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안의 담배
담배는 생활필수품이 아닌 기호품임에도 당시 생활필수품에 버금가는 상업적 비중을 차지했던 농작물이었다. 담배의 품종은 크게 세 가지였다.
최한기의 『농정회요』에는 서초, 남초, 왜연초의 세 종류와 그 특성이 기술되어 있다. “첫째, 서초(西草)는 평안도와 황해도에서 주로 재배되었고, 잎이 얇고 길었으며 맛과 향이 맑았다. 둘째, 남초(南草)는 남쪽지방(주로 전라도)에서 재배되었고, 잎이 두텁고 맛이 탁하였다. 셋째, 왜연초(倭煙草)는 줄기와 잎이 가지와 같았다.”라고 적고 있다.
18세기 중엽과 19세기 초엽에 이르러서는 담배 재배가 전국적으로 확산돼 평안도의 경우 담배 밭의 수익이 수전(水田)의 최상급 밭보다 10배나 이익이 많게 됐고, 주민들이 담배재배만을 전업으로 삼고도 생활을 영위할 수 있는 진안(鎭安)과 같은 담배 산지가 형성되기도 했다.
이옥(李鈺, 1760~1815)은 자신이 쓴 '연경(烟經)'에서 전국 4곳의 연초 맛을 평가했다(안대회 옮김, '연경, 담배의 모든 것').
‘평안도 산은 향기롭고도 달고, 강원도 산은 평범하면서도 깊은 맛이 있고, 전라도 산은 부드러우면서도 온화하고, 함경도 산은 몹시 맛이 강해 목구명이 마르고 머리가 어질어질하다.
전라도 연초는 맛이 부드러우면서도 온화했다. 이 맛을 내기 위해 전라도 사람들은 연초 잎을 음지에서 말리는 음건법(陰乾法)이라는 독특한 연초 가공 기술을 개발했다. 이 기술로 색과 맛이 아주 좋은 전국 최고의 연초를 생산했다. 전라도에서도 어디 것이 최고였을까?
△진안초와 상관초, 조선에서 가장 뛰어난 품질
첫째, 진안(鎭安)에서 생산되는 것은 전국에서 품질이 가장 좋았다. 그냥 품질만 좋은 것이 아니라 전국에서 가장 먼저 최고 품질로 인정받았다. 18세기 중엽에 전라도 진안과 장수지방은 유명한 담배재배산지로 알려져 있었다. 이중환의 『택리지』에도 “진안은 마이산 아래에 있는데 토양이 담배에 알맞다. 경내(境內)는 비록 높은 산꼭대기라도 담배를 심으면 잘 자라서 주민들은 대부분 이것으로써 생업을 삼는다.” 라고 할 정도로 진안은 토양이 담배 재배에 알맞아 산꼭대기에도 담배를 재배하였고, 대다수의 진안 농민들은 담배를 재배하여 생계를 유지해 갈 정도라고 알려져 있었다.
진안의 토양이 연초 재배에 알맞았다. 그래서 일반 밭은 말할 것 없고 산꼭대기에 심어도 연초는 잘 자랐다. 이로 인해 진안 사람들은 연초 재배로 생업을 삼아가고 있었다. 당시 연초 농사의 이익은 좋은 논 벼농사보다 10배나 될 정도였다. 그래서 진안의 연초 밭, 전주의 생강 밭, 임천ㆍ한산의 모시 밭, 안동ㆍ예안의 왕골 밭은 나라 안에서 가장 이익이 많은 곳이라는 기사가 18~19세기 자료 도처에서 발견된다.
△진안 담배
전국을 돌아다닌 경험을 바탕으로 말년에 인문지리서인 『택리지』를 저술하였다. 『택리지』에서 그는 지배계급의 특권을 인정하지 않았고 생산 활동에 근거한 지리적 환경을 중시하였다. 가장 좋은 지리적 환경은 땅이 기름진 곳이 최고이고, 다음이 교통이 편리한 곳이라고 하였다. 특히 진안의 담배 밭, 전주의 생강 밭, 임천ㆍ한산의 모시밭, 안동ㆍ예안의 왕골 밭 등 경작하여 돈을 벌 수 있는 상품작물의 재배지역을 중시하였다. 그의 주장은 후에 박지원ㆍ박제가 등의 북학파 학자들에게 큰 영향을 주었다.
