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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북스토리

전북과 뱀

전북 뱀 지명, 27

 

국토지리정보원이 조사한 결과, 전국 208개의 뱀과 관련된 지명 중 시.도별로 전남이 41개로 가장 많고 이어 경북 31, 충남 31, 경남 29, 전북 27, 경기 14, 충북 11, 강원 10개 등의 순이다.

글자별로 보면 사동’(蛇洞)이라는 지명이 경북 경산시 동부동의 마을을 포함해 전국적으로 15개로 가장 많다.

이어 뱀골10개며 이 밖에 뱀을 배암’, ‘비암’, ‘배염등으로 불림에 따라 다양한 형태의 지명으로 전해지고 있다.

도내 뱀 지명은 전주 3, 군산 3, 익산 3, 김제 2, 남원 3, 정읍 2, 임실 2, 장수 2, 고창 3, 부안 2곳 등 10개 시군에 걸쳐 27개의 지명으로 사용되고 있다. 글자별로는 사동과 구사 등의 마을이름이 가장 많았으며 27개 중 19개가 마을 지명으로 사용되고 있다.

 

전북 도내의 경우, 마을이 19, 3, 고개 3, 굴짜기 1, 기타 1개 등이 있다고 국토지리정보원이 전했다.

 

완주군 봉동면 구암리에는 배미산이 있으며, 김제 금산면 금성리에는 배암날’(등성이) 등의 뱀 지명이 있다.

뱀 지형 몇곳을 소개하면, 전주시 우아동 사동마을은 뱀의 머리모양의 지형에 묘가 있어 비암골이라고도 불리며, 군산 옥구읍 수산리 바암뫼 마을의 경우 마을 앞에 있는 산이 뱀의 형의 모양을 형성하고 있어 뱀 지명이 붙었다.

남원시 인월면에는 뱀등이라는 산이 있다. 이 산은 옛날 중국의 이여송이 우리나라 산천을 답사할 적에 이 곳에서 초중반사(草中盤蛇)의 대혈이 있다 한데서 유래한다. 그 뒤 사람들이 비암등으로 부르다가 현재는 뱀등이라 부른다.

임실군 임실읍에는 용요산이 있다. 이 산은 옛날에는 큰 뱀이 있다고 해 사요산이라고 불렀는데, 후에 이 산 모양이 구름을 타고 승천하는 용의 모습 같다고 해서 용요산이라고 불렀다.

장수군 장수읍에는 사두봉이라는 산이 있다. 옛날 이 산 봉우리가 높아 봉화를 올렸다 하며, 봉우리가 뱀 같이 생겼다고 해서 사두봉으로 부르게 됐다고 한다. 고창군 무장면에도 사두봉이 있다.

이 가운데 지리산은 뱀 지명 박물관으로 40여 곳에 뱀 관련 지명이 깔려 있다. 북서쪽(남원쪽)에는 비암쏘(산내면 대정리, 덕동리, 부운리 등 여러 곳), 뱀사골(산내면 부운리), 비암동(동면 서무리) 등 뱀 지명을 갖고 있다.

뱀을 뜻하는 사()는 똬리를 틀고 있는 뱀의 형상을 딴 글자로 일어서는 기운을 뜻하며, 우리 조상들은 한꺼번에 많은 알과 새끼를 낳기 때문에 다산성을 상징한다고 해 풍요와 재물의 가복신(家福神)으로 여겼다.

 

 

무장읍성과 사두봉

 

 

전라북도 고창군 무장면 성내리에서 사두봉과 용소에 관련하여 전해 내려오는 이야기가 성내리 사두봉과 용소.

사두봉은 북쪽 성벽에서 읍성 중앙 쪽을 향해 남쪽으로 뻗어 오다 객사 뒤쪽에서 우뚝 멈춘 구릉인 곳을 말한다. 사두봉에 얽힌 전설은 바로 성내리 사두봉과 느티나무의 이야기이다.

무장현은 동북방으로 황새의 형태인 한제산이, 읍성 안에는 큰 뱀의 형태인 사두봉이, 읍성 남쪽 남산이 개구리의 형국을 이루고 있어 황새와 뱀 그리고 개구리가 가까이에 먹이를 둔 셈이어서 늘 기근이 없이 날로 번창해 왔다고 하는데

사두봉을 깎아 우뚝한 뱀의 머리를 수그리게 하여 마을의 우환을 예방하였고, 사두봉에 느티나무를 심고 개구리 연못을 만들어 무장고을을 다시 번영하게 했다는 풍수담이자 지명 유래담이다. 이를 사두봉 이야기라고도 일컫는다. 무장면 성내리 옛 무장읍성이 자리 잡고 있는 북쪽 성벽으로부터 중앙 부위를 향해 남쪽으로 쭉 뻗어 오다가 우뚝 멈춘 작은 구릉이 있는데 이곳을 사두봉이라고 한다. 지금은 그 흔적조차 찾을 길이 없지만 우뚝 솟은 봉우리의 좌우 양측에 뱀의 눈과 같이 파란 물이 넘치는 용소가 있었는데 오른쪽 눈은 지금 무장초등학교의 운동장 복판이 되고, 왼쪽 눈은 객사 동편 아래 우물이 있는 옆자리가 되었다. 이 뱀 머리의 북쪽으로 크고 작은 성황당 능선이 좌청룡 우백호를 이루며 둥글게 옹위되어 있는 것은 마치 뱀이 몸을 둥글게 도사리고 머리를 높이 치켜든 지형이다.

