사람 모양으로 돌을 깎아 수장시켰더니 용왕님이 노하여 한꺼번에 생명을 앗아갔다는 믿거나 말거나 한 얘기를 한다. 여하튼 위도에서는 정월 초사흘 한 해의 액을 담은 띠배를 띄워 보내는 띠배 놀이가 있어 중요 무형문화재로 남아 있다. 

 

위도는 고려 때는 수군의 요지였고, 유배지였다. 고려의 대문호 이규보도 잠깐 위도에서 귀양살이를 하였다. 거문고, 술, 시를 좋아하여 삼혹호(三酷好)선생이라 했는데 그는 백운거사(白雲居士)란 별호를 더 좋아했다. 이규보는 정 5품 때 팔관회 잔치에서 예법에 문제가 발생하여 책임을 지고 유배길에 올랐다. 그때 순풍을 기다리느라 부안에서 한 달 반 정도 머물렀는데 문명(文名)이 높은지라 대접받고 있었다. 배 떠나는 날 부안 유지들 술대접을 받고 술이 워낙 취해 배에 오른 줄도 모를 정도였다. 20여 일 만에 유배지가 바뀌어 나왔으니, 부안에서 배를 기다린 날이 유배로 있던 날보다 더 길었다. 이규보는 짧은 유배가 끝나고 승승장구하여 정승 자리에 올랐다. 이규보는 위도 도제봉 아래에 잠시 살았다는 얘기가 있고, 진리에 있는 관아 부근에서 있었다는 얘기도 있다. 위도에서 이규보의 자취는 찾기 어려울 것 같다. 

 

조선시대에 위도는 허균이 지은 소설 홍길동전에 나온다. 허균은 함열(익산에 있던 옛 지명)에 유배 와서 홍길동전을 지으면서 이상향으로 삼았던 율도국(栗島國)의 실제 모델이었던 섬이 위도이다. 소설 홍길동전은 초등학교 때 영화로도 나와서 단체로 갔던 기억이 있다. 서자로 태어난 홍길동은 가족에게 버림받고 활빈당 우두머리가 되어 탐관오리 재산을 빼앗아 사람들에게 나누어준다. 율도국에서 펼칠 이상 사회는 신분의 차별이 없고 탐관오리의 횡포가 없는 사회였다. 

 

 

한동안 위도 앞바다는 서해의 황금어장으로 파시가 열려 장관을 이루었다. 국내 3대 어시장 중 하나인 칠산어장의 중심지로 영광굴비 산지가 이곳이다. 칠산어장은 주위에 일곱 섬으로 둘러싼 바다를 말한다. 조기는 3월에 흑산도, 4월에 위도 부근 칠산어장, 5월이 되면 그 위로 연평도 주변까지 올라간다. 3월에서 6월까지 위도 파장금항에서는 파시가 열려 바로 앞 식도(食島)까지 배가 찼다. 그러나 지금은 파시가 사라지고 없다. 고기도 덜 잡힐 뿐 아니라, 어선이 커지고 냉동시설이 발달하여 직접 날라야 이윤이 더 생기니 파시가 열리지 않는다. 파장금은 물결이 길면 어선이 모인다는 곳인데, 물결이 길다는 것은 풍랑이 몰아친다는 얘기다. 1970년대부터 파시도 옛 얘기가 되었다. 서해페리호 침몰 후 위도로 모이던 낚시꾼도 줄어들었다.  

‘악대기’는 맑은 생선탕의 일종으로 위도에서 많이 나는 생선으로 끓여낸 국물음식이다. 흔히 고춧가루를 넣지 않고 맑게 끓여내는 ‘지리’로 생각하면 된다. 생선을 조리할 때 매운탕과 대조되게 매운 양념을 넣지 않고 맑게 끓이는 조리 방식으로, 위도에서 많이 잡히는 장대, 붕장어, 복어 등 주로 흰 살 생선을 쓴다. 고춧가루가 들어가는 매운탕과는 달리 재료의 원래 맛이 고스란히 드러나기 때문에 재료의 신선도가 중요하며, 그래야 비린내도 덜 하다. 식성에 따라 고춧가루를 살짝 풀기도 한다.
악대기의 주재료는 ‘박대’이다. 군산, 서천, 부안, 곰소, 줄포, 위도 등 서해안에서 주로 잡히는 박대는 참서대과 생선으로 개서대와 용서대, 참서대 등 다양한 어종이 있다. 서대와 비슷하며 말린 것은 구별이 쉽지 않다. 박대는 풀치, 가오리와 함께 서해안 인근 지역민들이 즐겨먹던 건어물이다. 그래서 박대는 바닷가 주민들에게는 매우 친숙한 생선이다. 칠산어장의 중심에 놓여 있는 위도 인근해역에서는 조기를 비롯해 홍어, 병어, 문어, 전어, 가오리, 갯장어, 삼치, 박대, 서대, 장대, 새우, 갑오징어, 갈치 등 각종 생선이 잡히고 대구와 청어도 잡혔다. 겨울철에는 이렇게 잡아온 생선 가운데 박대와 장대, 복어 등으로 악대기를 만들어 먹었다. 위도 띠뱃놀이에서 불리는 굿 노래의 한 대목을 보면, 굿 노래에서 조기와 박대 이야기가 등장한 것을 볼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