‘살찐 고기 하얀 회는 남원 요천의 은어요 가늘게 썬 진안에서 난 담배(鎭安草)라’ 가장 오래된 만화본 춘향가를 궁금해하는 이들이 많다. 현재까지 춘향의 이야기가 정확히 언제부터 판소리로 불리게 되었는지는 알 길이 없다. 다만 1754년(영조 30년)에 유진한(柳振漢, 1712~1791)의 문집인 '만화집(晩華集)'에 실린 '가사 춘향가 2백구'라는 글에, 가객이 춘향의 이야기를 판소리로 부르는 것이 시로 읊어져 있다.
유진한은 천안시 병천면 만화출신으로, 호남지방을 유람하며 직접 듣고 본 판소리 춘향가(春香歌)를 한시로 옮겼다. 이를 '만화본춘향가(晩華本春香歌)'라고 한다. 원제목은 '가사춘향가이백구(歌詞春香歌二百句)'이다. 지역 특산물도 나온다. 살찐 고기 하얀 회는 요천(남원)의 은어이고, 귀한 과일 빨간 홍시는 연곡(구례)의 홍시라네. 또 실올처럼 가늘게 썬 진안에서 난 담배(鎭安草)를 관노에게 분부해 눌러 담아 올린다고 했다.
구체적인 기록을 살펴보자. 우리나라 최초의 백과사전인 에는 “담배가 우리나라에 전래된 것은 1618년이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등 조선시기의 저서에도 담배가 1618년에 전래되었다고 적고 있다.
이규경의 '오주연문장전산고', 조재삼의 '송남잡지'엔 진안의 담배가 진안초로 유명하다고 나온다.
유득공의 '고운당필기'의 '담바고(淡婆姑)'란 글에 '왜국에서는 연초를 담바고라 부르고 잘게 썬 연초를 지삼이(支三伊)라고 부른다. 우리말도 그러하다. 대개 이 풀이 본래 왜국에서 왔기 때문에 우리나라 사람들이 왜어를 그렇게 부른다. 지금 사람들은 그 말이 왜어인 줄 모르고 망령되이 해석하기를 "담바고란 담파괴(膽破塊, 담에 생긴 덩어리를 깨트림)라는 뜻이니, 연초의 성질이 담(痰)을 깨뜨리기 때문이다.
지삼이는 진삼미(鎭三味)라는 뜻이니, 호남의 진안과 관서의 삼등(三登,평안남도 강동군 삼등면)에서 좋은 연초가 생산되기 때문이다" 라고 하는데, 그 설명이 통하는 듯하지만 사실 견강부회가 심하다. 자고로 망령되이 해석하는 자들은 대부분 이와 같다'고 했다.
어느덧 진안에서 나는 연초는 '진안초(鎭安草)'라는 상품명으로 전국에 팔려 나갔다. 당시 진안(鎭安)과 삼등(三登)에서 나는 연초 품질이 전국의 남쪽과 서쪽에서 으뜸이었다. 그래서 이를 합쳐서 이른바 '진삼초(鎭三草)'가 전국 최고라고 했다. 진안 연초의 명성은 20세기 초까지 이어졌다.
△전북의 다른 담배
1904년 「황성신문」에 다음과 같은 기사가 실렸다.
"鎭安懷仁成川之烟田과 全州之薑田과 韓山林川長城之苧田과 安東之龍鬚田과 開城錦山之蔘田과 靑山報恩之棗田과 尙州之杮田과 濟州之橘田이 爲國內有名者也오"
둘째, 장수(長水)도 연초 주산지였다. 1732년(영조 8)에 부승지 이구휴가 다음과 같이 보고했다. 30년 전에 전라도를 왕래할 때에 연초를 재배하는 밭을 보니 울타리 밑의 빈터에 불과했는데, 이제 와서 보니 비옥하고 좋은 땅은 모두 연초를 재배하니, 장수와 진안 같은 곳은 전 지역이 연초 밭이고, 그 동안 들어보지 못한 섬 지역에서도 모두 연초를 심는다는 것이다. 재배에 적합한 장수와 진안 지역이 연초의 전국적인 명산지로 이름 높았다. 장수의 이씨 성을 가진 사람이 집에서 남초를 심었다. 그런데 겨울과 여름을 거치면서도 한 그루도 죽지 않았다. 그래서 3대 60년간 잎을 따서 피었다고 한다.
