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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북스토리

전주 모래내

전주에는 5대 시장이 있다. 전주부성의 정문인 풍남문 앞쪽에 오랜 전통을 자랑하는 남부시장이 있고, 태평동의 중앙시장, 경원동의 동부시장, 인후동의 모래내시장, 효자동의 서부시장이 그것이다. 나는 안골에서 가까운 모래내시장을 자주 간다. 모래내는 기린봉 북쪽으로 흐르는 실개천이 도매다리와 작은 모래내를 거쳐 모래내다리, 진밭다리로 이어지면서 유속이 느려 모래가 많이 쌓인다고 하여 붙여진 토박이 이름이다. 모래내는 건산천으로 노송천을 품고 전주천과 합류한다. 전주시 동부권의 개발로 안덕원로 4차선이 만들어진 뒤 교통난 해소를 위해 하천을 덮어 지금은 모래와 다리는 볼 수 없고 이름만 남았다.

기린봉 뒷 기슭이 원천인 사천(砂川)은 전주의 외곽지대를 돌아 흐르다가 진북동 북방에서 본류와 합류하고 그 상류에서 삼천과 합류된다. 그런데 기린봉 계곡에서 흘러 내려오는 도중에 모래가 많이 쌓여 모래내라고 했으며, 1935년 교량을 만들고 모래내다리라고 했다.



전북지역] [도시와 삶 그리고 생명 전주천]모래내 - 복개하천 신음소리 
    
 ‘모래내는 오늘도 찰랑찰랑 흘러간다. 어디선가 냇물에 뿌려진 노란 은행잎이며 붉은 갈참나무 낙엽들이 근처의 돌에 부딪치며 떠내려간다. 그것들은 아주 먼 여행을 할 것이다. 나도 언젠가 기회가 온다면 모래내를 따라 끝없이 내려가 보고 싶다. 그것은 내 꿈이기도 하다. 끝없이, 참으로 모래내가 끝나는 곳까지…. 그곳은 어디일까.’(이병천 중편소설 ‘모래내 모래톱’ 중에서)


1950∼60년대 전주 모래내를 배경으로 한 이 소설에는 반데미와 진버들, 마당재와 공동산, 해방촌과 진밧뜸 사람들이 살고 있다. 당나귀로 술 배달하던 마부와 큰 다리와 작은 다리 중간에 살던 군수 할아버지, 비지 한 뭉텅이를 떼어주던 금암리 두붓집 주인 아주머니, 벽돌공장에서 일하며 무개화차(無蓋貨車)를 밀던 교도소 죄수들, 그리고 곰배팔이 덕수 삼촌……. ‘신방죽’ 위로 드문드문 과수원도 있었다.

‘모래내 일대의 자랑’이었던 그 과수원은 매년 봄이면 하얀 배꽃과 사과꽃으로 그늘을 드리웠고, 날아온 꽃잎들은 모래내를 따라 하얗게 흘러갔다. 달빛도 하얗게 부서지던 방천길. 그 길을 따라 걷던 아이들은, 저 모래내는 어디까지 쉬지 않고 저렇듯 울면서 가는 것일까, 생각했다.


모래가 많아 ‘모래내’나 ‘사천(沙川)’이라 부르는 이곳의 행정 명칭은 ‘건산천’이다. 전주천 작은 지류 중 하나인 건산천은 ‘저녁이면 언제나 노란 달을 토해 놓는’ 기린봉 북쪽 기슭, 선린사에서 발원한다. 인후동을 지나 서쪽으로 시가지를 통과하고, ‘야깡’이라 불리는 진북동(수협공판장) 옛 한진고속 정류장 부근에서 노송천을 합한다. 백제교에 이르러 전주천에 합류한다.

