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파 명인 송경운과 전주
무주 ‘구천동’ 이 그리울 정도로 더운 날이 계속되고 있다. 무주구천동 33경은 어느 곳 하나 아름답지 않은 곳이 없다. 제19경은 비파담(琵琶潭)이다. 아득한 옛날 선녀들이 구름을 타고 내려와 목욕을 하고 넓은 바위에 앉아 비파를 뜯으며 놀아 ‘비파담’이란 이름이 붙었다고 한다.
‘사람들이 나를 찾는 것은 연주를 등기 위해서이니 내 어찌 마음을 다하지 않겠는가’
악사(樂師) 宋慶雲(송경운)은 17세기 후반을 대표하는 음악가이며 비파 고수로 이름난 사람이다. 한문으로 쓰인 단편 ‘송경운전’의 지은이는 서귀 이기발(1602~1662)이다.
서울사람인 송경운은 9살에 비파를 배우기 시작, 열두 살에 이름을 날렸다. 그는 병자호란이 일어나자 청나라와 화약이 이루어졌다는 소식을 듣고 1627년 전주로 돌아와 평생을 은거한 인물이다.
‘송경운전’은 이기발의 후손들이 유고를 모아 책으로 꾸민 ‘서귀유고’(西歸遺藁) 권7에 실렸다. ‘예술인들의 지극한 경지를 칭찬할 때 ‘어째 송경운의 비파 같네’라고 했고, 초동이나 목동의 무리가 모여 놀 때도 누가 재미있는 말을 하면 ‘어째 송경운의 비파 같네’라고 했으며, 말을 배우는 두어 살짜리 아이가 자기와 관계없는 것을 가리키며 물어도 ‘어째 송경운의 비파 같네’라고 했다.
송경운은 전주성 서쪽에 살았는데, 그의 집은 언제나 북적였다. 손님이 오면 송경운은 성심성의껏 연주하여 만족할 때까지 그치지 않았다.
신분이 높은 사람뿐 아니라 하인들에게도 똑같이 성심껏 연주했다. 20년 동안 한결같았으니 전주 사람들은 감복해 칭송을 아끼지 않았다는 것이다.
‘비파는 옛가락과 요즘 가락이 다른데, 지금은 대개 요즘 가락을 숭상한다. 하지만 나는 홀로 옛가락에 뜻을 두어 왔다. 무릇 소리를 낼 때 옛가락에 의거하면 요즘 가락이 끼어들지 못하고, 내 마음도 흡족해 가히 음악답다고 여겨진다.(중략)그런데 나의 연주를 듣는 이들은 평범한 사람들인지라 이런 음악에 즐거워하지 않더라. 음악을 듣고도 즐거워하지 않는다면 무슨 유익함이 있겠는가 싶다. 이 때문에 특별히 곡조를 변화시켜 요즘 가락을 간간이 섞어서 사람들이 기뻐할 수 있도록 만들었다’
‘송경운전’이 돋보이는 것은 드물게 주인공의 음악관(音樂觀)을 다루고 있기 때문이다. 자칫 흔적도 없이 사라질 뻔한 비파 명인의 존재를 후세에 알려준 것만으로도 ‘송경운전’의 가치는 작지 않다.
‘송경운전’은 음악가의 전기이지만, 동시에 한 시대의 음악론이라고 해도 좋을 것이다. 그는 일흔셋에 숨을 거두었다. 제자들은 그의 유언에 따라 새벽에 서천(西川)을 건넜으며 상여는 남쪽을 향했다.
제자들이 연주하는 비파 소리가 상엿 소리와 어울렸다. 구경나온 사람들이 “세상에서 어찌 저와 같은 사람을 볼 수 있을까” 하며 눈물을 흘렀다.