셋째, 전주와 임실 사이의 전주 상관면에서 나오는 연초도 진품이었다. 밭에 모두 연초를 심어 마을 사람들이 생업으로 삼았다. 그래서 그곳 연초를 상관초(上官草, 上關의 오기)라고 했다(이유원의 ‘임하필기’). 이유원은 담배 가운데 최상품은 광주(廣州)에서 나는 금광초(金光草)와 전라도의 상관초(上官草)라고 하고, 진안에서 나는 담배는 상관 담배의 영향으로 재배하는 것이라 했다. 상관초는 완주군 상관면에서 나는 담배로 전주와 임실의 경계에 자리하고 있다.
넷째, 완산8미 소양의 서초
서초(西草)는 담배를 달리 부르는 말이다. 예로부터 전주의 담배 맛은 예부터 맛이 좋았다. 원래 우리나라 재래종이 아닌 조선 때 서양에서 들어온 풀이라 하여 서초라고 부른 것이다. 완주군 소양면 대흥골과 상관면 마치골에서 나오는 담배는 평안도 성천, 충청도 충주 증평, 진천 등과 함께 유명세를 더했다.
18세기말 19세기 초에 이르면 전국적으로 담배 재배 산지가 형성되었다. 전라도 진안ㆍ장수 외에도 평안도의 삼등ㆍ성천ㆍ강동ㆍ평양 등이 두드러진 담배 산지로 등장하였으며, 황해도의 신계ㆍ곡산ㆍ토산, 강원도의 금성ㆍ안협, 충청도의 정산, 경상도의 영양 등이 주요한 담배산지로 자리잡게 되었던 것이다. 그러한 사실은 수원 유생 우하영의 『천일록』이나 서유구의 『임원경제지』 등에 기록되어 있다.
유득공(1748∼?)은 “평안도의 삼등과 성천 등지에서 나는 담배는 품질이 좋아서 ‘금줄담배(金絲烟)’라고 불리며, 사람들이 그것을 매우 진기하게 여긴다”고 했다. 또한 서유구의 아버지인 서호수가 1799년에 편찬한 『해동농서』에서 “현재 평안도에서 나는 담배는 품질이 좋아 서초(西草)라고 불리거나 향초(香草)라고 불린다”라고 적고 있다. 평안도의 삼등ㆍ성천 지방에서 생산되는 담배는 냄새가 좋고 품질이 좋아 다른 지역의 담배보다 가격이 더 비쌌다.
평안도 삼등과 성천지방에서 나는 담배는 왕실에 공물로 바쳐지기도 하였다. 담배맛이 좋다고 널리 알려지자, 왕실에서 공물로 징발하기도 하였던 것이다. 또한 사신들이 선물용이나 비용의 대용으로 담배를 이용하기도 하였다. 중국에 사신들이 갈 때 관료나 상인들이 선물과 비용에 해당하는 돈이나 물품을 가져가게 되는데, 그 중에서 인삼과 담배 및 담뱃대 등이 사신단들의 물품에 포함되었다. 1788년에 편찬된 『탁지지』에 의하면, 당시 사신들이 선물과 비용으로 가져가는 담배는 ‘지삼(枝三)’과 ‘진삼초(鎭三草)’ 였다. 지삼은 담배잎을 곱게 썰은 것이고, 진삼초는 진안과 삼등의 연초를 가리키는 것이다. 지삼은 왜지삼(倭枝三)으로 일본에서 수입한 것이 많았다.
△국가무형문화재 제65호 백동연죽장(白銅煙竹匠)
전라도는 조선시대에 연초의 주 생산지였다. 이는 전라도 역사를 많이 바꾸었다. 연죽도 많이 만들어졌다. 연초가 유행하면서 각종 끽연구(喫煙具)가 등장했다.