무장고을 터를 반사[서리고 있는 뱀] 형국이라 하여 조석으로 양쪽 용소에서 안개[용이 내뿜는 김]가 솟아나와 고을 안을 뒤덮으면 경치도 좋거니와 이 기운으로 고을 사람들이 부귀를 누리게 되고 또한 많은 인걸이 배출되어 옛날 무장 현령의 세력이 드세었다고 한다.

예부터 고창은 성자랑’, ‘흥덕은 양반자랑’, ‘무장은 아전자랑한다는 말이 전해오고 있다. 무장고을은 지방세가 강하여 항상 이 고을에는 역량 있는 현감들이 부임해 왔다. 만약 사람만 좋고 역량이 부족한 현감이 왔다가는 얼마 가지 못하고 쫓겨났다. 이와 같이 바닥이 드세고 배타성이 강하다 보니 시장이 설 수가 없었다.

그래서 당시에는 6나 떨어져 있는 안진머리장[현 해리면 안산리 이상동]으로 장을 보러 다녔다. 이 장터는 사두봉에서 마주 보이며, 장날이면 사람들이 모이고 시끄러우므로 뱀이 이곳을 넘보아 장날이면 젊은 청년 한 사람씩 희생이 되었다. 고을의 역대 현감들은 이 끔찍한 사건을 해결하고자 온갖 노력을 다했지만 허사였다. 그러던 어느 날 시주를 얻으러 온 중이 사두봉을 깎아 우뚝한 뱀의 머리를 수그리게 해야 한다는 묘책을 알려 주었다. 그렇지만 사두봉을 깎아 메워 버리면 옛날처럼 번창하는 기운이 차츰 없어질 것이라고 했다. 현감은 이제야 무서운 사건을 해결할 수 있다는 기쁜 마음으로 고을 사람들을 동원하여 사두봉에서 안진머리장이 안 보이게 깎아 내리고 뱀의 두 눈인 용소를 메우도록 했다. 그 뒤부터 안진머리장날에 싸움을 하고 살인을 하는 변은 없어졌지만 과연 무장에서 인물이 나지는 않았다. 그래서 이를 또 걱정하던 중에 도사 한 분이 지나다가 이 말을 듣고 일러주기를 사두봉에 나무를 심어 이 나무가 예전 사두봉 높이만큼 자라게 하고 남산 밑에 개구리 못을 만들면 이 뱀의 먹이가 생기게 되어 무장고을은 다시 번영할 것이라고 예언을 해주었다. 이 말을 전해들은 고을 현감은 깎아내린 사두봉에 느티나무를 심고 개구리 연못도 만들었다. 이 개구리 연못 자리가 지금의 무장장터이고 객사 주변의 나무들은 그때 심은 것이라고 한다.

 

장수 사두봉

 

백두대간 영취산에서 분기된 금남호남정맥이 서북쪽으로 뻗어가며 무룡고개 장안산을 거쳐 금남호남정맥에 솟구쳐 오른 산이다 행정구역상 장수군 장수읍과 번암면 경계에 있으며 수분치에서 남으로는 섬진강, 북으로는 금강을 가르고 원수분 마을 뒤 신무산 기슭에는 금강의 발원지가 있다. 옛날에 봉이 높았다 하여 봉화를 올렸고 한자로 뱀머리를 써서 봉이 뱀머리처럼 생겼다하여 사두봉이라 한다.

 

장수 와암과 동산치

 

아주 먼 옛날 동산치에서 두 신선이 바둑을 두다 두꺼비 한 마리가 커다란 뱀에게 쫓기자, 도술로 뱀을 산이 되게 하고 두꺼비는 저 갈 곳으로 가라 했다. 그러나 그 자리에서 신선의 은혜를 고마워하다 화석이 되었다고 한다. 또한, 와암은 장안산 계곡에서 놀던 개구리들이 뱀에게 쫓기어 동산치의 선인에게 구원을 얻으려 지지마을 앞에 와 그곳 개구리들과 개굴개굴 울었다. 그러자 신선은 뱀을 쫓아버리고 개구리 떼를 구해주니, 개구리들이 고마워하며 밤낮으로 울다가 바위가 되었다고 한다.

