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리장송(可李場宋)'은 전주 금상동 가소마을 출신 이상진과 익산시 왕궁면 광암리 장암마을 출신 송영구로 호남의 명문가를 나타내는 말이다.
전주 금상동의 '금상(今上)'의 의미가 '현재 왕위에 있는 임금'으로 원금상마을의 회안대군묘(조선태조 이성계의 넷째아들, 이름 방간)에서 생긴 이름으로 추정된다.
가소(可所)마을은 숙종때 우의정까지 지낸 이상진(李尙眞, 1614~1690)의 출생지로 알려져 있다.
젊었을 때 이상진은 하도 집안이 가난하여 끼니를 굶을 때가 허다했는데 한 번은 추석이 다가오자 노모(老母)를 위하여 쌀자루를 들고 이웃 마을에 사는 진동흘이라는 사람을 찾아갔더니 진동흘이 말하기를 “ 비록 지금은 곤궁할지라도 장차 크게 부귀하실 것이니 조금도 걱정 말고 열심히 공부하시오.” 하고 극진한 대우를 하는 것이었다.
그래서 그것이 인연이 되어 그 후 친분이 두터워진 그들은 진동흘이 이상진의 노모와 살림살이를 맡고 이상진은 서울에 올라가서 과거 공부를 한 결과 마침내 이상진은 대과(大科)를 하여 벼슬이 정승에 이르렀다.
이상진의 영달이 진동흘의 은덕이었으므로 정승이 된 이상진은 진정으로 전동흘에게 벼슬하기를 권했지만 진동흘은 굳이 사양했다. 한 번은 이상진의 집에 경사가 있어서 대신들이 모두 모였더. 그 자리에 진동흘을 불러 앉히고 이상진이 말하기를 “ 이 사람이 바로 나의 둘도 없는 친구이며 은인인 진동흘이오. 비록 지금 벼슬자리는 없지만 지식과 재주가 뛰어나고 의리가 태산처럼 무거워서 나라의 큰 재목이 될 인물이니 부디 모두 잊지 말아 주시오.” 했다.
모든 대신들도 진동흘의 인물을 알아보았고 따라서 진동흘은 곧 무과로 나아가서 선전관을 거쳐 통제사까지 지냈다.
진천송씨의 선산 소나무들은 표옹(瓢翁) 송영구(宋英耉, 1555∼1620년)의 며느리 가운데 남원의 삭녕최씨 집에서 시집온 며느리로부터 연유된다.
남원의 삭녕 최씨라면 훈민정음을 언해하고 용비어천가를 주해한 최항(崔恒, 1409∼1474)의 후손들을 지칭한다. 송씨 집으로 시집갈 때 친정아버지인 최상중(崔尙重)이 딸에게 물었다. “시집갈 때 무엇을 주면 좋겠느냐?”. 그러자 그 딸은 “변산 솔씨 서말만 주세요”라고 했다. 표옹(瓢翁) 송영구에게 며느리가 새로 들어왔는데, 그 친정 역시 변산(邊山)의 내노라하는 집안이었던 모양이다.
조용헌박사의 말을 빌리면, 며느리 친정에서는 딸 셋에게 각기 유산을 물려 주었다고 한다. 큰딸에게는 엽전 한 말을 주었고, 둘째 딸에게는 중국의 명품 벼루 단계연(端溪硯)을, 셋째딸에게는 변산의 소나무에서 채취한 솔씨 서 말을 시집갈 때 혼수품으로 주었다.
엽전 1말을 원한 큰 딸은 임실군 삼계면의 경주 김씨 집안 며느리로, 이 큰 딸의 후손들 중에는 큰 부자가 많이 나왔다고 한다. 둘째 딸은 대사헌을 지낸 노진(1518~1578)의 손자며느리로 이후 가문이 더욱 번성했다. 이때 상으로 받은 벼루는 가보가 되어 노진을 모신 남원의 창주서원에 보존되어 있다. 변산 솔씨 서말을 원했던 셋째 딸은 익산 진천송씨 집안으로 출가했다. 부군은 단성 현감을 지낸 송흥시(1586~1649)라고 전한다. 이 송흥시의 아버지는 ‘표주박 늙은’이란 호를 가진 표옹(瓢翁) 송영구였다.
이상진은 신분이 귀해진 뒤에도 끼니가 자주 떨어졌다.죽을 때까지 한 채의 집조차 없었단다. 옷이나 이불은 단지 몸만 가리고자 하였다. 부서진 창문과 너덜너덜해진 깔개를 남들은 견디지 못했으나 그는 편안하게 여겼다. 빙벽(氷壁)은 평생 청백한 삶을 산 그의 상징이다.
1593년, 송강 정철이 명나라에 사신으로 갈 때 사절단으로 간 표옹 송영구가 중국의 백련(白蓮)을 처음 들여와 익산시 왕궁면 광암리 장암마을과 완주군 봉동읍 제내리 우산마을 등에 연지(蓮池)를 만들었다.
봉동의 진천송씨 우산종중(송정공파 충숙공후손 종친회) 논 2천여 평에 백련을 꽃피우게 됐으며, 왕궁면 광암리에도 백련이 심어져 있다. 때문에 그는 조선 중기 ‘백련거사(白蓮居士)’라고 불리워졌다.
바로 이때 선생은 명나라 주지번을 만난다. 지금의 망모당(望慕堂)이란 편액은 훗날 명나라의 사신 주지번이 직접 이곳까지 방문, 새긴 것으로 스승과 제자 사이의 사랑과 믿음이라는 의미를 지녔다.
불의엔 왕께도 굽히지 않는 소신. 절조와 덕망은 이들의 눈귀에 남아 후세의 본보기가 되고 있는 가운데 '가리장송'이란 말을 낳게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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