요즘처럼 더운 날, 무주 비파담이 그리운 때면 송경운을 생각한다. 전주 한옥마을을 찾는 사람들이여 그를 생각하며 서천(西川)에 한 번만이라도 눈길주기를 부탁한다./이종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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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기발의 송경운전
한문으로 쓰인 단편 ‘송경운전’의 지은이는 서귀 이기발(1602~1662)이다. 그는 문과에 급제해 벼슬을 살다 병자호란이 일어나자 의병을 모아 남한산성으로 진격했으나, 청나라와 화약이 이루어졌다는 소식을 듣고 고향 전주로 돌아가 평생을 은거한 인물이다. ‘송경운전’은 이기발의 후손들이 유고를 모아 책으로 꾸민 ‘서귀집’(西歸集)에 실렸다. 서귀는 송경운이 당대 얼마나 명성을 떨친 인물이었는지를 다음과 같이 묘사한다.
‘예술인들의 지극한 경지를 칭찬할 때 ‘어째 송경운의 비파 같네’라고 했고, 초동이나 목동의 무리가 모여 놀 때도 누가 재미있는 말을 하면 ‘어째 송경운의 비파 같네’라고 했으며, 말을 배우는 두어 살짜리 아이가 자기와 관계없는 것을 가리키며 물어도 ‘어째 송경운의 비파 같네’라고 했다. 송경운이라는 이름이 알려진 게 대개 이러했다.’
한마디로 ‘송경운’이란 희한하거나 지극한 것의 대명사였고, 그 이름을 모르는 사람이 없었다는 뜻이다. 그런데 서귀가 서울에서 크게 명성을 떨치던 인물의 전기를 쓴 것은 송경운 또한 정묘호란 이후 전주에 자리를 잡았기 때문이다. 학계는 송경운이 피란지에 눌러앉은 것을 두고, 장악원에 예속된 신분이었음에도 복귀를 거부한 것으로 보기도 한다. 서울에서 부와 인기를 누리는 노비로 살기보다 시골에서 자유로운 삶을 원했다는 것이다.
송경운은 전주 완산성 서쪽에 살았는데, 그의 집은 언제나 북적였다. 손님이 오면 송경운은 성심성의껏 연주하여 만족할 때까지 그치지 않았다. 신분이 높은 사람뿐 아니라 하인들에게도 똑같이 성심껏 연주했다. 20년동안 한결같았으니 전주사람들은 감복하여 칭송을 아끼지 않았다는 것이다. 서울에서의 명성이 그대로 전주로 이어졌음을 알 수 있다. ‘송경운전’이 돋보이는 것은 드물게 주인공의 음악관(音樂觀)을 다루고 있기 때문이다.
●옛가락 추구하던 그의 음악, 당대 유행 곡조도 연주
‘비파는 옛가락과 요즘 가락이 다른데, 지금은 대개 요즘 가락을 숭상한다. 하지만 나는 홀로 옛가락에 뜻을 두어 왔다. 무릇 소리를 낼 때 옛가락에 의거하면 요즘 가락이 끼어들지 못하고, 내 마음도 흡족하여 가히 음악답다고 여겨진다. …그런데 나의 연주를 듣는 이들은 평범한 사람들인지라 이런 음악에 즐거워하지 않더라. 음악을 듣고도 즐거워하지 않는다면…무슨 유익함이 있겠는가 싶다. 이 때문에 특별히 곡조를 변화시켜 요즘 가락을 간간이 섞어서 사람들이 기뻐할 수 있도록 만들었다.’
송경운의 음악적 이상은 옛가락에 바탕한 느리고 고상한 음악이었지만, 별다른 음악적 교양이 없는 전주의 보통사람들은 이해하기 어려웠을 것이다. 하지만 송경운은 자신의 음악관만 고집하지 않았다. 많은 사람이 즐거워하는, 아마도 당대 유행하던 빠른 템포의 새로운 음악도 레퍼토리에 포함시켰음을 짐작게 한다.
자칫 흔적도 없이 사라질 뻔한 비파 명인의 존재를 후세에 알려준 것만으로도 ‘송경운전’의 가치는 작지 않다. 나아가 조선시대 음악가들도 오늘날의 음악가들 만큼이나 순수성과 대중성 사이에서 고심했음을 알게 한다. ‘송경운전’은 음악가의 전기이지만, 동시에 한 시대의 음악론이라고 해도 좋을 것이다. 송경운도 송경운이지만 서귀가 일구어낸 예술적 성과 역시 높이 평가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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