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문학 스토리] 완주 고갯길의 교회 ‘복음 불꽃’ 고을로 번져가다
-'올라탄 말 재촉하며 포교하러 다닌' 마로덕
덕이리라(馬路德)’ 선교사가 전한 위봉교회 천국복음
120년이라는 세월의 더께 아래서 다시 깨어나 사명을 회복하는 중인 완주 위봉교회의 예배당과 종탑이 생각납니다.
완주 위봉교회(전북 완주군 소양면 위봉길 7-8)는 완주군 인근 학동교회, 수만교회, 신월교회 등 여러 교회들이 설립될 수 있는 모태교회로의 역할 감당해왔습니다.
지난 2018년 12월에는 교회 수리 중 한국교회사적으로 귀중한 자료가 될 1907년 당시 당회록과 세례 교인 명부가 발견되기도 했습니다.
2018년 성탄절 전날, 안양호 목사는 예배당 리모델링을 위한 철거작업 중이었습니다. 낡은 강대상 바닥을 뜯어내던 그의 손끝에 무엇인가 낯선 물체가 잡혔습니다. 조심조심 꺼내보니 빛바랜 책 두 권이 이끌려나왔습니다.
한 권의 표지에는 '위봉교회 당회록'이라는 글자와 ‘1907. 3. 25’라는 숫자가, 다른 한 권의 표지에는 '위봉교회 세례교인 명부'라는 글자가 적혀있었습니다.
구전으로만 전해오던 위봉교회의 역사 한 자락을 실제로 확인할 수 있는 증거가 이처럼 극적으로 세상에 등장했습니다.
위봉교회 역사의 시작에는 마로덕(馬路德)이라는 재미난 이름을 가진 서양인 선교사가 존재합니다.
위봉교회를 비롯, 여러 유서 깊은 교회의 연배 있는 성도들에게는 ‘루터 올리버 맥커친’이라는 본명보다 한국식으로 지은 세 글자의 이름이 훨씬 친숙한 인물입니다.
위봉교회 설립자인 마로덕 선교사.
그를 추모하며 어느 시인이 써내려간 한시에는 이 이름의 절묘한 풀이가 담겨있습니다.
‘어찌하여 이름이 마로덕이던가(何如作名馬路德), 올라탄 말 재촉하며 포교하러 다닌 덕이리라(促馬行路布敎德)’
전북 동남부의 산악지대를 찾아다니며 복음을 전해 무려 80여 개의 교회를 개척한 그의 위대한 자취는 세상을 떠난 지 60여년이 되었음에도 여전히 전설로 남아있습니다.
미국 남장로교 한국선교회의 전주선교부 소속으로 전라북도 지역에 커다란 발자취를 남긴 마로덕(馬路德, Luther Oliver McCutchen, 1875~1960) 선교사를 우리는 잊을 수 없습니다. 그는 1875년 2월 21일 미국 남캐롤라이나의 비숍빌(Bishopville)에서 태어나 데이비슨 대학과 대학원에서 공부한 후 다시 남장로교 계통인 버지니아의 유니온신학교와 콜롬비아신학교를 졸업하여 남장로교의 목사가 되었습니다. 그리고 그 1년 후인 1902년 한국에 온 마로덕은 서울에서 어학교육을 받은 뒤 1903년 전주에 도착했습니다.
1903년 20대의 미혼 청년 선교사로 전북 동부지역에서 활동을 시작한 그의 선교 역정은, 60대의 할아버지가 되어 귀국하던 1941년까지 38년 동안 계속되었습니다. 그동안 그는 수없이 많은 한국인들에게 복음을 전하고, 가는 곳마다 교회를 세웠습니다.
완주 최초 제내리교회는 1900년 김성식 정종혁을 포함한 13 성도가 만동리 김성식 집에서 시작했으며, 1904년 목포·전주에서 활동하던 루터 맥커처(마로덕) 선교사를 초대 당회장으로 모셨습니다.
마로덕 교사가 전주에서 말을 타고 위봉산성을 넘어 위봉폭포를 지나 위봉교회를 1905년에 세운 것이 전국 오지중에 오지인 동상면에 복음이 들어오는 계기가 됐습니다.
마로덕 선교사는 1905년 9월에 학동교회, 1906년 6월에 수만교회, 1907년 3월에는 신월교회를 설립했다고 합니다.
사과와 한우로 유명한 전북 장수군에 110년 이상 지역 사회와 함께해온 교회가 있습니다. 1910년 교통이 불편한 장수에 미국 남장로교 마로덕 선교사가 말을 타고 방문했습니다. 그는 한 손엔 성경과 다른 한 손엔 쇠고기를 들고 가정을 방문하며 복음을 전했고, 그 해 봄 장수교회의 역사가 시작됐습니다.
