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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북스토리

창암 이삼만의 필적(筆跡) 사상 최초로 문화재 지정, 한국학호남진흥원 기탁 1호 고문서 장성 행주기씨 기효간 종가 고문서 '창암서첩(蒼巖書帖) 등 1,074점이 전남도 유형문화재 제 393호 지정



창암(蒼巖) 이삼만(李三晩, 1770-1847)의 필적(筆跡)이 사상 최초로 문화재가 됐다. 그것도 전북이 아닌, 전남에서 지정돼 더욱 더 눈길을 끈다. 무엇보다도 창암 이삼만이 살았던 집(瓦土广, 와토엄) 이름 관련 기록이 나온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내용 가운데 흥미로운 대목이 보인다.

‘병오중춘완산이삼만서우공동산와토엄(丙午仲春完山李三晩書于孔洞山瓦土广)’

이는 ‘1846년 봄날 이삼만이 (완주)공기골 산 밑 기와굽는 최고 윗집(와토엄)에서 쓰다는 의미다.
이삼만선생이 살았던 집(와토엄, 瓦土广)이름 관련 기록이 나온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는 김진돈 전라금석문연구회장의 설명이다.
그는 “창암 이삼만선생이 1847년 2월에 돌아가셨다. 이번에 공개된 이 작품은 1946년 작품으로 글씨로선 최고인 것 같다. 노사(蘆沙) 기정진(奇正鎭,1798~1879)과 창암이 교류를 했다는 기록이 ‘노사집(蘆沙集)’에 몇 번 나온다. 거기에는 ‘옥류거사(玉 居士는 전주 옥류마을 인근의 거사라는 이미)’로 소개된다. 그렇다면 창암이 노사에게 써준 것은 아닌 지 합리적인 의심을 해보게 된다”고 했다.
또, “그는 아주 어렵게 살아 기와 흙을 굽는 최고 높은 지대에서 살았을 것이란 추론이 가능하다”면서 “물론 기와를 만드는 흙은 부드러웠을 것이며, 집 이름이 ‘와토엄(瓦土广)’으로 나와 창암의 삶이 진솔하게 나오는 명칭이어서 더욱 더 빛을 발한다”고 덧붙였다.
이삼만 친필첩 '창암서첩(蒼巖書帖, 필사본 | 25.1×15.5)'이 최근들어 전남 유형문화재가 됐다.
이는 서예 작품을 모은 서첩으로, 해당 자료에는 해서와 초서가 있고, 큰글씨와 중간글씨가 배접되어 있다. '창암'과 '이삼만' 낙관이 새겨져 있는 만큼 특유의 이론서같다.
한국학호남진흥원은 이삼만의 '창암서첩' 등 기탁받은 장성 행주기씨 기효간 종가 고문서(기탁 1호 고문서) 1,074점이 전남도 유형문화재 제393호로 지정됐다고 했다.
장성 행주기씨 기효간 종가는 기묘사화 직후 기원(奇遠, 1481-1522)이 장성군 황룡면 아곡리 아치실에 터를 잡은 이후 현재까지 이곳에 세거해오고 있는 호남 대표 명문가다.
기효간을 비롯, 기정익, 기정진, 기삼연 등 호남을 대표하는 학자, 관료, 의병, 독립운동가를 배출한 집안이다.
보존된 자료는 2018년 한국학호남진흥원이 개원하면서 종가에서 1호로 기탁해 현재까지 보존 관리되고 있다.
이번에 지정된 1,000여점은 3,000여점 중에서도 자료적 가치를 인정받은 고문서들로, 세종 연간에 발급된 15세기 임명문서 사례, 관직 활동 과정에서 생산된 조보(朝報) 사례 등과 강세황(姜世晃, 1713-1791), 이삼만의 친필첩이 주목된다.
한편 이삼만은 전북출신으로 추사 김정희 눌인 조광진과 함께 조선 후기 3대 명필로 꼽힌다. 서울 뿐 아니라 지방에서 원교 이광사를 비롯한 명필들의 글씨를 스승 삼아 평생을 서예만 전념하여 심오한 경지에 오른 명필이다.
자신만의 필법인 구름 가듯 물 흐르듯 막힘이 없고 자연스러운 행운유수체로 이름을 떨쳤으며, 중국의 서법을 배제하고 동국진체를 완성해 냈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그는 "벼루 세 개를 구멍내지 아니하고는 글씨는 이뤄질 수 없다"고 말해왔으며, 병석에 누워서도 하루에 1,000자를 썼다. 그는 전주에서 생산되는 닥이 주원료인 전주한지를 사용, 지금까지도 보존상태가 좋은 편이다. 그 당시 후학들이 교재로 사용할 수 있도록 유독 서첩을 많이 남겼다.
안동교 자료교육부장은 “이번에 문화재로 지정된 고문서는 자료적 가치를 인정받은 것으로 상태가 양호하다”면서 “6·25 전쟁으로 종가가 전소돼 많은 문헌이 소실됐으나 종손의 노력으로 보존된 자료 3,000여 점을 지난 2018년 호남진흥원 개원 당시 종가에서 1호로 기탁해 오늘까지 보존 관리돼 왔다”고 덧붙였다.
조광현 자료교육부 연구위원도 "전주 출신의 창암 이삼만은 이른바 ‘유수체(流水體)’로 필명을 떨친 작가로, 17세기의 옥동 이서, 공재 윤두서, 18세기의 백하 윤순, 원교 이광사를 이어 19세기 동국진체(東國眞體)를 심화 확장시킨 조선시대 대표 서예가의 한 사람이다"고 했다.
한국학호남진흥원은 현재 지정문화재 20건 2,015점을 비롯, 7만여점 이상의 자료를 보유 및 관리하는 등 멸실·훼손 위기에 처한 민간기록유산 보존 및 연구, 기탁 자료 목록화 등을 추진중이다. 이밖에 학술대회 개최, 자료집 간행, DB구축 등 심층 연구와 활용을 통해 문화재 지정에 노력해오고 있다./이종근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