 

뱀 네 마리가 낼름거리는 이삼만의 글씨 산광수색(山光水色)’

 

이삼만, 19세기 한국의 3대 명필

 

19세기 추사 김정희(1786~1856), 눌인 조광진(1772~1840)과 함께 삼필(三筆)’의 한 사람이 전북출신 창암(蒼巖) 이삼만(李三晩, 1770~1847)선생이다.

그는 백하 윤순, 원교 이광사로 이어지는 동국진체(東國眞體)’를 계승하고 서예의 주요 활용 영역이 서첩에서 비문으로 전환되는 19세기 서단의 흐름을 실천한 인물이다.

그는 1770년 몰락한 양반의 후예로 태어나 궁핍한 환경 속에서도 평생을 전북 지역에서 생활하며 아무리 몸이 아파도 하루에 천자씩을 쓰는 부단한 노력으로 호남서단을 평정했다.

특히 모든 서체를 고르게 잘 썼다는 평가를 받고 있지만 흐르는 물과 같은 이른바 유수체(流水體)’는 독자적인 서체로 높이 평가되고 있다.

붓이 노래하고 먹이 춤추는 듯한 유수체는 물처럼 바람처럼 얽매임 없는 창암의 자연스러운 서예관의 결실이다.

서예와 문학에 대한 연구도 게을리 하지 않아 글씨를 배우려는 후학을 위해 화동서법을 간행하기도 했다. 그는 많은 서첩을 남겼는데, 글씨를 쓰는 법에 대한 이론과 중국과 우리나라의 글씨에 대한 평가 등이 담겨 있다.

그는 전주 옥류동에서 자연을 벗삼아 살면서 아래론 유유히 흐르는 물을, 위로는 떠도는 구름을 쳐다보며, 이를 터특하기 위해 벼루 3개를 구멍 낼 정도로 강한 집념의 소유자로 유명하다.

산광수색(山光水色)’ .

이 글귀는 산은 높고 물은 맑다는 뜻으로, 작가 특유의 행운유수체(行雲流水體, 구름처럼 흘러가고 물처럼 흐르는 자연스런 글씨체, 보통은 유수체라고 말함)’의 조형미를 너무 가장 잘 보여주는 걸작이다.

그런데 이 글귀를 작품을 꼼꼼이 쳐다보면 깜짝 놀라운 사실을 발견하게 된다. 글씨 한 자 한자마다 뱀 한 마리가 서로 다른 모습을 한 채 우리를 잔뜩 노려보고 있기 때문이다. 획은 뱀처럼 꿈틀거리며 장강처럼 흘러가더니 어느새 험한 계곡 급류로 돌변해 내리꽂힌다. 이내 옅은 담묵으로 휘갈긴 글씨는 도도한 강물과 기암괴석, 생동하는 야수의 숨결처럼 기세가 등등하다는 느낌이 든다.

금세라도 뱀이 살아서 꿈틀댈 것만 같은 이유다. 이 글씨는 뱀의 모양을 서체로 잘 형상화한 그야말로 수작이다. 아니, 깊은 산의 웅장함을 느끼는 순간 눈앞에서 폭포가 떨어지는 듯하다.

산과 물의 이미지가 구체적으로 다가오다가 어느 순간 자연과 합일되는 경지를 보여준다. 가늘다 굵어지고 진하다가 엷어지는 대비가 화면에서 무엇보다도 뛰어난 조화를 이룬다.

()’자는 뱀이 똬리를 틀고 경계하는 모습과 흡사하고, ‘()’자는 개구리와 벌레를 낚아채는 듯한 형상이 뚜렷하다.

()’자는 살모사가 목을 추켜들고 갈비뼈를 빳빳하게 펼친 채 상대방을 노려보고 있는 형상인가 하면 ()’ 자는 똬리를 틀고 승천하는 이무기같은 느낌이 강하게 든다.

이 작품은 뱀의 모양을 독특하면서도 조형적으로 아름답게 표현, 자신이 개발한 행운유수체의 한 단면을 잘 보여준다. 전해오는 말에 의하면 이삼만은 뱀에 물려 죽은 아버지의 복수를 위해 뱀을 보는 대로 모두 잡아 죽여, 새로 된 지팡이 3개를 모두 닳게 할 정도였다고. 그래서 아직도 호남지역에서는 뱀을 쫓기 위해 이삼만이라는 글씨를 거꾸로 붙이는 풍속이 남아 있다.

미당 서정주 시인의 시집 질마재 신화에 실린 이삼만이라는 신에서는 재미난 이야기를 만날 수 있다.