지난 9월 25일, 건산천을 거꾸로 따라 올라갔다. 백제교, 진덕교, 숲정이교, 기름이 둥둥 떠다니는, 건더기가 있는 건산천 하류. 복개 종점부터였다. 소설가 이병천은 ‘모래내 모래톱’을 통해 ‘모래내 방천길을 걸어가며 코를 팽팽 풀어내도 모래내는 언제나 맑게 흘러갔다’고 했던가. 그 맑던 물빛. 그러나 그 곳 건산천은 고여 썩어가고 있었다. 온갖 쓰레기와 오물들이 시커멓게 떠내려오는 폐수. 물은 흙빛보다 더 어두웠다. 천(川)이 아니라, 유로연장 5.25㎞ 중 4.19㎞가 복개된 터널을 지나오기 때문이다. 오수와 하수로 곳곳은 멍이 들었고, 햇볕이 차단된 냇물은 병이 들었다. 875m의 미복개 구간도 마찬가지였다. 하천변은 온통 흐트러진 잡풀들로 덮여 있었다.

아파트 단지와 상가, 주택가, 시장, 주차장 아래를 숨죽이며 내려온 건산천 냇물은 햇볕을 찾은 순간, 아우성치며 쏟아져 나왔다.

숨을 쉬지 못하는 건산천은 전주천·삼천과 합류해 만경강으로 이어지고, 서해에 다다를 것이다.

기린로와 금암교, 작은 모래내교, 진밭다리, 노점시장, 기린초등학교, 아중리의 주택가와 상가, 아파트단지, 기린봉, 이처럼 5시간 가량 건산천을 거슬러 쫓았다. 맨홀 뚜껑을 통해 물소리를 듣고, 동전크기 쇠창살 같은 틈으로 검은 물을 바라보면서 하천을 기억했다.

그러나 소설에 묘사된 풍경과 흔적을 찾는 일은 쉽지 않았다. 진버들 버드나무는 사라졌으며, 징검다리가 있던 곳은 새 길이 나면서 다리가 놓였고, 냇가가 복개되면서 다시 아스팔트 도로가 되었다.

기린로에서 작은 모래내교까지 이르는 곳에는 2∼3년 사이 새로운 풍경이 생겼다. 무슨 무슨 절이나 암, 천상장군·선녀신당·도사신령·산신선녀 등의 간판을 달고, 붉은 깃발을 대나무에 매단 집들이다. 작은 모래내 부근, 전주농고로 가는 일방통행 길에도 점집이 여러 곳이다. 박전규씨(75·전주시 금암동)는 ‘10여년 전까지만 해도 징검다리가 있었던 곳’이라며, 씁쓸한 미소를 지었다.

동행한 전주의제21 신진철 사무국장은 내내 ‘복개된 하천을 복원하기 위한 종합적이고도 장기적인 청사진이 필요하다’며 말을 이었다. ‘하천복원이 단순히 콘크리트를 걷어낸다고 해결되는 문제가 아니고, 주변 재래시장 및 주민들의 생계문제가 연계되어 있고, 유역 내 토지이용 문제까지도 꼼꼼히 검토해야 하기 때문에 결코 만만치 않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길을 걸으며 만난 주민들은 온통 ‘복개 찬양론자’들뿐이었다. 복개되지 않은 숲정이교 부근에서 만난 주민들은 ‘모기 때문에 못 살겠다’며 ‘복개 좀 해 달라’고 호소했다.

6∼7년 전 복개된 인후동 도덕1길에서 만난 아주머니들은 ‘복개가 되어서 천만다행’이라고 이구동성이었다. 아직, 서울 청계천처럼 ‘복원의 미학’을 느끼기 보다, 주차문제로 이웃과 싸우지 않는 것이 더 중요한 그들의 ‘생존’을 탓할 수는 없는 일이다.

팽나무3길과 구건산2길을 걷다 반가운 상호를 만났다. 선술집의 낡은 간판 ‘버들집’. 괜시리 버들집일까? 생각해보니 건산천과 모래내의 흔적은 도처에 있었다. 건산천경로당, 모래내그릇집, 모래내동물병원, 모래내다방, 모래내떡전문점, 모래내축산시장, 영생건강원모래내, 모래내집수리, 진버들세탁소, 진버들노래연습장…….

아련한 기억 저편. 이런 풍경을 타고 건산천, 모래내는 시름시름 앓고 있었다. 신음소리를 내며 흐르는 듯 멈춘 듯 머뭇거리고 있었다.

모래내의 물살에도 가을이 깊어지기를, 찬란한 가을 햇살을 바로 볼 수 있기를…….

최기우(극작가·최명희문학관 기획실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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