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딸들은 제사를 거행하지 않는 대신 재산상속에서 아들의 3분의 1만을 받게 하라'
한국학중앙연구원 출판부가 펴낸‘조선시대 제사승계의 법제와 현실(지은이 정긍식)’에서 1669년에 부안 김명열이 동생들과 작성한 상속문서를 통해 이같은 사실이 밝혀졌다.
지은이는 한국 사회의 가부장제를 관통하는 핵심인 제사승계가 이제 역할을 다하고 마감된 것으로 본다. 2008년 호주제가 폐지되면서 가계계승은 법적인 근거를 잃었지만 제사의 관행은 계속되고 있다. 조상제사를 전통으로 믿는 세대와 형식화를 비난하는 세대 간의 갈등, 남계 위주의 제사를 둘러싼 남녀 갈등으로 인해 조상제사의 문제는 여전히 현재형으로 남아 있다. 이 책은 한국 사회에서 제사의례와 가부장제의 의미를 반추하여 제도적 정의와 관행의 현실 간 간극을 줄이는 데 도움이 될 터이다.
특히 부계가족 중심의 제사승계 법제가 도입, 적용, 확산되는 과정을 통시적으로 살펴본다. 부계와 모계를 모두 중시한 고려에는 제사를 특정인이 주재하게 하는 관행이 없었으나, 고려 말 이후 '주자가례'와 가묘제가 도입되면서 제사승계인을 적장자로 확정하려는 법적인 시도가 이루어졌다. 조선 초에 이첨은 “국가의 기강을 확립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가정에서는 종법을 실시, 가족 질서를 확립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때까지만 해도 일부다처제가 묵인되어 처첩과 적서가 구분되지 않아 종자를 결정할 수 없는 사정이 있었기 때문에 사실상 종자법을 시행할 수 없었다. 1390년 '사대부가제의'에 따라 장자봉사의 원칙이 규정되었으나, 장자승계의 원칙이 현실에서 그대로 적용될 수 없는 경우도 있어서 차자가 제사를 승계하는 형망제급, 손자가 제사를 승계하는 대습상속, 첩자가 봉사하게 하는 첩자봉사, 타인의 아들을 양자로 들여 봉사하게 하는 입후봉사 등 예외적인 상황에 적용할 규정들을 보완해 나가야 했다.
하지만 오랜 시간을 두고 뿌리내린 관습은 쉽게 바뀌지 않았다. 제사승계의 기본 골격은 '경국대전'(1485)에 마련됐지만 16세기 중엽까지도 제사를 가계계승보다 사후봉양으로 여기는 관념이 강해서 여러 자녀가 돌아가며 제사를 주재하는 윤회봉사나 딸과 사위, 외손 등에 의한 외손봉사, 노비에게 제사를 맡기는 묘직봉사의 관행이 일반적이었다. 이는 혼인 후에 남자가 처가살이를 하는 솔서혼속에 토대를 두고 있었다.
지은이는 16세기 중엽 혼속이 솔서혼속에서 반친영례로 바뀌고 사위가 처가에 거주하는 기간이 단축됨에 따라 개인의 삶이 변하고 사회의 저변이 달라졌다. 혼인을 통한 가문의 결합으로 부계친족집단이 향촌사회에서 결속할 수 있는 계기가 마련됐다고 했다.
특히 이같은 현상은 1669년에 전라도 부안의 김명열이 동생들과 작성한 상속문서에 잘 나타나 있다. 김명열은 ‘아들딸들이 제사를 윤회봉사하는 것은 관례이지만 이는 예법에 맞지 않고, 또 사위와 외손이 제사를 정성스럽게 지내지 않으니, 앞으로 우리 가문에서는 아들들이 제사를 지내며, 그 대신 딸들은 재산을 아들의 3분의 1만 상속하라’라고 유언했다. 즉, 딸들은 제사를 거행하지 않는 대신 재산상속에서 아들의 3분의 1만을 받게 하는 차별상속의 원칙을 세웠다.
반(半)친영례의 등장으로 사위와 처가의 정이 옅어지고 이에 따라 딸들과 외손이 제사에서 배제되면서 재산상속에서 차등상속을 받게 된 것이다. 나아가 조상과 후손에 대한 계보 의식에도 영향을 끼쳤다.
18세기 이후 제도적으로 정비된 제사승계 법제가 사회 전반으로 확산되기 시작했다. 제사승계는 역사적 과정을 거쳐 한국적 가부장제로 자리 잡았다. 일제강점기에 이 제도와 관습은 순풍양속인 ‘전통’으로 인식됐고, 이 전통은 1958년에 제정되어 1960년부터 시행된 민법의 ‘가’와 ‘호주상속’에 정착됐다.
그러나 1990년 민법 개정으로 가부장제가 완화돼 제사의 기능은 가계계승에서 사후봉양으로 수백 년 만에 되돌려졌다. 2005년 헌법재판소의 결정과 민법 개정으로 제사승계 내지 가계계승은 역사의 뒤편으로 사라졌다. 2008년 대법원 판결로 제사에서 가계계승의 의미는 완전히 폐지됐다.
지은이 정긍식 서울대학교 법과대학 교수는 전통시대 법에 대한 부정적인 인식을 극복하고 법을 통해 당대인의 삶을 객관적으로 들여다보는 작업을 이어오고 있는 국내 대표 법사학자이다. 그는 “제도와 관습은 시대적 과제를 해결하기 위해 나타나 역사의 주체인 인간에게 자유와 풍요로움을 가져다주지만, 시대적 소명을 다하고 나면 활기를 잃고 인간을 억압하며, 다시 새로운 제도나 관습을 태동시킨다.”고 했다./이종근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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