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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북스토리

전라감사 강섬이 참여한 그림 '희경루방회도' , 완산후인(完山後人)이 발문

[인문학 스토리]

오늘, 학교 동기, 직장 동기들과 술 한 잔을 하고 싶습니다.

전라감사 강섬이 참여한 그림 '희경루방회도' , 완산후인(完山後人)이 발문

동국대학교 소장 '희경루방회도(喜慶樓榜會圖, 보물 제1879호)'는 1546년(명종 1)의 증광시(增廣試) 문·무과 합격 동기생 5명이 1567년(선조 즉위) 전라도 광주의 희경루에서 만나 방회(榜會)를 갖고 제작한 기년작(紀年作) 계회도(契會圖)입니다.
인물을 묘사한 필치는 매우 생기 있고 활달하며 자신감이 넘칩니다.
또한 비슷한 자세의 인물을 같은 모양으로 판에 박은 듯 반복해서 그리는 투식적인 면이 적습니다. 희경루 건물 묘사에서도 보이는 대로 그린 듯한 꾸밈없는 필치를 엿볼 수 있습니다. 이상과 같은 이유로 '희경루방회도'는 제작시기, 양식적인 특징, 회화적 가치 면에서 가치가 큽니다.
신묘생진시(辛卯生進試, 1531년)의 동방들이 1542년에 만나 제작한 '연방동년일시조사계회도(蓮榜同年一時曹司契會圖)'와 함께 현전하는 16세기의 방회도 2건 중 하나입니다.
'연방동년일시조사계회도(蓮榜同年一時曹司契會圖)'라는 이 그림은 국립광주박물관에 소장된 그림으로 1531년 과거에 급제한 김인후(金仁厚 1510∼1560)를 비롯한 7인의 동기는 11년쯤 후 햇빛이 화사한 날 다시 모였습니다. 그것이 이 그림으로 남겨졌습니다. 모임에 참여한 사람은 정유길(鄭惟吉 1515~1588), 민기(閔箕 1504∼1568), 남응운(南應雲 1509∼1587), 이택(李澤 1509∼1573), 이추(李樞 생몰년 미상), 김인후(金仁厚 1510∼1560) 그리고 윤옥(尹玉 1511∼1584) 이렇게 7명입니다.

하서 김인후가 화명 상단의 왼쪽에 초서(草書)로 쓴 칠언율시의 내용은 다음과 같습니다.

진사에 같이 급제한 당년의 선비들이
십년을 전후하여 대과에 올랐구려.
벼슬길 함께 가니 새로 맺은 벗이 아니오.
맡은 구실 다르지만 모두 다 말단이네.
만나는 자리마다 참된 면목 못 얻어서

한가한 틈을 타서 좋은 강산 찾아가네.
진세의 속박을 잠시나마 벗어나니
술 마시며 웃음 웃고 이야기나 실컷 하세.

衿佩當時一榜歡(금패당시일방환)
科名先後十年間(과명선후십년간)
朝端共路非新契(조단공로비신계)
都下分司各末班(도하분사명말반)
隨處未開眞面目 (수처미개진면목)
偸閒須向好江山 (투한수향호강산)
相從乍脫塵銜束 (상종사탈진함속)
莫使尊前笑語蘭(막사존전막어란)

