갑진년(甲辰年) 용의 해가 밝았다. 갑진의 갑(甲)은 푸른색, 진(辰)은 용을 의미해 '푸른 용의 해'로 불린다. 전설 속의 동물인 용은 힘차고 진취적인 성향이 강하다고 전해진다. 하늘의 사신(四神) 중 하나로 동방의 수호신으로 삼고 있으며, 동쪽을 상징하는 동물이기 때문에 새로운 시작과 성장, 도전과 변화를 의미하기도 한다. 우리는 용꿈을 최고의 꿈으로 여긴다. 용꿈을 신분 상승, 즉 출세나 직장에 들어가는 징조로 믿기 때문이다. 태몽에도 용이 등장할 경우 태어나는 아기가 큰 인물이 될 것으로 생각한다. 그만큼 용은 우리 전북에게 중요한 민속 상징으로 자리잡아 왔다.
△김제 벽골제 쌍룡놀이
김제 벽골제 쌍룡놀이는 백룡과 청룡 두 용의 싸움과 이 과정에서 희생된 김제태수의 딸인 단야의 영혼을 위로하기 위한 행사가 지금의 민속놀이로 발전됐다.
벽골제의 제방공사와 용의 이야기가 후대에 와서 인간들의 애정갈등과 함께 얽히면서 놀이화가 됐다. 신라 원성왕 때의 일이다. 벽골제를 쌓은 지가 오래 되어 붕괴 직전에 놓이게 되자, 나라에서는 ‘원덕랑(元德郞)’을 보내어 보수공사를 하도록 했다. 이에 덕랑과 김제태수 ‘유품(由品)’은 백성들에게 부역을 시키며 밤낮없이 공사를 진행시키고 있었는데, 갑자기 천둥과 번개가 일면서 비바람이 세차게 몰아쳤다. 겁에 질린 백성들은 “이러한 공사를 하려면 예로부터 처녀를 용추에 넣어 주고 청룡을 달래야 하는데, 원덕랑이 우리말을 듣지 않아서 이렇게 되었다.”고 원망했다. 벽골제 아래 원평천 용추에는 착한 백룡이 살고 있었고, 연포천 용추에는 심술 사나운 청룡이 살고 있었다. 화가 난 청룡이 사람들을 해치고 벽골제를 무너뜨리려 하자 백룡이 나타나 청룡을 가로 막았고, 두 용 간에 피나는 싸움이 벌어졌다. 백룡이 패하여 어디론가 물러나 버리자 청룡의 기세는 한층 더 높아졌다. 마침내 유품과 백성들은 원덕랑의 약혼녀 ‘월내’를 몰래 용추에 넣기로 했다. 그런데 원덕랑을 짝사랑하던 유품의 딸 ‘단야’는 이 사실을 알고 고민 끝에 자신이 대신 희생하기로 결심한다. 월내 방에 대신 누워 있던 단야는 보쌈을 당하여 결국 청룡에게 먹히고, 그와 동시에 비가 그치며 청룡이 사라졌다고 한다. 그 후 보수공사는 완전하게 준공을 보게 되었다. 이후 김제 고을 백성들은 단야의 넋을 위로하기 위해 소복을 한 아낙네들이 연포천 용추에 수없이 모여 들어 진혼제를 올렸다고 한다.
△운서정의 용
“싫어, 형이나 먹어. 우리는 집안에 감나무가 많아서 겨울 내내 먹어” 그래도 금아는 억지로 동생에게 하나씩 손에 쥐어주고 운서루 경내를 둘러보았다(156ㅡ157페이지)"
김태진의 장편소설 ‘모악산(푸른향기)’은 모악산을 상징적인 배경으로 해 이의 기운을 받은 전주 사대부들이 조선왕조가 붕괴되는 시점에서, 긴 어둠의 터널을 걷듯 슬프고 아픈 그들의 삶을 그려낸 작품이다.
주인공인 소년 금아를 중심으로 해방 직후와 6.25전쟁을 거치면서 인공치하에서 지주가 매를 맞는 등 전주 사대부 후예들의 암담하고 절망스런 모습을 자세하게 표현하고 있다.
