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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북스토리

임교진이 함열현 인근 8읍의 전라도의 세곡을 경창까지 운반했던 과정을 기록한 일기 '조행일록(漕行日錄)'

임교진(林喬鎭)이 함열현 인근 8읍의 전라도의 세곡(稅穀)을 경창(京倉)까지 운반했던 과정을 기록한 일기 '조행일록(漕行日錄)'


'조행일록(漕行日錄, 부산광역시 문화재자료 제108호, 해양박물관 소장)’은 1863년(계해년, 癸亥年) 임교진(林喬鎭)이 작성했다. 임교진은 1862년(임술년, 壬戌年) 5월 29일 ‘함열현감 겸 성당창 조세 영운관(咸悅縣監 兼 聖堂倉 漕稅 領運官)’으로 임명됐다. 현감은 조선시대 행정구역의 하나이던 현(縣)의 우두머리를 말한다. 그리고 성당창은 호남의 8읍에서 납부한 세금인 대동미를 모아 보관하던 창고인 조창(漕倉)을 말하며, ​영운관은 세금을 운반하는 담당자를 이르는 말이다. 즉, 임교진은 호남 8읍의 한 곳인 함열 지역의 현감이자 대동미의 보관과 세곡 운반을 담당하던 관리였다.

이렇게 중요한 임무를 맡고 있던 임교진은 1863년 호남 8읍, 즉 남원(南原), 진산(珍山), 익산(益山), 금산(錦山), 고산(高山), ​운봉(雲峰), 용담(龍潭), 함열(咸悅)에서 납부한 세금을 수도로 옮기기 위해 항해를 시작한다.

​임교진은 8읍에서 모은 대동미를 12척의 조운선에 나누어 싣고 웅포(熊浦)를 출발해 경창의 하나인 광흥창(廣興倉)에 도착해 호조판서(戶曹判書)에게 인계했다. ​조운선은 국가에 납부하는 세금을 지방의 창고에서 수도의 경창까지 운반하는 데 사용하였던 선박이다.

​이 운송과정을 날짜별로 자세하게 기록한 것이 바로 조행일록이다. ​조행일록을 통해 우리는 조선시대 서해안 지역의 바닷길에 대해 알아볼 수 있을 뿐만 아니라 간척사업 등을 통해 사라진 서해안 지역의 옛 모습과 지명에 대해서도 알아볼 수 있다. ​해양박물관이 소장하고 있는 ‘조행일록’은 현존하는 조운기록 중 가장 오래된 기록이다.


조행일록


‘조행일록(漕行日錄)’은 1862년 11월부터 1863년 5월까지 전라도 함열현감 임교진(1803~1865)이 성당창 조운 영운관으로 임명되어 함열현 인근 8읍의 전라도의 세곡(稅穀)을 경창(京倉)까지 운반했던 과정을 기록한 일기다.

책임자는 함열현감(咸悅縣監)이자 성당창팔읍조세영운관(聖堂倉八邑漕稅領運官)이었던 임교진(林喬鎭)이었다. 1862년 11월부터 세금을 거두기 시작하여 다음해 3월 15일 성당창을 출발하였고, 5월 2일에 한양의 서강(西江)에 도착했다.

일기에는 이 일정을 중심으로 임교진이 부임한 뒤 세곡을 모으는 과정과 서울에 도착한 뒤 호조(戶曹)와 선혜청(宣惠廳) 등 여러 관청에 세금을 납부하는 일이 모두 기록되어 있다. 전라도에서 거두어들인 곡물은 관리의 녹봉(祿俸)과 군인들의 급료를 비롯한 재정의 바탕이 되었기에, 세곡을 운반하는 조운(漕運)은 국가의 중요한 업무가 됐다.

임교진(1803~1865)은 본관이 나주이고, 자는 백신(伯臣)으로 1837년에 진사(進士)에 급제했다. 1862년 5월 29일에 함열현감에 임명되면서 성당창의 세곡을 운반하는 역할도 함께 맡았다. 조운을 마친 뒤 1864년 6월에 익산군수(益山郡守)에 임명되었으나 1년 만에 죽었고, 조정에서는 효자의 정려(旌閭)를 내려주었다.

성당창에 세곡을 모았던 전라도의 군현(郡縣)은 남원(南原)·진산(珍山)·익산(益山)·금산(錦山)·고산(高山)·운봉(雲峰)·용담(龍潭)·함열(咸悅)로 모두 8개였다. 성당창은 함열현의 관아가 있던 곳에서 동북(東北)쪽으로 20리가량 떨어진 곳에 있었다. 여기에 창고를 갖추고 각 군현의 전세(田稅)와 대동미(大同米)를 모았는데, 약 5개월의 시간이 소요됐다. 세곡을 운반한 조운선은 12척을 마련했다. 1척은 새로 만들었고 2척은 임대하여 충당했다. 각각의 배에는 평균 1,160 석의 쌀과 콩을 실었다. 세곡을 운반하는 과정은 순탄하지 않았다. 우선 성당창을 출발해 본격적인 조운이 시작되었던 웅포(熊浦)까지 가는 길은 물이 얕은 곳이 많아 7~8일이 걸렸다. 4월 6일 에는 배 1척이 암초에 걸려 세곡을 잃을 위기를 맞기도 햇다. 이런 문제에 대비하기 위해 경험이 많은 사공들의 의견을 존중하여 운항하였다.