동년(同年)이란 옛사람들은 같은 과거에 합격한 동기생들을 이렇게 불렀습니다. 그들의 명부를 동년록(同年錄)이라 했습니다. 또 함께 합격한 사람을 동방(同榜)이라 했습니다. 동방들의 이름을수록한 책자가 바로 흔히 알고 있는 방목(榜目)입니다. 방목(榜目)이나 동년록(同年錄)이나 모두 과거 동기생의 명단인 셈입니다. 연방(蓮榜)이란 조선 시대에 소과(小科)인 생원과, 진사과의 향시(鄕試), 회시(會試)에 합격한 사람의 명부를 이르는 말입니다.
방회도는 16, 17세기에 집중되어 있습니다. 그 중에서 '희경루방회도'는 1550년의 '호조낭관계회도' 및 '연정계회도'와 함께 이른 시기에 제작된 사례입니다.
보물로 지정된 '호조낭관계회도(戶曹郞官契會圖)'는 조선시대 공물과 세금 등의 경제를 담당하던 호조 관리들의 계회모임을 그린 것으로, 비단바탕에 가로 59㎝, 세로 121㎝입니다.
보통 계회도의 상단에는 모임의 명칭이 쓰여져 있는데 이 그림은 명칭이 빠져있습니다. 참석자들은 안홍·이지신·김익 등으로 의관을 바르게 하고 안쪽 가운데 인물을 중심으로 좌우로 둥그렇게 앉아 있는데, 안쪽에서 멀어질수록 인물들을 작게 표현함으로 계원들의 서열을 나타냅니다.
명종 5년(1550)경에 그려진 이 그림은 산수배경을 위주로 했던 16세기 중엽 이전의 계회도와는 달리 계회장면이 산수배경 못지 않게 부각되는 등 전통을 따르면서도 16세기 중엽의 큰 변화를 반영하고 있습니다
대부분의 16세기 계회도는 수묵화로 그려졌으며 채색화로 그려진 경우는 드문 편입니다.
보물로 지정된 '연정계회도(蓮亭契會圖)'는 소속이 같은 문인들의 친목도모와 풍류를 즐기기 위한 모임을 그린 계회도입니다.
16세기 중엽에 제작된 이 그림은 계회장면을 산수배경 속에서 상징적으로 표현하던 것과는 달리 산수배경과 거의 대등하게 계회장면이 부각되어, 조선 전기 계회도와 두드러진 대조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따라서 조선 전기 계회도에서 중기 계회도로 넘어가는 과도기적인 작품이라 할 수 있습니다.
비단바탕에 엷고 산뜻한 채색으로 그린 이 그림은 가로 59㎝, 세로 94㎝ 크기입니다.
이 그림은 중단의 계회장면과 더불어 상단의 계회명칭 및 하단에는 참석자들의 이름·본관 등의 사항을 기록했습니다.
계회장면을 제외한 나머지 부분이 잘려나가 계회의 구체적인 내용과 참석자들은 알 수 없습니다. 그림은 산수를 배경으로 옥내 안에는 일곱 명의 참석자들이 원을 그리며 앉아 있고 그 오른쪽에는 여인들이 줄지어 앉아 있다. 계회가 열리고 있는 정자 앞에 연못이 있음을 고려하여 '연정계회도'라고 부르기도 합니다.
이 '희경루방회도'는 모임의 주체와 장소 등을 고려해 볼 때 전라도 광주 지역의 화사(畵師)가 그렸을 가능성이 높아 지방화단에서 그려진 채색계회도라는 점에서도 의의가 있습니다.
제목, 그림, 좌목, 최응룡으로 추정되는 ‘완산후인(完山後人)’이 쓴 발문까지 계회도의 형식을 온전하게 갖추고 있습니다.
이는 본관이 완산(完山, 現 전주)인 사람 즉 전주이씨 성을 가진 사람이 짓다는 의미입니다. 누가 이같은 내용을 썼을까요.
좌목(座目)에 따르면, 참석자는 광주목사 최응룡(崔應龍), 전라감사 강섬(姜暹), 임복(林復), 유극공(劉克恭), 남효용(南效容) 등입니다. 이들 가운데 최응룡(1514~1580)은 1546년 증광 문과에서 장원(갑과 1등), 정자공(임복, 1521~1576)은 을과(乙科) 6등, 강섬(1516~1594)은 병과 2등을 했습니다. 발문을 통해 영광 윤홍중(尹弘中, 1518~1572)과 광양 육대춘이 지방관으로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윤진영, 『 동국대학교박물관 소장의 희경루방회도 고찰』, 동악미술사학 Vol.3, 2002, 148쪽 재인용)
강섬은 1566년 8월부터 1568년에 전라감사를 역임했습니다.
'전라도 도선생안'에는 자헌대부(정 2품) 품계와 함께 그의 부임 년도가 명종 21년으로만 기재돼 있습니다. 그가 언제 전라감사직을 그만 두었는지는 정확하지 않습니다. 실록에도 이에 관한 기사가 없고, 도선생안에는 이임 시기가 기록되어 있지 않습니다.
다만 후임자인 송찬이 선조1년(1568)에 전라감사로 부임한 것으로 도선생안에 기재된 것으로 보아 그는 선조 원년 혹은 그 직전에 이임한 것으로 추정됩니다.
그가 재임하던 시절엔 기상 이변이 많았습니다.