그의 선교구역이었던 전북의 무주, 진안, 장수, 남원, 익산(일부)과 충남 금산의 오래된 교인들은 지금까지도 마로덕에 관한 일화를 1~2개 기억하고 있을 정도로 그의 영향은 넓고 깊었습니다.
일제 말기 강제추방령에 의해 한국을 떠난 그는 잠시 하와이에서 선교하다가 고향으로 돌아가 1960년 별세했습니다.
마로덕은 ‘씨뿌리기 전도법’ 혹은 ‘농부선교법’이라는 선교방식을 주창한 것으로도 유명합니다. 일화에 따르면 길거리나 장터 사랑방 등을 다니며 사람들에게 콩을 볶아 나누어주며 1단계 ‘씨뿌리기’를 하고, 2단계로는 방문을 통해 성경을 더 가르치고 잘못 아는 것을 교정해주는 ‘물주기’와 ‘잡초제거’, 어느 정도 복음을 이해한 사람들을 교회 구성원이 되게 하는 3단계 ‘수확하기’를 거쳐, 지역교회의 일꾼 될 자를 선별하는 ‘가지치기’의 과정을 적용했다고 합니다.
앞의 구절처럼 마로덕은 19세기가 20세기로 바뀌는 시점이던 어느 날, 바튼 고갯길을 굽이굽이 돌아 말에 올라탄 모습으로 홀연히 위봉마을에 나타났습니다.
위봉마을은 완주군 소양면과 동상면이 만나는 산악지대에서도 정점을 이루는 고지에 위치해있습니다.
조선 숙종 때는 위봉산성이 축조됐으며, 동학농민혁명 때는 전주 경기전의 태조 어진과 위패 등이 이곳으로 옮겨온 역사가 있습니다. 전주8경 중 하나로 꼽히는 위봉폭포도 지척에 있습니다.
위봉리(威鳳里)는뒤쪽에 위봉사가 있어 지어진 이름입니다.
이 밖에 대흥리에는 여러 고적지가 있습니다. 위봉산 중턱에 위봉산성이 있고, 위봉산성안에 행궁(行宮) 터가 있는데 행궁은 임진왜란 때 전주성이 위급하자 경기전(慶基殿)의 영정을 옮겨 모신 곳입니다. 절로는 송광사, 쌍계사(雙溪寺), 태조암(太祖岩), 송광사 남쪽에 있던 남암(南岩)의 은선암(隱仙岩)의 터, 위봉산 성 바깥쪽에 있던 외성창(外成倉)의 창고 터, 위봉산성 안에 있던 내성창(內成倉)의 창고 터, 위봉산성의 서문 등 허다합니다
불교의 위세가 유난히 강한 동네였지만 파란 눈의 선교사가 전한 천국 복음은 사람들의 영혼에 빠른 속도로 파고들었습니다.
믿는 이들이 점점 늘어났고, 처음에는 산성 주변 토굴에서 모여 예배하던 이들이 1905년 마을에 초가예배당을 건축하며 위봉교회는 본격적인 사역을 시작했습니다
세례교인 명부에는 날이 갈수록 이름이 쌓여갔습니다. 충성스러운 일꾼들 덕택에 교회의 지경도 넓어졌습니다. 점점 넓은 예배당을 필요로 했지만, 그때마다 교우들의 아낌없는 헌신으로 거뜬하게 해결해냈습니다.
산 위의 동네에서 타오르기 시작한 복음의 불꽃은 인근 수많은 고을들로 번져갔습니다. 사방에서 가파른 고갯길을 올라 하늘의 가르침을 전해들은 사람들이 각자의 동네에서 다시 교회를 세우며, 위봉교회는 일대에서 '어머니교회'라는 이름까지 얻었습니다.
물론 좋았던 시절만 있었던 것은 아닙니다. 일제강점기인 1924년에 한 차례, 6·25가 발발한 1950년에 또 한 차례 교회 문을 일시적으로 닫아야 했던 아픈 순간을 겪었습니다.
산업화가 급격히 진행된 시기부터는 더 큰 위기가 찾아왔습니다. 동네방네 가지마다 주렁주렁 매달린 단감 송이들처럼 넉넉했던 마을은 어느새 50호도 남지 않았습니다. 당연히 교세까지 위축됐습니다.
그럼에도 그루터기처럼 남은 이들이 고비마다 꿋꿋이 극복해내며 위봉교회는 그 명맥을 이어올 수 있었습니다. 2000년 5월 11일에는 설립 100주년을 맞아 당시 교회를 담임하던 이정연 목사와 서남이 장로 등이 예배당 앞에 기념비를 건립하기도 했습니다.
한편으로는 그동안 제대로 보존하지 못했던 역사를 되찾기 위해 마로덕 선교사의 행적을 비롯한, 위봉교회의 크고 작은 사적들을 찾아내는 데에도 온 교회가 심혈을 기울였습니다. 그 과정 중에 뜻밖의 발견으로 얻은 수확이 바로 옛 강대상 밑에 누군가 알 수 없는 이유로 숨겨두었던 옛 당회록과 세례교인 명부였던 것입니다.