이삼만 석 자를 많이 받아다가 집 안 기둥마다 다닥다닥 붙여 두는데, 그러면 뱀들이 기어올라 서다가도 그 이상 못 올라온다는 신념 때문입니다

여기에서 이삼만은 조선 후기의 명필로, 아버지가 독사에 물려 세상을 떠난 뒤 뱀만 보면 껍질을 벗겨 통째 씹어 먹었다. 이 때문에 이삼만 앞에서는 독사들이 풀이 죽어 움직이지도 못했다는 전설이 전해진다.

어쩌면 이삼만이 죽인 것은 뱀이 아니었는지도 모른다. 미움과 설움이 이같은 걸작을 만들게 하지는 않났나 하는 생각이 든다. ‘()’ 자를 통해 상승하는 뱀의 기운을 담아 그가 죽인 미물들의 극락왕생을 기원하지는 않았을까.

부안군 줄포면 파산리는, 사옥리(蛇屋里)에서 파산리(琶山里), 다시 파산리(巴山里)로 바꾼 것은 이삼만이 뱀을 퇴치했다고 해서 매년 정초가 되면 뱀날(사일, 巳日)이삼만이란 이름을 종이에 써서 해뜨기 전, 집안의 곳곳에 붙혀 뱀이 집안으로 들어오지 못하게 하는 '()'를 하게 됐으며, ‘뱀방이를 써붙이는 풍속이 이 지역으로부터 비롯됐다는 주장까지 한다.

옛 석학들은 글씨 쓰듯 그림을 그린다고 했건만, 흐르는 물 같다는 그의 글씨, 이같은 행운유수체는 되레 그림 그리듯 획을 분방하게 풀고 있는 것은 전주 한벽당과 관련이 깊다는 전주문화원 김진돈 사무국장(전라금석문연구회장)의 설명이다.

 

이삼만, 중국에 명필로 알려지다

 

어느 날, 이삼만이 전주에 우거할 때 한여름의 한더위를 피하려고 한벽당에 올라 왔다. 이때 한 부채장수 아저씨가 부채 보따리를 부려놓고 다락의 한켠에 눕자 마자 이내 코를 골았다.

그는 불현듯 필흥(筆興)이 일어 집에 가서 필묵을 가져와 모든 부채에 해서(楷書), 행서(行書), 초서(草書)로 부채에 합당한 문자나 시구를 써 넣었다.

한참 후 부채 장수가 깨어보니 합죽선이란 합죽선은 모두 먹칠이 되어있지 아니한가? 화가 난 부채 장수는 큰소리를 쳤다.

그러나 이삼만은 시비를 논하지 않고, “만약에 이 부채가 팔리지 않으면 저기 보이는 저 집이 내 집이니, 그리로 가지고 오시오라는 말만 남기고 사라졌다.

그 후 합죽선은 몇 달이 지나도 사가는 사람이 없었다. 그러던 중 하루는 한 중국인이 길을 가다가 길가에 펼쳐놓은 합죽선의 글씨를 발견하고, 그 글씨가 바로 창암의 글씨임을 확인한 후에 보통 합죽선의 2, 3배 값을 지불하고 모조리 사갔다.

그 중국인은 그 부채를 중국에 가지고 가서 창암의 글씨를 크게 알렸다. 그리하여 중국은 물론 국내에도 창암의 글씨가 널리 알려져 글씨를 배우겠다는 많은 사람들이 수 없이 몰려들었다.

이삼만이 추사 김정희보다 16살 위로, 추구했던 작품 세계가 서로 달랐던 두인물이 결정적으로 부딪쳤던 일이 있었으니, 다음의 일화가 이를 잘 말해준다.

김정희가 정치적 소용돌이에 휘말려 제주로 유배 가는 길에 전주에 들렀을 때, 익히 명성을 듣고 있던 이삼만의 제자들이 스승의 글씨에 대해 추사에게 평을 청하였다.

추사는 그 글씨를 보면서 한동안 말이 없더니 노인장께선 지방에서 글씨로 밥은 먹고 살겠습니다

그 말을 듣고 이삼만의 제자들이 분노하자, 이삼만은 저 사람이 글씨는 잘 아는지 모르지만, 조선 붓의 갈라지는 맛과 조선종이의 번지는 멋은 잘 모르는 것 같다. 언젠가는 다시 날 찾아 올 것이다고 했는데, 그의 예언은 그대로 적중했다.

김정희는 또 그가 탐탁찮게 여겼던 이삼만을 생각해냈다. 유배를 마치고 전주에 들렀으나연장자인 이삼만이 벌써 세상을 떠난 뒤였다.

완주군에 묻힌 창암의 묘소를 찾아가 명필완산창암이삼만지묘(名筆完山蒼巖李三晩之墓)’라고 묘비명을 써 주었다고 전하고 있다.

문화유적 답사에 부지런한 어떤 사람들은 지금의 이삼만의 묘비는 추사의 글씨가 아니라는 주장도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