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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북스토리

여규형의 익주채련곡(益州采蓮曲)과 익산의 연못 스토리

'동쪽 집의 어린 소녀, 서쪽 집의 어린 낭자

약속하여 동이 틀 때 연꽃을 캐러 가네.

춘포 서남쪽 십 리의 연못에는

연 줄기가 쭉쭉 올라 연잎이 가득한데,

몽당치마 맨발인데 진흙 속에 담가두고

긴 침으로 줄기 달린 뿌리를 뽑아내네.

지나던 이 웃으면서 무얼 하냐 물었구나.

답하기를, 이것으로 겨우 입에 풀칠하네요.

지난해 큰 가뭄으로 산과 연못이 말라버려

벼와 기장 오이 종자 남은 게 없었어요.

올여름 보리 패기 괴롭고도 더딘데도,

세금 낼 돈 찾으려니 겨를도 없었지요.

솔 껍질 모두 벗기고 들에는 풀도 없어,

굶주리며 나날이 양식 달라 부르짖었죠.

일찍이 들어보니 부자들은 흰 연뿌리가

가을 강의 고미밥(고미(菰米, 물가에서 자라는 식물로 열매를 채취해서 밥처럼 지어 먹었다고 함)보다 낫다고 좋아한대요.

캐고 또 캐 돌아와서 솥 가득 삶았는데,

거칠고 떫기만 해 먹을 수가 없었어요.

그래도 삼키면 살고 싶다는 생각 드니,

솥 안에 고기가 생겨난 지 오래랍니다.

내가 이 말을 듣고 거듭 탄식하였도다.

연못의 슬픈 기러기 뉘라서 헤아릴까.

백성이 누런 낯빛 되어서는 안되는데,

풀뿌리를 씹는다고 온갖 일이 이루어지나.

예로부터 여자들의 직분을 생각해보면,

흰 쑥 캐어 제사하기, 뽕잎 따다 누에치기라.

그 중에 강남에서 연잎 캐는 사람들은

비단 버선 물결 밟고 곱게 단장했다지만

잎 그늘져 어두우니 베를 짜기 어려웠고,

열 길 연꽃 달다는 건 황당한 말일지니,

강남의 풍속임에 불과할 것이로다.

목란주 배 계수 노로 못 가운데 떠 다니다

뉘라 어찌 생각했을까, 먹을거리 대신할 줄.

초목의 횡액이요, 연못 고기 재앙이라.

연꽃 신이 상소하면 응당 하늘을 울리리니,

이 뜻이 변화되어 단비 되어 흩뿌리리라.

부잣집 딸들은 고기를 먹는다던데,

운명이 달라 오히려 이 지경에 이르렀네.

채련곡에 슬픔을 이기지 못하였으니

채련곡으로 풍요 지어 나라에 바치노라.

 

東家小女西家娘(동가소녀서가낭)

相約淸晨去采蓮(상약청신거채련)

春浦西南十里塘(춘포서남십리당)

蓮莖蕺蕺葉田田(연경즙즙엽전전)

短帬赤脚陷泥淖(단군적각함니뇨)

長鑱木柄連根拔(장참목병련근발)

行人笑問胡爲爾(행인소문호위이)

以此糊口資生活(이차호구자생활)

昨年大旱焦山澤(작년대한초산택)

禾黍苽菓無遺種(화서고과무유종)

苦遲今夏麥登場(고지금하맥등장)

徴租索錢不旋踵(징조삭전불선종)

松皮剝盡野無草(송피박진야무초)

枵腹日日庚癸呼(효복일일경계호)

夙聞富豪饍氷藕(숙문부호선빙우)

全勝秋江溧飯菰(전승추강률반고)

采采歸來作鼎實(채채귀래작정실)

麤硬淡澁不可口(추경담삽불가구)

吞嚥猶覺有生意(탄연유각유생의)

釜中生魚亦已久(부중생어역이구)

我聞此語重歎息(아문차어중탄식)

嗷鴻澤國誰能數(오홍택국수능수)

民生不可有此色(민생불가유차색)

咬根漫說百事做(교근만설백사주)

因念古來女子職 (인념고래여자직)

祭祀采蘩蠺采桑(제사채번잠채상)

就中江南采蓮者(취중강남채련자)

凌波仙襪紅粉粧(능파선말홍분장)

葉暗無光絲難織(엽암무광사난직)

十丈甘蜜殊荒唐(십장감밀수황당)

不過土風事遨遊(불과토풍사오유)

蘭舟桂棹泛中央(난주계도범중앙)

誰謂將此代艱食(수위장차대간식)

草木橫被池魚殃(초목횡피지어앙)

花神上訴天應泣(화신상소천응읍)

化爲甘澍徧四方(화위감주편사방)

富貴人家哺用脯(부귀인가포용포)

寔命不猶至此極(식명불유지차극)

采蓮之曲不勝悲(채련지곡불승비)

采作風謠獻京國(채작풍요헌경국)

-荷亭初稿(하정초고)-'

 

전북 익산지방은 임술민란(壬戌民亂) 때에 항쟁이 치열했던 곳이다. 작중의 현실은 갑오농민전쟁(甲午農民戰爭)이 발발하기 직전의 상황임을 주의할 필요가 있다.(임형택, '이조시대 서사시' 1, 창비, 2020, 430)

 

익산은 백제 때 금마저(金馬渚)로 불렸으며, 무왕 대에는 왕궁과 미륵사가 건립되었다. 백제 멸망 후 보덕국(報德國)이 잠시 설치되었고, 통일신라 경덕왕 때는 금마군(金馬郡)으로 바뀌어 고려 시대까지 지속되었다. 금마군은 1344(충혜왕 복위 5) 원나라 순제 황후 기씨(奇氏)의 외향(外鄕)이라 하여 익주(益州)’로 이름이 바뀌었다가 조선 태종 때 익산(益山)’이라는 지명으로 바뀌었다.