경기 광주(廣州) 에 천둥이 쳤다. 청홍도(淸洪道) 서천(舒川) 과 부여(扶餘) 에 천둥 번개가 여름이나 다름없이 쳤다. 비인(庇仁) .예산(禮山) . 남포(藍浦) . 청안(淸安) . 천안(天安) . 청양(靑陽) . 청주(淸州) . 보령(保寧) . 해미(海美) . 전의(全義) 에도 소나기가 쏟아지며 크게 천둥 번개가 쳤다. 전라도 담양(潭陽) . 금산(錦山) . 진도(珍島) . 고부(古阜) . 익산(益山) . 영암(靈巖) . 김제(金堤) . 임피(臨陂) . 능성(綾城) . 남평(南平) . 흥덕(興德) . 정읍(井邑) . 무장(茂長) . 무안(務安) . 고창(高敞) . 태인(泰仁) . 금구(金溝) . 진안(鎭安) . 진원(珍原) . 장성(長城) . 화순(和順) . 고산(高山) . 옥구(沃溝) 에 천둥 번개가 여름처럼 쳤다. 경상도 예천(禮泉) 에서도 천둥 번개가 크게 쳤다. 함창(咸昌) 에는 바람이 크게 불고 비와 우박이 섞여 내리면서 천둥이 쳤는데, 온 경내가 캄캄했으며 한참 만에야 그쳤다.(명종실록 명종 21년 10월 16일)

전라도 나주(羅州) . 전주(全州) . 능성(綾城) 에 천둥이 희미하게 울렸다.(명종실록 명종 21년 10월 27일)

밤에 남방. 곤방 및 천중(天中) 에 번개가 쳤고, 남방에는 천둥이 치면서 비와 우박이 섞여 내렸는데 우박의 크기가 팥만했다. 청홍도 태안(泰安) 에는 비와 눈이 섞여 내리면서 천둥이 크게 일었고, 전라도 전주 . 나주에는 크게 천둥 번개가 일면서 비가 내렸다. 김제(金堤) . 순창(淳昌) . 만경(萬頃) . 무장(茂長) . 흥덕(興德) . 고창(高敞) . 함평(咸平) . 진원(珍原) . 화순(和順) . 부안(扶安) . 태인(泰仁) 에는 비바람이 몰아치면서 천둥이 쳤고, 황해도 연안(延安) 에는 천둥이 희미하게 울렸다.
(명종실록 명종 21년 10월 29일)

기상이변은 계속됐습니다. 같은 해 11월 25일 전북 함열에 능금꽃이 피고 열매가 맺었습니다. 음력 11월말이면 한겨울입니다. 그런 추운 겨울에 꽃이 피고 열매를 맺는 이변이 있었던 것입니다.