운서정(雲棲亭, 관촌면 덕천리 산52번지)엔 닭, 오리, 토끼, 원숭이, 도깨비, 도룡용, 용들이 지키고 있다. 충혈된 눈망울이 퉁그레한 용은 힘찬 물고기를 한 입 물고 같이 용두레를 친다. 운서정(雲棲亭), 그러니까 한자 그대로 ‘구름이 사는 집’이다. 그래서 가히 나그네의 집이라 할 수 있다. 그래서 토끼와 용 등 각종 동물들이 자리하고 있는가. 용조각이 많은 것이 특징으로 정자의 전면에는 기둥 위에 두 마리의 용의 형상을 볼 수 있다. 황룡은 물고기를 물고 있고, 추녀 쪽으로 머리를 내밀고 있는 청룡은 입에 여의주를 물고 있다. 대들보에 마주보며 몸통을 걸치고 있는 용의 조각은 굽은 나무를 이용, 생동감을 더하게 조각한 것이라고 한다. 운서정은 당대의 부호인 승지 김양근의 아들인 김승희가 부친의 덕을 추모하기 위해 6년 간에 걸쳐 세운 건물로, 1928년 당시 쌀 3백석을 들여 세웠다고 한다. 관촌면 오원천가의 사선대 위에 위치한 운서정은 사선대의 울창한 수목에 둘러싸여 운치를 더하고 있으며, 일제시대 우국지사들이 모여 한을 달래던 곳으로도 유명하여 관광지 사선대의 빼놓을 수 없는 명소다.
△선운사 대웅전의 용과 무장객사의 운룡
고창 선운사는 신라 진흥왕이 창건했다는 설과 백제 577년(위덕왕 24)에 고승 검단선사(黔丹禪師)가 창건했다는 두 가지 설이 전하고 있다. 첫 번째 설은 신라의 진흥왕[재위 기간 540~576]이 만년에 왕위를 내주고 도솔산의 어느 굴에서 하룻밤을 묵게 되었는데, 이때 미륵 삼존불이 바위를 가르고 나오는 꿈을 꾸고 크게 감응하여 중애사(重愛寺)를 창건함으로써 이 절의 시초를 열었다는 것이다. 그러나 당시 이곳은 신라와 세력 다툼이 치열했던 백제의 영토였기 때문에 신라의 왕이 이곳에 사찰을 창건했을 가능성은 희박하다. 따라서 시대적·지리적 상황으로 볼 때 검단선사의 창건설이 정설인 것으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검단의 창건과 관련해서도 여러 가지 설화가 전해오고 있다. 본래 선운사의 자리는 용이 살던 큰 못이었는데 검단이 이 용을 몰아내고 돌을 던져 연못을 메워나가던 무렵, 마을에 눈병이 심하게 돌았다. 그런데 못에 숯을 한 가마씩 갖다 부으면 눈병이 씻은 듯이 낫곤 하여, 이를 신이하게 여긴 마을사람들이 너도나도 숯과 돌을 가져옴으로써 큰 못은 금방 메워지게 되었고 이 자리에 절을 세워 바로 선운사의 창건되었다. 검단은 “오묘한 지혜의 경계인 구름[雲]에 머무르면서 갈고 닦아 선정[禪]의 경지를 얻는다” 하여 절 이름을 ‘선운(禪雲)’이라 지었다고 전한다.선운사 대웅전은 전체적으로 기둥 옆면 사이의 간격이 넓고 건물의 앞뒤 너비는 좁아, 안정된 외형이다. 천장에는 사실감이 돋보이는 커다란 운룡문(雲龍紋)이 그려져 있고, 안쪽 천장은 우물 정(井)자 모양을 한 우물천장이다. 우물천장에는 구름·학·연꽃 등이 그려져 있다. 내부 벽에는 산수·비천·나한 등을 벽화로 장식하였고, 닫집과 중앙의 불단 등은 비교적 간략하고 단순하게 처리했다.