연초갑은 "평양에서 나온 것이 최상이고, 개성과 전주에서 만든 것이 그 다음이며, 서울에서 만든 것이 또 그 다음이다."고 했다. 이는 '연경'에 나온 말이다. 연죽(담뱃대)을 파는 가게인 연죽전(煙竹廛)이 도내 장시에 들어섰다. 그와 함께 연죽을 만드는 연죽장(煙竹匠)이 곳곳에서 활동했다. 주생산지는 대나무가 많은 전라도였다. 전라도에서도 목기로 유명한 남원 것이 인기였다. 조선시대에 남원은 경상도의 동래ㆍ통영, 경기도의 안성과 함께 우리나라 연죽의 명산지였다. 해방 전후 동래와 남원에는 연죽장이 1백여 명에 이르렀다고 한다(장혜영, 「조선조 오동상감연죽에 대한 연구」). 하지만 연초 잎을 잘게 썬 절초(切草)가 사라지고 공장에서 종이로 말아진 궐련이 나오면서, 연죽은 사라지고 말았다.
연죽(煙竹)이란 일반적으로 담뱃대를 말한다. 백동으로 만든 담뱃대를 백동연죽이라 하며, 백동담뱃대를 만드는 기술과 그 기술을 가진 사람을 백동연죽장이라고 한다.
우리나라의 연죽은 동래의 파란장식 연죽과 금·은으로 새긴 담뱃대, 그리고 경주·김천·영해·울산·예천 등에서 만들어진 것이 유명하며, 전북 남원과 경기도 안성지방에서 오늘날까지 전승되고 있다.
담뱃대를 만들기 시작한 것은 임진왜란 후 일본을 통해 담배가 전래되면서라고 전해지며, 그래서인지 대일무역의 중심지였던 동래가 전통적인 명산지이다. 담뱃대의 구조는 입에 물고 연기를 빨아들이는 물부리와 담배를 담아 태우는 대꼬바리 그리고 그것을 잇는 가는 대나무 설대 세 부분으로 구성된다. 대꼬바리는 열을 받는데다가 구조상 파손되기 쉬워서 구리, 놋쇠, 백동과 같은 금속으로 만든다. 간혹 사기제품도 볼 수 있으나 극히 드문 예이다. 물부리는 쇠붙이에 한하지 않고 옥(玉), 상아, 쇠뿔 등 비교적 여러 가지 재료를 자유롭게 사용하는 편이다. 무늬에 따라 이름이 다른데, 무늬가 없는 백동연죽은 민죽, 무늬가 예쁜 것은 별죽·꽃대라 부른다. 별죽은 재료에 따라 은물죽, 오동죽이라 한다. 백동연죽을 만드는 과정은 제일 먼저 백동을 만드는데 동 58%, 니켈 37%, 아연 5%의 비율로 합금한다. 니켈의 함류량이 많으면 백색이 나타난다. 합금한 금속들을 두드려 매우 얇게 만들고, 무늬를 넣어 모든 부분을 땜질하여 만드는데 금·은세공과 같이 섬세한 작업이 필요하다.
△일제가 실시한 전매제, 대한민국이 이어받다
개항 이후 연초의 새로운 품종이 들어오고 가공기술도 새로워졌다. 더불어 외국 연초 제품도 수입되었다. 일본인에 의해 목포ㆍ군산에도 연초 제조회사가 있어 권연초(卷煙草)를 생산했다. 당시 전라도는 여전히 전국 최대 연초 생산지였다. 특히 전북의 고산, 금산, 남원, 무주, 임실, 장수, 전주, 진산, 진안 등지가 주산지였다. 1902년 통계에 의하면, 위 9개 군은 연간 전국 연초 생산량 500만관의 3분의 1인 155만관(33만 1500원)을 생산할 정도였다. 이곳에서 생산된 연초는 중간상에 의해 수집되어 대도시 공장으로 흘러들어갔다.
일제는 우리 주권을 강탈하고서 바로 '연초경작조합'을 만들게 했다. 연초의 재배와 유통을 통제하기 위해서였다.