연회를 가졌던 시기는 1567년으로, 이들은 1546년 봄 과거에 함께 합격했던 동방(同榜)이었습니다. 이후 여러 사정으로 만나지 못하였지만 동료라는 생각은 늘 잊지 않고 지내다 우연한 기회에 모임을 가지게 되었다는 내용이 발문에 적혀 있습니다.
이를 방회도(榜會圖)'라 합니다. 방회도란 과거시험 합격 동기생들의 모임을 그린 그림입니다. 방회 모임 당시에는 최응룡은 54세, 정자공은 47세, 강섬은 52세입니다. 네 번째와 다섯 번째의 유극공과 남효용은 문과 방목에는 보이진 않습니다.
발문을 보면 “동년(同年)”이라 하여 참석자들이 같은 해 과거 급제한 것을 알 수 있는데, 1567년에 있었던 무과 급제자로 보입니다. 다시 말하면, 같은 해 치뤄진 문과와 무과의 과거 급제 동기들이 모인 것으로 보입니다. 모임의 주관자는 전라도관찰사 강섬으로 기록하고 있습니다. 이 모임 당일에는 오지 못했지만, 광주 가까이에 동방이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모인 장소는 광주의 희경루(喜慶樓)라 하여 “희경루 방회도”라 부릅니다.
원래 서울특별시 유형문화재였는데 2015년 9월 2일 보물 제1879호로 승격 지정됐습니다.
그림을 보면 희경루는 돌로 쌓은 축대 위에 1층은 기둥을 세웠고 2층에 누를 올렸습니다. 건물은 담장에 둘러싸여 있으며 외부와 통하는 문이 화면 동쪽과 남쪽에 1개씩 2개가 있습니다. 화면 오른쪽으로는 활을 쏘는 곳과 그에 따른 부속 건물이 있고, 그 뒤로 민가의 지붕들이 보입니다.
희경루 담장 아래 지표면 부근에 그려진 지붕들 때문에 희경루는 굉장히 거대한 건물처럼 보입니다. 화면의 아래쪽에도 관아처럼 보이는 건물 지붕이 묘사되어 있다. 그림에 묘사되어 있는 활터는 19세기 이후 관덕정으로 이름이 바뀐 것과 관련된 것으로 보입니다.

우리들 동방은 병오년(1546, 명종 1년) 봄의 경사스러움을 함께 한 후 조정에서, 혹은 조정 밖에서, 혹은 세상을 떠나거나 사정으로 인하여 헤어져 만나지 못하였다. 어느 한 곳에서도 동료로서 맺어짐을 늘 잊지 않고 생각해왔다. 우연히 백척의 높은 누각에서 고회를 가지게 되니 북쪽에 위치하여 좌우에 佳兒를 둔 자가 광주목사 최응룡이고 동쪽에 앉아 있으며 이 모임을 주관한 자가 관찰사 강섬이다. 그 오른쪽에 열을 지어 각각 기녀들을 앉혀 놓은 자들은 임복과 유극공, 남효용 등이다.

오호라, 동서남북의 사람들이 함께 과거에 등재하여 형제관계를 맺으니 얼마나 좋은 일인가. 인생의 영고성쇠(榮枯盛衰)를 겪으며 별처럼 흩어진지가 20여년이 되었는데, 먼 남쪽의 거친 땅에 모여서 다시 지난 일을 흥하게 하니 다행한 일이다. 친밀한 교유가 빛을 발하지만 관작을 드러내지 않아 이때의 사람들로 하여금 보고 듣게 하니 또한 다행 중 다행이다. 윤영광 홍중과 강광양 대춘이 또한 가까운 읍의 수령으로 있는데 병이 들어 함께 하지 못하니 이 어찌 다행 가운데 하나의 흠이 아니겠는가. 융경원년 정묘 6월 16일 완산후인이 제하다.

吾同年 自丙午春同慶之後 或內或外或散或化參商 一隅徒結夢想去久矣 偶作高會相百尺危樓 位北而左右佳兒者 光牧也 在東而綱紀一會者 方伯也 列於右而各挂雲者林希仁, 劉敬叔, 南恭叔也, 呼以東西南北之人 偶同科第作爲兄弟(논문에는 第)幸也 昇沈星散(二十)載之餘 聚於炎荒復擧往事幸也 爛熳忘形 不掦爵秩 聳時人觀聽 又幸之幸也 尹靈光弘中, 陸光陽大春 亦守近邑 而病不與焉玆豈非幸中之一欠乎 隆慶元年 丁卯六月 旣望 完山後人題

'희경루방회도'는 비단 바탕에 그려지고 족자 형태로 꾸며졌습니다. 그림 상단에 전서로 ‘喜慶樓榜會圖’라고 제목을 쓰고, 중단에 희경루에서 열린 방회 장면을 그리고, 하단에 좌목과 발문을 적었습니다. 좌목에는 방회의 참석자 명단이 품계·관직·이름·자·본관 순으로 적혀있고, 참석자 가운데 한 사람인 최응룡이 방회를 열게 된 연유와 소회를 적었습니다.

