온고을 전주는 예나 지금이나 ‘온(ON)고을’입니다.
그대여, 오늘 전주공예품전시관에서 당신 닮은 옥색 한지를 샀습니다.
내맘 가득 담은 종이 위에 물길 트이고 소슬한 바람도 살랑살랑, 고향의 골목이 사라진 지금 삶이 소살거리는 이곳에 마실을 나왔습니다.
싱그러운 온고을 쥘 부채 하나 손에 쥐고 고샅 어귀에서 그대를 기다립니다. 이 조그만 조각배 서신에 살듯한 정을 담아 보냅니다.
고향의 골목이 사라진 지금, 삶이 속살거리는 한옥마을에 사부작사부작, 싸드락싸드락, 싸목싸목 이것저것 해찰하며 걷는 마실에, 보무(步武)도 당당(堂堂)해 *3대 바람통, 소통을 얘기합니다.
지붕 같은 하늘채에는 흰구름이 윤무하고 침실 같은 대지와 출렁이는 저 하늘 밑엔 푸른 산과 꼬막 등 같은 사람의 집, 아름다운 전주천이 천년의 세월을 아는지 모르는지 무심하게 흐르고 있습니다.
전주 한옥마을 작은 안마당 장독대에 석양빛 서서히 내리고 있습니다. 붉은 햇살은 처마에 걸터 앉았다가 한 나절 잘 쉬었다 간다고 인사를 합니다.
시나브로, 대금 소리와 함께 타닥타닥 불 지피우는 소리가 들리면 목청 큰 소리꾼의 함성이 서서히 잔잔해지면서 밤은 이내 더욱 깊어지고 그윽한 정취를 선사합니다.
손님맞이에 분주한 이들 마을의 이른 아침. 달그락 달그락 그릇을 옮기는 소리와 인근의 전주향교에서 들려오는 새들의 지저귐은 게으른 사람들의 늦잠을 막는 훼방꾼으로 다가옵니다.
꼭두새벽, 살포시 내려앉는 이슬에 놀라 부스스 깨어나는 오목대의 애기똥풀처럼 구김살 없이 살았으면 참 좋겠습니다.
경기전의 대나무, 비바람에 찢겨져 흩어지느니 차라리 목을 꺾는 비장함 전주 양반들의 선비정신인가요.
밤이면 태조로의 밤을 수 놓는 청사초롱 하나 둘씩 불밝혀 전동성당도 반짝반짝. 코발트색 하늘 아래로 빨강 물감 짠듯 부서지는 아침 햇살, 태조영정 하도 지엄해서 국보랍니다.
수원백씨의 ‘학인당’ 솟을대문 시나브로 밀치고 들어서면 싸리비 자국 고운 마당 살째기 목례.
댓돌 위 신발, 금재 최병심선생인가요, 그 정갈함 더욱 더해지는데 굴뚝 연기, 하루만 날려도 세월 천년이십니다.
처마 훑고 지나가는 바람에 울리는 승암사의 풍경 소리, 누구를 위한 울림입니까.
은행로와 노송천 ‘또랑또랑’ 실개천 따라 아기자기하게 늘어선 집들마다 역사의 향기가 있고, 5미6감 찾아 숨바꼭질 너무 푸져 매일매일 잔칫상 차려놓습니다.
하지만 그 옛날의 또랑새비(또랑새우)는 흔적없이 사라져 한정식집의 토하젓으로 대신하며, 이강주 한 잔 술에
*‘기린토월(麒麟吐月)’ 흥건히 넘치십니다.
왕도 견훤의 한 품어서 인가요,
*‘부성삼화(府城三花)’ 진달래, 검붉은 기운 서려 있어라.
이내, 키 작은 처마, 이마를 맞댄 양, 어깨를 겨누는 듯 포개진 골목 너머 소리문화관의 가얏고 소리, 적이 남고모종(南固暮鐘) 불러오네요.
* 3대 바람통:일찍이 전주엔 세 곳의 바람 길목 또는 바람이 시원하게 부는 곳으로 좁은목, 초록바위,숲정이 등 3대 바람통을 지나면 등골이 아주 시원했습니다.
*‘기린토월(麒麟吐月)’:전주의 주봉인 기린봉에 보름달이 떠오르는 모습을 마치 기린봉이 달을 토해 낸다 해서 부르는 이름입니다. 동에서 솟은 ‘기린의 상’인 수호봉의 정상에 툭 솟아 오르는 여의주 달을 상찬하는 것인 만큼, 다가오는 정월대보름날에 몇몇 친구와 함께 오징어발 몇 개와 담근 술 옆구리에 차고 기린봉에 올라 ‘항아’님에게 달을 따 달하고 부탁하고 싶습니다.
*부성삼화(府城三花):전주의 아름다운 꽃 3가지로, 동고산(승암산)의 진달래, 다가봉산의 입하화(立夏花, 입하는 절기), 덕진지당의 연화(蓮花, 연꽃)를 말합니다.
'전북스토리' 카테고리의 다른 글
이옥(李鈺)의 '포호처전(捕虎妻傳)' (0) | 2022.05.23 |
---|---|
조령(문경새재)서 호랑이를 때려잡은 사나이 (0) | 2022.05.23 |
보리 피리를 잘라 전북 고창에서 하룻밤만 묵어도 천년의 세월입니다 (0) | 2022.05.22 |
'그리운 임이 사는 마을' 전북 임실, 행복한 시간들이 치즈처럼 고소하게 흘러갑니다, 바람에 흔들리는 국수 가락이 당신의 지난 삶처럼 정갈합니다 (0) | 2022.05.22 |
호남이 있었기에 나라를 지킬 수 있었다는 말이 유효하기를 바란다 (0) | 2022.05.22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