「매일신보」 1913년 보도에 의하면, 전북은 연초의 주요 산지로 연초 재배의 개량을 위해 전주ㆍ임실ㆍ금산 등 3군에는 이미 연초경작조합이 각각 설립되어 있었고, 이제 또 진안ㆍ장수ㆍ고산 등 3군에 연초경작조합을 설립에 착수했다. 조합원에 대해서는 농공은행에서 저리 융자금을 대출해 주었고, 연초 생산을 늘린 조합원에 대해서는 장려금을 전달하기도 했다. 조합원을 늘리기 위한 유인책이었다. 생산된 엽연초는 총독부가 헐값에 수집해 자신들 제조회사에 넘겼다. 조선인 연초 상인과 제조업자는 몰락의 길을 걸을 수밖에 없었다.
일제는 또한 재정수입을 늘리기 위해 경작자에게 '연초세'라는 세금을 부과했다. 농민들 수입이 줄게 되었다. 급기야 일제는 1921년에 '연초 전매제'를 실시했다. 전매제란 총독부에서 생산과 판매를 독점하는 것이다. 이에 따라 총독부에 전매국이 설치되고, 주요 도시에 전매지국이 설립되었다. 전라도에는 전주에 1921년에 전매지국이 설치되면서 연초 공장도 들어섰다. 전주 전매지국은 전북(무주 제외), 충북 옥천ㆍ영동, 전남(구례ㆍ광양ㆍ순천ㆍ고흥ㆍ보성 제외), 경북을 관할 구역으로 영업을 시작했다.
연초가 많이 생산되는 진안과 장수에는 수납소나 출장소를 두었다. 무엇보다 수매가를 우등, 1~14등, 등외의 등급제로 지급했으니, 일본인 지국원의 입김이 세고 한국인 재배농의 입지는 약할 수밖에 없었다. 1921년 4월에 연초 경작을 생업으로 삼고 있는 전주의 상관ㆍ소양ㆍ구이 3면 1백여 농민이 수납가가 너무 헐가인 것을 분하게 여겨 일제히 손에 담배를 들고 군청으로 들어가 항의한 바 있다. 항의는 몰래 연초를 재배하거나 제조하는 방법으로도 이어졌다(이영학, 『한국 근대 연초산업연구』). 이 전매제도를 해방 이후 대한민국 정부도 계속 실시했다. 우리 정부는 전매청(專賣廳, 현재 한국담배인삼공사)이라는 관리 감독청을 두고서 전국 곳곳에 연초 공장을 세워 가동했다.
△진안 친구 망한 친구
‘진안 친구 망한 친구’는 진안군에 널리 퍼져 있는 ‘담배 망한 건 장수 담배, 친구 망한 건 진안 친구’라는 지역 속언의 배경이 되는 설화이다.
‘진안 친구 망한 친구’는 한국학중앙연구원 어문생활연구소와 안동대학교 민속학 연구소가 공동으로 추진한 ‘한국 구비 문학 대계 개정·증보 사업’ 전북 조사팀이 2010년 2월 2일 진안군 백운면 평장리로 현지 조사를 나가 주민 정상염, 같은 날 진안군 백운면 노촌리 주민 신용권, 2010년 2월 6일 진안군 백운면 덕현리 주민 김우곤으로부터 각각 채록했다.
한국학중앙연구원이 지원하는 한국 구비 문학 대계 웹 서비스에 각각 「담배 망한 건 장수 담배 친구 망한 건 진안 친구」, 「진안 친구 망한 친구」, 「담배 망한 건 장수 담배 친구 망한 건 진안 친구라는 말의 유래」로 수록되어 있으며, 조사 자료 텍스트와 연동되는 디지털 음원을 들을 수 있다.
1. 첫 번째 제보자 정상염[진안군 백운면 평장리, 남, 78세] 이야기
조선 시대에 장수에서는 담배를 많이 재배해서 임금님께 진상했는데 담배 맛이 아주 좋아서 고관대작이 진상품인 담배를 중간에 빼돌리는 바람에 결국 임금님께 진상된 담배는 품질이 좋지 않았기 때문에 ‘담배 망한 건 장수 담배’라는 말이 생겼다고 한다. 진안 사람들은 산중 사람들이라서 숫기가 없고 순진해서 아무라도 친구가 될 수 있어서 ‘친구 많은 건 진안 친구’라고 했는데 이 말이 세월이 흐르면서 ‘친구 망한 건 진안 친구’로 와전되어 오히려 진안 사람을 비웃는 말이 되었다고 한다.