“1546년의 과거 시험에서 합격의 기쁨을 함께 누린 동기생들이 서로 만나지 못하다가 광주에서 우연히 만나 방회를 열게 되었으며, 전국으로 흩어져 20여 년간 만나지 못하다가 이렇게 광주에서 모여서 교유하게 되니 정말 기쁜 일이다. 다만 가까운 읍의 수령으로 있는 두 사람이 병으로 참석하지 못해 아쉽다”는 것이 그 내용입니다.

최응룡은 발문에서 참석자들이 앉았던 자리의 위치도 밝혀 두었는데, 품계가 전라도 관찰사 강섬보다 낮은 광주목사 최응룡(崔應龍)이 중앙의 상석에 앉았습니다.

동쪽에는 강섬이 앉았고, 서쪽에는 나머지 세 사람이 앉은 것으로 보아 연장자순으로 자리 배정을 한 것이 아닌가 생각됩니다.

이 그림에 묘사된 바에 따르면, 희경루 2층의 넓은 마루에서 벌어진 연희에는 주인공인 동기생 5명 외에 무려 36명이나 되는 기녀들이 참가했습니다.
기녀들은 모임의 흥을 돋우기 위해 음악 연주와 가무를 담당하고, 참석자들 옆에 앉아 시중을 들고 있습니다.

참석한 동기생들은 모두 독상을 받았는데, 주칠 대원반과 흑칠 소원반 위에 음식을 차려 놓았습니다. 이들이 입고 있는 복식을 보면, 전직 관료 2명은 흑립(갓)을 쓰고 있고, 나머지 현직 관료 3명은 사모를 쓰고 있어 현재 관직 재직 여부를 알 수 있습니다.

또한 5명 모두 입고 있는 포를 비슷하게 그렸지만, 실제로는 전직 관료 2명은 깃이 곧은 편복 포를, 현직 관료는 단령의 관복을 착용했을 것으로 보입니다.

가무를 담당한 기녀들은 악기를 연주하는 그룹과 그 연주에 맞춰 춤을 추는 무리로 나누어 그렸으며, 음식을 나르고 있는 기녀들도 보입니다.

분칠을 짙게 했는지 기녀들의 얼굴은 하얗게 묘사 되었으며, 독특하게 머리를 부풀려 높이 올린 뒤에 붉은색 띠와 장식을 사용하여 멋을 낸 가체를 했습니다.

이런 모습은 조선후기에 그려진 단원 김홍도나 혜원 신윤복이 그린 풍속화에 등장하는 여인들의 머리 모양과는 다른 모습인데, 조선 중기에 유행했던 머리 모양이 아닐까 생각됩니다.

한 삼 자락을 휘날리며 춤을 추고 있는 기녀들은 황색의 장삼(長衫)을 가운처럼 겉에 입고 있는데 길이가 길어 자락이 바닥에 끌립니다.

한 가운데 앉아 있는 최응룡의 옆자리에는 동기(童妓)로 보이는 어린 기녀가 시중을 들고 있는데, 붉은색의 포를 입고, 가체는 올리지 않은 채 땋아서 내린 머리 모양을 하고 있습니다.

조선 시대에 관기(官妓)들은 중앙뿐 아니라 지방에도 배속되어 있었는데, 지방기(地方妓)는 지방 관아의 기적(妓籍)에 이름을 올리고, 관아에서 주최하는 각종 의례나 연회에 차출되어 춤을 추고 음악을 연주하며, 흥을 돋우거나 시중을 들었습니다. 지방 기녀 중에서 미모나 재주가 뛰어난 기녀는 중앙에서 열리는 연회에 발탁되어 가기도 했습니다.

정자 일층과 주변에서는 관아에 소속된 하급 관리들이 쉬고 있고, 호위를 맡은 나장들은 열을 맞춰 걸어가고 있으며, 왼쪽 나무 그늘 아래에서는 악공들이 모여 앉아 피리를 연주하고 있습니다.