무장객사의 규모는 먼저 정전은 정면 3칸, 측면 3칸, 홑처마 맞배지붕이며, ‘송사지관’이란 현판이 걸려 있다. 좌우 익헌은 4칸이며 팔작지붕이다. 건물은 높이 80㎝의 축대 위에 세워져 있으며, 가운데에 계단을 두었다. 돌계단 마무리 옆에는 태극무늬, 측면에는 동물과 나무 구름무늬 등이 양각되어 있다. 호랑이와 구름 조각은 운치가 있다. 용이 구름을 탄 모습도 보인다.
계단 양 옆의 축대 돌에도 섬세하게 표현된 연꽃과 꽃병에 꽃이 담긴 모습이 조각되어 있다.
남원 용마놀이
남원 용마놀이는 군주의 상징인 용을 가지고 놀이를 하는 전국 유일의 집단쟁투 놀이다. 남원에서 섣달 그믐이나 정월 초에 악귀를 쫓아 재앙을 막고 풍·흉년을 점치기 위해 행하던 격렬한 집단쟁투놀이다. 남원은 용과 관련된 많은 지명과 놀이가 있었다. 그 중 하나가 용마놀이다. 용마놀이는 예로부터 남원지방에 전래된 고유한 민속놀이로 용마희(龍馬戱)라 한다. 이 놀이는 1950년대에 들어 '용성지(龍城誌)'의 기록을 바탕으로 초등학교 운동회에 등장하였다가 1985년 남원문화원에서 복원하여 춘향제 행사 종목으로 선보이고 있다. 이 놀이가 언제부터 시작되었는지는 정확한 기록이 없으나, 영조 28년(1752) 발간된 남원의 향토지인 '용성지' 풍속조에 다음과 같은 기록이 있다.
“고을 풍속에 예로부터 악귀를 제거하고 재앙을 막는 외에 또한 그해의 풍년과 흉년을 점치기 위하여 용마놀이를 하였다. 고을 이름이 용성인데서 용마놀이라 하였다. (邑俗 自古爲壓勝穰災 且爲占歲豊歉 設龍馬之戱 盖以邑號龍城故也)... ...그 유래가 오랜 고로 관가에서도 금하지 아니하고 간혹 도와주기도 하더라(其來尙矣 官不之禁 又或有助之者)”
그 유래가 남원의 옛 이름인 ‘고룡군’ 또는 ‘용성’에서 붙여진 이름이라고 하니, 멀리 삼국시대부터 전해오는 놀이임을 알 수 있다. 사는 곳에 따라 주민을 남과 북으로 편을 가르고 각각 황룡과 청룡을 만들었다. 두 편은 각각 오색으로 칠한 용마를 수레에 싣고 거리로 나온다. 얼굴에 무서운 탈을 쓴 장정들이 따로 공격부대를 편성하여 함성을 지르며 상대편의 용마에 덤벼들어 싸움을 시작한다. 거리에서는 여러 가지 놀이로 대결하여 승부를 겨루게 된다. 양편이 격투가 벌어져 이 싸움에서 남쪽이 승리하면 풍년이 들고 북쪽이 이기면 흉년이 든다고 점쳤다. 또한 거리로 나와서 여러 가지 놀이를 함으로써 사회생활의 단조로움을 해소하고, 마을 사람들의 마음을 하나로 합치는 대동단결을 도모하는 향토 축제 성격을 띠어 생활의 윤택과 위안을 안겨주기 위한 목적이 포함된 민속놀이다.
△전북의 용기(龍旗)
농기(農旗)는 농악대들이 들고 다니는 큰 기로 용기(龍旗), 용둣기, 용당기, 대기, 덕석기, 두레기, 서낭기 등으로도 불린다. 동제를 지내거나 두레때 마을의 상징으로 농기를 세워 두며, 이웃 마을과 화합 또는 싸울 때에도 농기를 내세운다. 그리고 기능으로 보아 동제에서 신간(神竿)이나 신기(神旗)와 같은 기능을 지녔지만 지금은 민간 신앙으로서의 기능이 퇴색됐다. 농기는 흰색의 천에 먹 글씨로 ‘신농유업(神農遺業)’ 또는 ‘황제신농씨유업(皇帝神農氏遺業)’, ‘농자천하지대본(農者天下之大本)’ 등을 쓰거나 용을 기폭에 가득히 그리기도 한다. 동네가 크고 오래된 부촌에는 글자로 된 농기와 용을 그린 농기 두 개가 있을 수 있다. 기의 크기는 마을에 따라 다르다.