2. 두 번쩨 제보자 신용권[진안군 백운면 노촌리, 남, 82세] 이야기
장수 원님과 진안 원님이 서울 관리들에게 선물로 줄 담배를 싸 가지고 서울로 함께 올라가는 길에 같은 숙소에서 묵게 되었다. 그런데 새벽에 장수 원님이 먼저 일어나서 출발하면서 좋은 담배가 들어 있던 진안 원님의 보따리를 갖고 가 버렸다. 진안 원님이 서울에 가서 보니 본래 싸 갖고 왔던 좋은 담배가 아니었다. 진안 원님이 장수 원님 때문에 품질이 좋지 않은 담배를 서울 관리들에게 선물로 주는 바람에 진안 원님의 평판이 나빠졌다. 두 고을의 원님들 사이에서 일어난 이 일이 일반 사람들에게 퍼져서 “담배 망한 건 장수 담배, 친구 망한 건 진안 친구”라는 말이 생겼다고 한다.
3. 세 번째 제보자 김우곤[진안군 백운면 덕현리, 남, 81세] 이야기
‘진안 친구 망헌 친구’라는 말은 100여 년 전에 진안 군수와 장수 현감 사이에서 있었던 일화에서 생겼다고 한다. 장수에서 무슨 사건이 일어나서 장수 현감이 진안 군수에게 장수 담배를 선물로 가져다주면서 도에 가서 말을 잘해 달라고 부탁했다. 그런데 진안 군수가 장수 현감의 부탁을 깜빡 잊어버리고 도에 가서 말을 전달하지 못했는데, 장수 현감한테는 담배 피느라 말을 못했다고 핑계를 댔다. 이 일화가 널리 퍼지면서 와전되어 ‘담배 망한 건 장수 담배, 진안 친구 망한 친구’라는 말이 생겼다고 한다. 진안에 부임해 오는 군수들에게 진안 이방들의 텃세가 심해서 진안 인심이 고약하다는 뜻으로 이 말이 생겼다는 설도 있다고 한다.
‘진안 친구 망한 친구’는 진안 사람에 대한 지역 속언의 유래담이다. ‘못 믿을 진안 사람’이라는 의미인 이 속언은 진안에 널리 퍼져 있지만 정확한 유래는 밝혀져 있지 않고 유래에 대한 다양한 설이 있을 뿐이다. 유래는 크게 두 가지 측면으로 나눠볼 수 있다. 진안이 산중이라서 사람들이 숫기가 없고 배짱이 크지 못한 데서 이런 말이 생겼다는 인성 기질론적 측면의 유래와 담배에 얽힌 일화에서 생긴 말이라는 지역 문화론적 측면의 유래가 그것이다. 이 속언은 장수 담배와 대구를 이루며 함께 언급되는 경우가 많다. 조선 후기 담배 재배가 활발해지면서 한 지역 전체에서 담배를 재배하는 형태로 발전하였는데 벼농사가 수월치 않았던 장수와 진안에서는 18세기에 들어서면서 담배를 집중적으로 재배하였다. 담배에 얽힌 일화는 진안 지역 담배 재배의 역사와 관련이 있을 것으로 추측된다.
작품: ‘안천 소재지 담배건조장’(진안군 소장). 글 여태명, 그림 김학곤.
'전북스토리' 카테고리의 다른 글
고창 대산 수박은 누가 처음 재배했나? (0) | 2022.06.18 |
---|---|
전라감사 강섬이 참여한 그림 '희경루방회도' , 완산후인(完山後人)이 발문 (0) | 2022.06.17 |
좁은목, 초록바위, 숲정이 등 전주 3대 바람통 (0) | 2022.06.16 |
김종직과 김제 신창진 (0) | 2022.06.15 |
익산 미륵사 목탑을 석탑보다 먼저 조성, 배수 위해 깬 돌과 흙으로 기초 다지다. (0) | 2022.06.15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