희경루 밖으로는 민가의 지붕이 보이고, 오른쪽으로는 과녁이 있는 활터가 보입니다. 현재 희경루는 소실되어 흔적을 찾기 힘들지만 이 그림을 통해 당시의 모습을 유추해 볼 수 있습니다.

현대인들이 여러 목적으로 참여하게 되는 많은 친목 모임 중에 가장 친밀한 유대감으로 지속되는 것은 아무래도 동기 모임이 아닐까 합니다. 입학 동기, 입사 동기는 말할 것도 없고 요즘은 입시학원 동기와 산후조리원 동기까지 형태도 다양하며 결속력도 더 강한 것 같습니다. 같은 목적을 향해 힘들게 걸어온 시간을 공유하며 앞으로도 서로에게 힘이 돼 줄 수 있다는 신뢰를 자연스럽게 쌓을 수 있기 때문이 아닐까요.
조선시대에도 갖가지 친목 모임이 사대부 사회에 결성돼 있었는데, 그중에서 평생 끈끈하게 이어지는 동기 모임은 바로 과거 합격 동기생들의 방회(榜會)였습니다.

관직에 진출하기 위한 첫 번째 단계인 생원·진사시, 즉 사마시(司馬試)의 동기들은 합격한 그해부터 장원의 주도로 모이기 시작해 매년 돌아가면서 방회를 열었습니다. 지방관 부임으로 전국 각지로 흩어지더라도 여건이 허락하는 대로 근무지에서 방회를 열곤 했습니다. 특히 과거에 합격한 지 만 60년이 되는 것을 회방(回榜)이라고 하는데, 평균적으로 20대에 사마시를 통과했다는 통계를 감안하면 사마시 회방은 80세가 넘어야 가능했습니다. 그래서 회방을 맞았어도 동기생들이 한자리에 모여 방회를 열거나 회방연을 치르기란 무척 드문 일일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러나 모두가 과거시험에 급제할 수는 없었습니다.

17세기 전반 김령(金坽, 1577-1641)의 일기인『계암일록』에는 스물일곱 살 때부터 서른여섯 살 때까지 과거에 응시한 기록이 남아 있습니다. 10년 동안 김령은 생원`진사시 일곱 번, 문과 일곱 번, 모두 열네 번 과거에 응시하여 서른여섯 살 때 증광시 문과에 급제했습니다. 일반적으로 20세 전후부터 과거에 응시했다는 것을 염두에 둔다면 그는 급제할 때까지 대략 스무 번 가량의 시험에 응시하였을 것으로 보입니다.

그는 급제할 때까지 생원 초시 두 번, 진사 초시 두 번, 별시 문과 초시 한번 등 총 다섯 번의 초시에 합격하였으나 회시나 전시에서 번번이 낙방했습니다. 초시 합격의 기쁨은 잠시였고, 낙방의 아픔은 되풀이 되었습니다.

