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처럼 소설 ‘착호갑사 이필신’을 펼쳤다. 이는 호랑이를 주제로 한 이색적인 작품이다. 조선 시대에 호환(虎患)을 막기 위한 직책인 착호갑사(捉虎甲士) 이야기를 중심으로 하되, 한국 호랑이 멸절 과정에 대한 아쉬움을 담고 있다. 착오갑사는 호랑이를 잡기 위해 별도로 설치한 직종이다. 호랑이로 인한 인명 피해는 조선 건국초에 1년 동안 경상도에서만 수백 명에 이를 정도로 컸다. 따라서 호환(虎患)에 대비하기 위해 군대를 동원하는 일은 오래 전부터 있었다. 착호갑사는 말 그대로 호랑이를 잡는 사냥부대였다.
기록상으로 착호갑사가 가장 먼저 등장한 것은 태종 16년(1416) 10월이었다. 경상도 도관찰사 이은과 경력 은여림을 파직했다. 처음에 주인기·공계손 등이 경상도에 가서 ‘착호갑사’라고 거짓으로 칭하니, 이은이 병조의 이문을 상고하지도 않고 마음대로 군마를 조발해 주어 성주에서 호랑이를 잡았다. 이에 사건을 아뢰니 의금부에 명하여 은여림을 체포하여 그 까닭을 물어 파면하고, 주인기 등은 장 1백대를 때렸다. 착호갑사가 정식으로 조직을 갖추게 된 것은 세종대에 들어와서였다. 세종 3년(1421)에는 국왕을 호위하는 갑사와는 달리 별도로 착호갑사 정원 20명을 뽑아 조직을 갖추었다. 이들은 당번과 하번으로 나누어 활동하되, 호랑이 5마리 이상을 잡으면 시위갑사와 같이 승진을 시켜주었다. 착호갑사의 필요성이 커지면서 갈수록 그 인원이 점차 늘어나 세종 7년에는 80명, 세종 10년에는 90명으로 확대됐다. 그후 세조 14년(1468)에는 200명으로 늘어났고, ‘경국대전’엔 모두 440명으로 정해졌다. 착호갑사는 목숨을 내놓고 사나운 짐승을 제어하는 만큼 무엇보다 용맹성이 필요했다. 착호갑사의 입속요건은 〈경국대전〉에 의하면 ‘목전(木箭:무예시험용으로 화살촉을 나무로 만든 화살)을 180보에서 1개 이상 맞추는 것, 기사(騎射:말타고 쏘는 것)는 2번 이상, 기창(騎槍:말타고 창던지기)은 1번 이상, 주(走:일정 시간 멀리 달리는 능력시험에서 250보 이상 가는 것)·힘(양손에 각각 50근씩 들고 100보 이상 가는 시험) 가운데 1가지에 합격한 자를 취했다. 한편 선전창(先箭槍)·차전창(次箭槍:첫번째와 2번째의 창과 화살로 맞추는 것)으로 호(虎) 2구를 잡는 자는 취재시험을 면제하고 배속을 허락한다’고 되어 있다.
이 소설은 임진왜란 직전, 선조 어명을 받들어 전주 사고를 점검하던 이주찬은 충남 금산에서 무주로 넘어가는 성치산 고개에서 호랑이를 만난다. 호랑이에 대한 어설픈 공격으로 인해 일행 5면 중 2명은 현장에서 급사를 했고, 이주찬은 어깨를 호랑이에게 물리는 심한 상처를 입고 3개월의 투병 끝에 결국 타계한다. 호랑이는 우리 상고사의 고조선 건국신화에서부터 등장한다. 우리 조상들은 호랑이를 범이라는 애칭으로 부르기도 하고, 산신령(山神靈), 산군(山君), 노야(老爺), 대부(大父)로 높이기도 했다. 한반도에는 호랑이가 많았다. 먹이사슬이 튼튼한 산악지대가 국토의 70% 이상을 차지하기 때문인 것으로 추정된다. 백수의 제왕 한국 호랑이는 호돌이와 수호랑으로 그려질 만큼 한국인이 사랑하는 동물이었다. 그러나 이제 더 이상 한반도 자연환경에 서식하는 순수 한국 호랑이 개체를 볼 수 없다. 호랑이의 혼은 한국인의 무의식 속에 적지않는 영향을 미치고 있다. 내년은 임인년(壬寅年) 검은 호랑이의 해다. ‘산중군자(山中君子)’라 불리던 호랑이처럼 늠름하고 슬기로룬 한 해가 되길 기원한다./이종근(문화교육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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