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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북스토리

전주 도마(구수)다리와 두간다리


  




전주 인후동 모래내에서 서낭댕이를 지나 진안으로 가는 길과 만나는 곳에 도마다리가 있었다. 지금은 하천을 복개해 사라진 인후교라고 알고 있는 이 다리는 모양이 소의 구유 모양 같다고 해서 오가는 사람들이 구수다리라고도 부르던 곳이다. 이야기의 연원은 고려 중엽 부유했던 놀씨 문중으로부터 비롯됐다. 놀씨는 이웃에 베푸는 데 인색해 인심을 잃었다. 그가 부자가 된 것은 선산이 소가 여물을 먹기 위해 엎드린 모습과 닮은 곳에 위치했기 때문이다. 이를 끊어버리면 가난해질 것이라 여긴 한 선승이 '도마다리'를 '구수다리'로 부르게 만들었다.
지금으로부터 800여년 전, 조셋(현 草浦)마을에 사는 경주 김씨 문중은 수대를 이은 부자로 떵떵거리며 살고 있었으나 인심이 가마귀 욕심이라 가난한 이웃을 돕기는 커녕 표독스럽기만 했다. 대자대비한 부처님의 자비를 내려 주려는 스님들을 박해하는 고약한 청년들의 버릇을 고쳐 주기로 마음을 작정한 옥동자 스님은 김씨 문중 선산을 두루 살펴본 즉 기린봉에 연결된 와우항(臥牛亢) 허리에 6기의 김씨 선조의 묘가 안장되어 있는 것을 보고 역시 명당 자리에 묘를 쓴 덕으로 부자로 살고 있음을 알게 됐다. 마을로 내려와 주변을 살펴본 즉 구수(구시)다리라고 불리는 다리가 있어 이의 명칭을 바꾸면 액을 당하리라고 판단하고 도마다리라고 하기로 했다. 도마다리라고만 하면 허리가 잘리듯 명당과 마을이 떨어지는 것으로 예견한 스님은 구수다리 옆에 쪼그리고 앉아 다리를 건너는 행인에게 동전 한냥씩을 주면서 “도마다리 잘 건넜구나” 라고 한 마디씩 하라고 일러주었다.

문중 회의를 연 김씨촌 노인들은 집집마다 돈을 거둬 구수다리에서 큰 잔치를 벌이면서 인근 주민들을 초청했다. 완산부성 내의 사람들은 소문을 듣고 너도나도 많이 몰려 배불리 먹고 돌아간 것까지는 좋았으나 “역시 도마다리라고 하면 먹을 것도 생기니 앞으로도 도마다리라고 해야겠구나” 했다니 조셋마을 김씨 문중은 놀라 자빠지고 말았다. 그러자 놀씨 문중이 가난해졌고 마을 사람들은 할 일이 없어지자 마을을 다 떠났다는 이야기다. 이후로 도마다리는 더욱 유명해졌다.
“우리 사는 곳에 붓내마을(붓으로 그려놓은 것처럼 흘러가는 천)이나 두간다리(이몽룡이 한양 올라갈 때의 길목), 구석기 유적들이 있다는 걸 몰랐지요?”
전주시 송천동은 고고학적으로 명당터다. 전주천 물길이 넘치게 흐르고 적송이 울창하다. 건지산은 지금도 사시사철 시민의 사랑을 받고 오송제는 원시생태를 고스란히 간직하고 있다. 송천동 유적지에는 청동기시대와 원삼국시대 주거지가 있다. 두간다리를 거쳐 팔학마을과 사근리 구석기 유적지를 돌아보는 길은 한나절로는 부족하다. 두간다리는 이몽룡이 한양에 올라갈 때의 길목) 등 무수히 많은 다리들이 흔적도 없이 모습을 감추고 있다.
전주에서 가장 오래된 다리는 1931년에 놓인 안행교와 인후교다. 안행교는 연장 6.1미터, 폭 11.1m, 높이 3.1m로 국도1호선 목포와 신의주를 연결하는 다리다. 인후교는 연장 8m, 폭 5.5m, 높이 3m의 크기다. 원래 안행동은 구한말 전주군 우림면 지역이었다. 1914년 우림면 송정리, 1935년 완주군 우전면 송정리, 1957년 이래 전주시 효자동에 편입됐다. 선너머에서 예수병원을 지나면 서부우회도로 선너머 네거리를 만난다. 선너머 네거리에서 이동교 완산구청 쪽으로 내려오면 지금의 완산구청 앞 동네가 안행동이다. 예수병원을 넘어 이동교까지의 신작로가 생기기 전까지 이곳은 강당재를 넘어 곧장 내려오는 길로 드나들었다.
강당재를 넘어서 곧장 내려오면 오두리, 오두리 방죽을 지나 안행동이다. 안행동 앞으로 난 길로 내려가면 연이어 쌍룡, 신봉. 하리, 이동교로 이어진다. 안행동은 유연대에서 서쪽으로 뻗어내린 산자락을 배경으로 남향으로 자리를 잡은 마을이다.
‘안행(雁行)’이란 말은 기러기의 행렬이라는 뜻으로 남의 형제를 높여 부르는 말이기도 하다. 표준어로는 ‘안항’이라고 발음한다. 어떻든 행정명칭으로 그리고 지명으로 굳어진 안행과 안항은 다른 의미겠지만 기원적으로는 기러기의 행렬과 관련이 있는 것 같다. 대개의 경우는 인근 산의 지형이 기러기가 줄을 지어 날아가는 형국으로 추측할 수 있다. 지금 안행동 앞은 한 블록 넘어 새로 길이 나는데, 효자지구, 중화산동 택지개발 사업이 시행되던 1980년대 초중반 무렵의 일이다. 그 후부터는 신리 삼거리 지금의 안행교 사거리까지 나가야 차를 탔던 불편을 해소하게 된다. 오직 안행교만이 남아 그 역사를 반추하고 있다.
전주 남천교는 KBS 드라마 스페셜 4부작 ‘보통의 연애’에 모습이 드러나며, 전주천변 진북동 쌍다리 부근은 신구, 김수미의 ‘간 큰 가족’과 김혜수, 천호진의 ‘좋지 아니한가’ 영화가 촬영된 곳을 유명하다. 도마다리와 두간다리, 진밭다리 등 전주의 다리에 스토리를 입히는 노력이 부족한 현실이 참으로 안타깝다.