18세기 중반의 고창출신 황윤석(黃胤錫, 1729-1791)은 스물네 살 때부터 마흔여섯 살 때까지 23년 동안 적어도 스물일곱 차례 이상 과거에 응시했습니다. 그는 서른하나에 진사가 되었으나 이후 15년간에 걸친 노력에도 불구하고 결국 문과에는 급제하지 못했습니다. 그렇다고 그가 실력이 없었던 것은 아닙니다. 그는 문장으로 이름이 높았을 뿐 아니라 영조 45년(1769)에는 성균관 칠일제에서 2등을 해 국왕을 알현하기도 했습니다. 그에게 과거는 잡힐 듯 잡힐 듯하면서도 잡히지 않는 신기루 같은 것이었습니다. 그는 마흔 여섯 살이 넘어 결국 과거 응시를 포기했습니다.
조선시대 대표적 능참봉인 황윤석이 쓴 일기형식의 ‘이재난고(전북 유형문화재 제111호)’를 비롯한 기록을 통해 당시 능참봉의 업무를 자세히 파악할 수 있습니다.
이에 의하면 종3품인 능참봉은 부사와도 거리낌 없이 왕능관리 문제를 논했으며 고유제 때 지방관을 헌관으로 직접 차출하는 일도 예사였습니다.
‘나이 70에 능참봉을 했더니 한달에 거동이 스물아홉번’이라는 말이 대변해 주듯 능참봉은 역할도 매우 다양했습니다. 원칙적으로 2인이 매월 보름씩 2교대로 재실(齋室)에 기거하며 근무했는데 왕과 왕비의 제례를 관장하고 능을 살피는 봉심(奉審), 능역 내의 수목관리 및 투작(偸斫:함부로 나무를 베는 일)의 감시를 주로 담당했으며 능지 또한 제작했습니다. 정자각, 비각이나 석물을 개수하는 일에 감독을 맡기도 했고 수복(守僕:능침에서 청소하는 일을 맡은 사람)과 수호군을 살피는 방호도 중요한 역할의 하나였습니다. 이러한 직무특성 때문에 그들은 유학적 지식과 건축, 토목, 조경 등 기술분야의 전문성까지 겸비한 직무능력을 갖춰야만 했습니다. 연소하지 않고 경륜이 있는 자’를 시험을 거치지 않고 특별채용의 형식으로 능참봉을 임용했다는《성종실록》의 기록으로 보아, 과거를 거치지 않고 관직에 진출할 수 있는데다가 왕릉수호라는 상징적 권한 때문에 당대 최고 선호직종이었음을 짐작할 수 있습니다.
조선은 ‘경국대전’ ‘봉심규정(奉審規定)’을 통해 능역관리를 체계적으로 수행했으며, 그 중심에는 높은 직책은 아니었지만 조선 최고의 왕릉 관리 전문가로서 조선왕릉의 세계유산적 가치를 오늘까지 보존하는 데에 크게 기여한 능참봉이 있었음을 기억할 만합니다
황윤석의 부친 황전(黃㙻, 1704-1772)은 근 20년 동안 생원·진사시 초시에 여섯 번 합격했습니다. 그러나 복시에서 모두 실패하였고, 결국 마흔 여섯에 이르러 과거를 포기했습니다. 그러나 아쉬움이 남았는지 쉰여덟에 다시 한 번 응시하였는데, 또다시 초시에만 합격하고 회시에서 낙방하고 말았습니다.
수험 생활은 합격과 동시에 끝이 났습니다. 그러나 끝내 합격하지 못한 사람은 어느 시점에 이르러 스스로 응시를 포기해야만 했습니다. 몇 살 때까지 과거를 보느냐 하는 것은 시대마다 달랐던 듯합니다.
때문에 부정한 시험도 비일비재했습니다.
김홍도가 그렸다고 전하는 ‘공원춘효도’와 ‘평생도’의 소과응시는 조선시대 과거시험장의 풍경을 보여주는 그림입니다. 두 그림의 구도는 비슷하다. 곳곳에 커다란 양산이 펼쳐져 있고, 양산 아래마다 예닐곱 명이 옹기종기 모여앉아 답안을 작성하고 있습니다.
자세히 보면 각자 답안을 쓰는 게 아니라 하나의 답안을 공동으로 작성하고 있습니다. 김홍도는 왜 이런 그림을 그렸을까요? 부정이 난무하는 과거제도의 실상을 폭로하기 위해서였을까요? 아닙니다. 김홍도의 그림은 사회 비판과 거리가 멉니다. 당시는 그것이 지극히 일상적인 풍경이었기 때문입니다.
그 누구는 지난 십년 동안 앞서거니 뒤서거니 대과를 합격해 나란히 조정의 신하가 됐지만 아직은 미관말직이라 실력 발휘를 할 기회를 갖지 못했다고 읊었습니다. 그렇지만 그와는 상관없이 경치 좋은 곳에서 세상사를 잊고 술잔에 빌어 웃고 떠들며 풍류를 한번 즐겨보자는 호기를 담은 그림이 다시 한 번 떠오르는 오늘, 어디에서 학교 동기, 직장 동기들과 술 한 잔을 하고 싶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