역사전시실에는 이미 마로덕 선교사의 활동기에 널리 사용되었던 풍금 타자기 등 여러 물품들과 위봉마을 사람들의 오랜 자취가 담긴 옛 생활도구 등이 자리를 잡았습니다. 마로덕 선교사의 옛 행적 및 위봉교회 역사 관련 전시자료들과 이제는 교회의 최고 보물이 된 당회록 및 세례교인 명부까지 전시를 마치면 어디 내놓아도 손색없는 역사관이 완성됐습니다.
120년 전 한국명 마로덕 선교사가 세운 전북 완주군 소양면에 소재한 위봉교회. 대한예수교장로회 합동총회가 위봉교회를 제21호 사적지로 지정하고 감사예배를 진행했습니다.
미국남장로교 전주선교부가 자리 잡은 옛 예수병원 건물(현 엠마오사랑병원) 곁에는 ‘마로덕 선교사 사택’(전주시 완산구 빙고리 2길 25)이 보존되어있습니다.
1910년 건축된 것으로 추정되는 이 건물은 전주에서 가장 오래된 서양식 건물로, 마로덕 선교사 외에도 수많은 선교사들과 여러 한국인 사역자들의 거주지로 사용되어 왔습니다.
2016년 예장통합 총회로부터 한국교회사적지 제29호 지정을 받았으며, 현재는 생동하는교회 기독교문화과학센터 전북기독교역사연구소 기독교전북원로회 전주주사모회 등 여러 단체와 기관들이 입주해 활동중입니다.
건물 입구에는 마로덕 선교사 부부의 과거 활동상과 관련된 자세한 정보들과 각종 추모작품이 전시되어있습니다.
‘마로덕선교사기념비’는 현재 전주 호성교회(덕진구 호성신중길 6)에 세워져있습니다. 전북남성경학원 학우회에서 1936년 맥커친 선교사의 회갑을 기념해 건립한 이 190cm 높이의 비석 뒤편에는 한국전쟁 당시 총탄에 파손된 흔적이 남아있습니다.
당초 이 비석은 과거 예장통합 전북노회회관에 위치해 있었으나, 2007년 회관 매각에 따라 호성교회로 옮겨왔다고 합니다.
맥커친 선교사가 1912년 ‘초곡교회’라는 이름으로 세운 호성교회는 2013년 건립한 설립 100주년 기념관을 ‘마로덕기념관’으로 명명했습니다.
서양화가 양진 작가 어머니 김윤애(91세)씨는 완주군 고산면 소농리 출신으로 어릴 적 마로덕 선교사로부터 유아세례를 받았다고 증언합니다.
위봉교회 인근의 소농교회도 100년이 넘은 역사를 간직하고 있습니다. 김씨는 소농교회 세례인 명부를 통해 이같은 사실을 알게 되었다고 합니다.
정말 당당하게 시골교회도 이렇게 살아남을 수 있습니다. 100년 넘은 교회가 살아남을 뿐만 아니라 지역의 불신자들을 계속 전도하는 교회로 살아남을 수 있다는 모습을 계속 보여줬으면 좋겠습니다.
본래 곶감은 ‘꼬챙이에 꽂아서 말린 감’을 뜻하며 ‘곶다’에서 온 말입니다.
된소리로 ‘꽂감’이라 하는 것도 ‘꽂다’에서 비롯된 말입니다.
볕에 두어 말린 곶감을 백시 또는 건시라고 합니다.
백시는 몸을 따뜻하게 보강하고, 장과 위를 두텁게 하며, 비위를 튼튼하게 해 얼굴의 주근깨를 없애며 목소리를 곱게 한다고 합니다.
집집마다 골목마다 연주황 속살을 드러낸 감이 주렁주렁 곶감이 덕장 가득 달려있습니다.
살점이 붙은 씨를 혀끝으로 살살 굴리면서 쫄깃쫄깃한 과육을 빨아먹는 그 짜릿한 맛은 홍시 먹기에 익숙한 사람만이 압니다.
쫄깃한 식감과 쫀득한 맛을 자랑하는 곶감. 혀끝을 대면 솜사탕처럼 사르르 녹습니다. 이슬처럼 사라지고 마는 감미로운 맛.
처마엔 어김없이 붉은 곶감이 달려있습니다.
햇살 한 줌 탐이 나서 하늘에 손뻗어 움쥐었습니다.
시나브로 손 안에 든 햇살에 맑은 가락이 흐릅니다.
잎을 떨어뜨린 감나무 아래서 쳐다보면 비로소 위봉마을에서 당신의 하늘이 열립니다.
오늘 햇살 한 줌, 바람 한 점이 하늘담은 삶터에서 하늘닮은 당신을 하늘거리게 만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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