도매다리:진안쪽 가재미 마을앞 다리


 서낭댕이를 넘어 진안을 향해 가자면 기린봉에서 발원하여 은행다리목을 진나 가재미(마을이름) 앞으로 해서 흘러오는 개천(모래내 상류)에 놓여진 작은 다리를 도매다리라고 부른다.

 

  아주 먼 옛날에 모래내(사천-沙川) 중류변에 김씨 성을 가진 구두쇠로 명성을 날리던 큰 부자가 살고 있었다고 한다.

  장독에 앉았던 쇠파리가 장을 훔쳐 간다고 파리채를 들고 악을 쓰며 춤을 추듯 뛰는 일은 매일 있는 일이고 어쩌다 악명을 모르고 걸식을 바라는 거렁뱅이의 쪽박을 깨버리는 것도 다반사인 노랭이 였다고 한다.

  한 예로 스님들이 시주를 받으러 마을에 들르면 시주는 고사하고 콘주머니 전대를 머리에 묶고 물을 부으면 콩이 불어 머리가 쪼개질듯 아픈 대퇴고문을 하여 스님을 내쫓는 일들을 김씨 문중의 청년들은 업으로 알았었다.

 

  이러한 소문을 듣고 한 노승이 지나다 그가 사는 산동(山洞)을 내다보고 구두쇠가 발복(發福)한 연유를 알게 되었다.

  구두쇠의 선영(先塋)이 와우형(臥牛形)의 명당지였다.

  또한 안산(案山) 조산(朝山)앞이 구시(구수)혈로 크게 조화를 이루는 곳이었다.

  노승은 주장자를 짚고 구두쇠 문전에 당도하여 합장배례하고 공양을 청하니 난데없이 사오 명의 천년들이 우루루 달려들어 소문듣던 대로 수모를 당하였고 행장구마저 빼앗기고 물러나오게 되었다.

 

  그 노승도 깨친 도승(道僧)이었다. 안산(案山) 앞 실개천에다 펑퍼짐한 큰 바윗장을 날마다 놓고 어디로인가 나그네 길을 따라 수영수영 사라져 버렸다.

 

   그런 후로 구두쇠 집안은 시나브로 가세가 기울어 망햇다고 한다. 바로 이 노승이 실개천에 옮겨다 놓은 바윗장이 도매다리이다. 여기가 구시혈이었으나 구시 대신에 도마가 놓이게 되니 와우형의 명당이 맥을 잃게 됨은 자명한 일이 아니겠는가.

  

  이 졸부가 행한 업보에 응결된 도매다리 골에 대한 이야기는 전주인의 착한 인성을 좋아하는 맑은 마음씨를 말하여 준다. (유장우 선생 수상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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