1390(공양왕 2) 5월 권근은 윤이·이초의 옥사에 연루되어 청주의 옥에 갇혔다가 청주에서 발생한 홍수로 인해 잠시 풀려나 개경으로 돌아올 수 있었으나 7월에 다시 익주 몽관(夢官, 지금의 익산시 임상동 일대]으로 유배됐다. 권근은 유배지인 익산에서 성리학의 기본 원리를 이해하기 쉽게 풀어쓴 '입학도설(入學圖說)'을 저술하였다. 당시 권근이 양촌대(陽村臺)’라는 누각과 정자를 지었다고 하는데 지금은 터만 남아 있다.

당나라의 시인 한유(韓愈)'고의(古意)'에서 태화봉 봉우리 우물에 핀 연꽃은, 꽃이 피면 열 길이고 잎 넓기는 배만 한데, 눈 서리처럼 시원하고 꿀처럼 달았더라. 한 조각만 먹게 돼도 위중한 병이 낫는다지라고 했다. 여기에서는 먹을 게 없어서 연뿌리를 먹는 사정을 말하고 있다.

 

한나라 시인 진림(陳琳)'음마장성굴행(飮馬長城窟行)'에서 장정들이 만리장성에 축조에 동원되었다가 돌아오지 못하는 상황을 노래하면서, “사내를 낳거든 제발 떠들지 말고, 딸을 낳거들랑 고기 먹여 키우소서라고 했다.여기에서는 이를 같은 딸이라도 고기를 먹지 못하고 연뿌리를 캐러 다니는 낭자들의 처지를 노래했다.

 

선화공주와 무왕이 세운 절로 알려진 미륵사의 석탑 재건 과정에서 2009년 발견된 '사리장엄구''사리봉영기'. 그러나 정작 이 유물에는 '우리 백제 왕후는 사택적덕의 딸'이라고 적혀 있다.

익산에 위치한 마룡지에는 근처에 살던 과부가 연못의 용과 관계해 아이를 낳았다는 전설이 내려온다. 그렇다면 익산은 예로부터 연꽃의 고장이다.

 

이 아이가 바로 서동, 즉 무왕으로 선화공주를 아내로 맞아 왕위에 올랐다는 기록이 보인다. 삼국사기 속 '무왕이 왕궁 인근에 연못을 만들고 배를 띄워 노닐었다'는 기록도 보인다.

 

훗날 송시열의 둘째형 송시묵(1605-1672)166411월부터 166512일까지 익산군수로 재직했다. 그가 연못을 파고 그 앞에다 연()을 심었기 때문에 아우 송시도도 마찬가지로 물을 끌어다가 그 앞에다 연못을 만들고 아울러 그 연을 옮겨 심었다.

 

송시도는 1667년부터 1670년까지 익산군수를 역임했다. 연못은 '징벽(澄碧)'이라고 했다. '주자가 연꽃이 맑은 물에 비쳐있구나(芙蓉映澄碧)'에서 따왔다.

 

'우뚝 솟은 예쁜 연꽃

오래오래 맑고 푸르게 비추며 서 있네

다만 산위에 달이 밝아오면

차가운 이슬방울이 빛날까 걱정일세

 

亭亭玉芙蓉(정정옥부용)

逈立映澄碧(형립영징벽)

只愁山月明(지수산월명)

照作寒露滴(조작한로적)-<주자>연소(蓮沼)'

 

금마지엔 징벽지, 두지, 마룡지, 장재지, 학지, 따번지, 냉수지 등 연못이 보인다. 사은 소영복의 '십리에 핀 홍련의 장연(長淵)이란 시''고르게 펼쳐진 붉은 구름이 십 리 남짓이고 물가의 연꽃 천 송이 어지럽게 비껴 있다네. 작은 배에 술을 싣고 꽃 사이에서 즐기니 만약 곡강(曲江. 당나라 장안 곡강지)에 비유해도 차이가 없겠네'라고 나온다고 한다.

 

과거의 경우, 흉년을 만나서 보릿고개에 연명하려고 나무껍질을 벗기고 풀뿌리를 캐는 정경(情景)이란 그야말로 관행적으로 발생하는 풍속도였다. 작품은 바로 그런 풍속도의 한 폭이다.

 

익산지방은 다행히 큰 연못이 가까이 있어 연뿌리를 캐는 모습이 풍속도에 향토적 특색으로 담기게 된 바 그래서 '익주채련곡(益州采蓮曲)'이란 제목을 붙은 터다.

 

여규형은 1889년 익산으로 유배를 와서 10여 개월 정도를 지냈는데 이때 지은 시를 '익주집'으로 엮었다.

 

채련곡(採蓮曲)’은 원래 악부체의 하나로 널리 씌어진 제목이다. 당초에는 노동가요로 창작되었겠으나 뒤에는 대체로 유흥적인 기분에 젖어 낭만적인 것으로 굳어졌다. 그런데 여기서는 채련곡으로 이름 붙였으면서도 전혀 다르게 백성들의 생존을 위한 고달프고 강인한 이야기로 엮었다. 이 점이 채련곡으로 특이하다.

 

서민들의 삶이 팍팍하지 않는 세상이 하루 빨리 오기를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