농업박물관이 소장하고 있는 농기는 문화재자료 제43호 ‘농기일괄(農旗 一括)’이다. 논산 주곡농기, 강진 용소농기, 서산 덕지천 농기, 김제 신풍농기가 바로 그것이다. 신풍농기는 김제시 신풍동에서 사용하던 두레기로, 마을에서 1995년에 농업박물관에 기증했다.
‘農者天下之大本也 三日一雨 夜雨畫晴 興雲霧吐 變化莫測 寄贈 郭安栒 戊午八月十二日生 所願成就 里長 徐貴煥 座上 金在福 公員 梁玟植 畵士 廣州居 蘭谷 丁酉年七月十五日製作’
즉 무오(戊午) 8월 12일생(1918년 추정)인 곽안순이 정유년 7월 15일(1957년 추정) 제작했고, 그림을 그린 화사(畵士)는 광주에 거주하는 난곡(蘭谷)임을 알 수 있다. 이 농기는 용그림이 전문가(畵員)의 솜씨로 매우 훌륭하게 그려져 있고, 기증자와 두레패의 중심 인물, 제작년도 등이 묵서(墨書)로 적혀 있다. 많은 농기들이 ‘농자천하지대본(農者天下之大本)’ 식의 동일한 형식과 내용인데 비해, 이 농기들은 용이 그려진 ‘용기(龍旗)’의 전통과 ‘신농유업(神農遺業)’ 등의 고제(古制)를 따르고 있고, 지네발을 사용하는 등 형식과 내용면에서도 매우 우수하다. 또, 두레가 일찍이 분화되면서 소멸의 길을 걷게 되자, 농기도 두레와 더불어 점차 사라져 유물이 매우 희소한 상황이다.
전북엔 진안군 마령면 강정리 용대기와 실명기, 백운면 평장리 용대기, 임실군 삼계면 두월리 농기, 필봉리의 용기와 영기, 익산시 금마면 도천마을의 농기, 금마면 용순마을 농기, 김제시 서정동 서중마을 농기 등이 전하고 있다.
진안군 마령면 원강정 마을에는 180여 년 전에 제작된 것으로 기록되어 있는 용대기와 실명기, 그리고 50년 전에 제작된 농기가 잘 보존되어 있다. 용대기 깃발에는 ‘창시 도광 십오년 삼월 일 갑자 칠월 일 수보 전북 진안 마령 강정리 용대기(創始 道光 十五年 三月 日 甲子 七月 日 修補 全北 鎭安 馬靈 江亭里 龍大旗)’라 기록되어 있어 1835년에 제작했음을 알 수 있다. 중앙에 용, 좌측 상단에 거북, 우측 상단에 잉어가 그려져 있다. 용대기는 농경에 필요한 물을 얻기 위한 기우제와 만두레 때 사용됐다. 용이나 거북, 잉어는 모두 물과 관련이 되거나, 알을 대량으로 방사하는 동물이다. 물은 농사에 없어서는 안될 가장 중요한 요소여서 물을 관장해 주기를 바라는 기원이 담긴 신성물이다. 또 이들 동물은 알을 많이 낳는 것으로도 알려져 있어서 풍요와 다산에 대한 염원까지 담겨 있다. 만두레 때는 마을 앞에 용대기를 내걸어 마을에 두레가 났음을 주위에 알렸으며 기우제를 지낼 때 내동산에 직접 용대기를 가지고가서 세운 뒤 제사를 지냈다고 한다. 실명기도 용대기와 같은 연대에 제작됐으며 두레 날에 영기와 함께 일하는 논에 가지고 가서 꽂아 놓으며, 농악놀이 할 때는 실명기로 기놀이를 펼친다. 농기는 1963년 마령면 체육대회에서 농악 부분 1등을 수상하여 받은 바 중앙에 ‘농사(農事)는 천하지대본(天下之大本)’이라고 쓰여 있다. 마을 앞에 용대기를 세운 깃대가 현재도 남아 있다. 강정리의 용대기는 규모나 채색 면에서도 뛰어난 농경 유물이지만 무엇보다 제작 연도가 명확히 기록되어 있다는 점이 더 큰 가치와 의의를 지닌다고 할 수 있다. 백운면 평장리 용대기의 크기는 가로 450㎝, 세로 317㎝로 가로가 긴 직사각형 형태이다. 기폭의 양쪽은 지네발을 달았으며, 앞뒷면에 그림이 그려져 있다. 일반적으로 타 지역의 농기는 한쪽 면에만 그림이 그려져 있지만 하평장 마을 용대기는 양쪽 면에 각각 다른 그림이 그려져 있는 것이 특징이다. 용의 얼굴 부분은 일부 훼손되었으나 얼굴 아래쪽으로 노란색 여의주가 선명하다. 용의 몸통은 청색 빛이 돌고, 발톱은 4개이다. 하지만 강정리 마을의 용대기와 실명기에 대한 보존 대책과 활용 방법에 대한 연구가 시급해 보인다. 백운면 평장리 하평장 마을에 보존되어 있는 용대기는 매우 낡아 원형 훼손이 심한 상태이다. 전북에 농기(農旗)를 신나게 휘날리기를 바란다.