또한 거쳐가는 군현에서 수로를 잘아는 사람들을 호송리(護送吏)로 보내 조운선을 인도하고 과거장(過去狀)을 받아가기도 하였다. 이러한 일들을 상세하게 적은 ‘조행일록’은 다른 어느 기록에서도 찾아보기 힘든 내용들을 담고 있다. 조운 과정에 대한 기록으로 ‘조행일록’보다 12년 뒤에 작성된 ‘을해조행록(乙亥漕行錄);이 있다. 이 일기는 1875년에 조희백(趙熙百: 1825~1900)이 작성하였으며, 국립중앙도서관에 소장되어 있다.

이 일기와 비교하면 ’조행일록‘은 한양에 도착한 후 조세를 납부하는 과정이 상세하게 기록된 점이 크게 다르다. 세곡의 납부를 위한 행정 처리 과정과 운반된 곡물의 상태와 수량을 확인하는 일, 사공들의 향후 업무를 추첨하는 일 등이 세세하게 기록되어 있다. 조행일록은 필사본으로 서두에 해당하는 기록이 중복되어 있는데, 이것을 모두 엮어서 책으로 만들었다. 일기의 특성상 조운 과정에서 매일매일 기록한 원본의 일기가 있었을 것이며, 이것을 다시 옮겨 적은 책이 현재의 조행일록이다.



국립해양박물관 소장 '조행일록'은 익산의 함열 현감 임교진이 세곡을 배로 운반하면서 세곡내역과 노정을 날짜별로 상세하게 기록한 필사본 1책으로 1862년 11월부터 1863년 5월까지의 일기형식 기록이다. 이 책은 조운에 대하여 상세하게 설명하고 있으며 좌초 등에 대한 기록을 근거를 삼아서 책임의 소재를 분명히 할 수 있는 조세운반에 관한 전반적인 내용을 기록하고 있다.

이것보다 10여년 늦게나온 1875년의 '을해조행록(乙亥漕行錄)'은 분량이 적고 내용이 상세하지 못하지만 국립해양박물관 소장 '조행일록'은 배가 출발하기 전의 세곡수집 과정과 항해과정을 상세히 쓰고 도착해서 납부한 것까지의 과정을 상세히 기록하고 있어 높은 가치를 가지고 있다. 또한 조선시대의 조운제도를 표현하고 있으며 현재까지 밝혀진 조운일기 중 가장 오래된 것으로 추정되고 상세하게 기록하고 있어 조선후기 조운제도 연구와 희소성에서도 높은 상징적 가치를 가지는 귀중한 자료이다



조선은 전국 각 지방에서 미곡을 수납하여 경창으로 운송하기 위해 연해나 하천의 포구에 조창을 설치·운영하였다. 금강의 지류인 익산 함열 지역에는 1428년(세종 10)에 덕성창, 17세기에 성당창이 설치됐다. 1390년 용안에 득성창(得城倉)이 설치되었는데 득성창이 그 기능을 유지하지 못하자 함열의 피포로 옮겨 덕성창으로 개명했고 15세기 전반 함열의 덕성창은 전라도 26개 고을의 전세가 수납되는 국영창고 기능을 담당했다. 덕성창은 고창 일대를 제외한 현 전라북도 지역의 대부분과 충청남도의 금산 지역을 포함하고 있어 당시 국가 경제에 미치는 영향은 매우 지대하였다. 덕성창은 1487년까지 59년간 지속되었고 조선 후기에는 성당창이 설치되었다. 『만기요람』에는 성당창에 12척의 조운선이 소속되어 있음이 기록되어 있다.



조선 후기에 편찬된 『동국문헌비고』[1770]에는 익산 지역의 6개의 장시를 소개하고 있다. 익산 읍내장[2일, 7일], 회화장[5일, 10일], 용안 난포장[2일, 7일], 함열 읍내장[3일, 8일], 황등장[5일, 10일], 여산 읍내장[1일, 6일] 등으로 이들 시장 가운데 용안 난포장은 조창이 있던 용안면 웅포에 개설된 시장이었다.

’신증동국여지승람‘에 의하면 익산군의 토산품은 대나무, 붕어, 생강 등이고, 여산군은 게, 용안현은 게, 뱅어, 붕어, 웅어, 숭어, 민어 등이며, 함열현은 용안현과 같은데 순채 모시가 더하여져 있다. 오희문의 임진왜란 피난일기인 ‘쇄미록(1594~1595년 보물 제1096호, 국립진주박물관 소장)’에는 함열현감으로 있는 사위로부터 위와 같은 토산품을 선물 받는 기록이 종종 등장하는 것으로 보아 장시에서도 농산물과 더불어 주 거래 품목이었을 것이다.

조선중기 학자이자'쇄미록'의 저자인 오희문(吳希文)의 기록에서 보면 그가 임진왜란 중 피난과정에서 함열 인근 임천(林川) 친지 조존성(趙存性)에 3년간 우거하면서 아들 윤겸(允謙)의 친구이자 함열현감인 신응구(申應矩)에게 장녀를 후취로 혼인시켰고, 이후 사위의 도움으로 다소 곤궁을 덜게 되었으며, 일가의 생활비를 함열관아에서 담당하였다는 기록으로 보아 함열현의 재정이 매우 풍족함을 짐작할 수 있다.


*조행일록과 쇄미록이 타 지역 문화재여서 너무 아쉽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