△아홉 마리 용 조각된 금산사 금강계단의 석종
김제 금산사 금강계단(보물)의 석종은 오층석탑과 나란히 있는 종 모양의 석탑이다. 매우 넓은 2단의 기단 위에 사각형의 판석을 놓고 그 위에 탑을 세웠다. 석종형 탑은 인도의 불탑에서 유래한 것으로 통일신라 후기부터 나타나기 시작한다. 외형이 범종과 비슷해서 석종으로 불린다. 기단 각 면에는 불상과 수호신인 사천왕상(四天王像)이 새겨져 있다. 특히 아래 기단 네 면에는 인물상이 새겨진 돌기둥이 있어 돌난간이 있던 자리임을 추측하게 한다. 난간 네 귀퉁이마다 사천왕상이 세워져 있다. 탑신을 받치고 있는 넓적한 돌 네 귀에는 사자머리를 새기고 중앙에는 연꽃무늬를 둘렀다. 탑 꼭대기에는 머리를 밖으로 향한 아홉 마리의 용을 조각했고, 그 위에 연꽃무늬를 새긴 2매의 돌과 둥근 석재를 올려 장식했다. 기단에 조각을 둔 점과 돌난간을 두르고 사천왕상을 배치한 점 등으로 미루어 불사리를 모신 사리 계단으로 보고 있다. 이 탑은 가장 오래된 석종으로 조형이 단정하고 조각이 화려한 고려 전기의 작품으로 추정된다.
△김제에 벽골제 쌍룡(용오름) 조형물이 놓인 까닭
현재 벽골제에 있는 조형물 ‘용오름'은 2007년 서울용산삼각지에 있던 것을 옮긴 것이다.
문화관광부가 용산미군기지 공원화 선포식을 기념해 용산 삼각지에 제작, 설치한 조형물 ‘용오름’은 문화관광부가 ‘용오름’을 맡아 전시하고자 하는 지방자치단체 및 민간기업, 단체 등을 대상으로 공모를 실시, 김제시 벽골제로 이전한 것에 다름 아니다.‘용오름’은 작가 최평곤씨에게 의뢰하여 제작, 설치한 조형물로 철근 구조 위에 방부 처리된 대나무로 제작, 조형적으로 아름다울 뿐만 아니라 수명도 반영구적이다. 용이 힘차게 도약하는 모습을 예술적으로 형상화한 ‘용오름’의 크기는 길이 24M(총 길이 54M), 높이 15M, 지름 2M이다./이종근기자
'전북스토리' 카테고리의 다른 글
비파 명인 송경운과 전주 (3) | 2024.01.04 |
---|---|
전북과 뱀 (2) | 2024.01.02 |
[전북의 용 지명을 알고 보니] 229곳으로 전국에서 두 번째로 많아 (2) | 2024.01.01 |
하멜과 남원 (1) | 2023.12.28 |
부안 내소사 동종, 국보됐다 (0) | 2023.12.27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