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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종근의 행복산책

여산 권갑석 5주기 글

산처럼 보듬고(Like mountain),  물처럼 흐르다(Like water)

 

     산처럼 물처럼 살다간 여산(如山)’의 묵적(墨跡)

 

                                  이종근(새전북신문 문화교육부장)

 

1.안국사  ‘국중제일정토도량상징 문패, ‘산처럼(如山)’ 달다

 

 ‘참나(眞我)’를 찾아 떠나는 사찰은 수레바퀴처럼 유전하고, 그 속에 포근한 솜이불같은 구름이 터질 듯 연둣빛 잔치를 벌이고 있는 아침, 온통 하늘을 뒤덮은 춤사위의 장엄함에 그만 넋을 잃는다.

 이에 질세라, ‘하늘 담은가람 아래에서 하늘 닮은사람들의 가벼운 발걸음에 하얀 고무신도 목탁 소리에 맞춰 두 손 모아 자비의 가르침을 되새기잔다.

 무주 안국사의 품에 안겨보니, 시시각각 비워진 찻잔에 채워지는 찻물처럼, 헹군 입안에서 맴도는 차향처럼 오묘한 환희심이 가득차 이내 몸과 마음 이 솜털처럼 가벼워진다.

 느릿느릿, 여여(如如)히 다가서는 자세만이 자연과 산세, 주변의 풍광에 스며든 부처님의 사자후에 귀를 기울일 수 있고, 합일된 일원(一圓)의 세계로 이끌 터이다.

 ‘무욕의 나를 닦기 위해 일주문 앞에 서니 풀 한 포기, 이름 모를 꽃송이 하나마저 모두가 아름답지 않은 게 없어 나도 모르게 푸르르 떨린다.

 ‘하나의 기둥일주문(一柱門) 앞에서 세속의 번뇌를 벗어버리고 오로지 진리를 구하는 한 마음으로 들어올 것을 일깨운다. 이제, 나는 속세의 티끌로부터 완전히 벗어났는가. 이윽고, 일주문 정면에 1992년 강암 송성용선생이 쓴 적상산 안국사(赤裳山 安國寺)’라는 편액이 보인다.

잠시 후, 가람쪽 일주문 뒤의 편액엔 국중제일정토도량(國中第一淨土道場)’이란 낯익은 글씨를 통해 일상의 무거움 짐을 서서히 내려놓으며, 대바람소리며, 물소리며 새소리며, 나뭇잎 흔들리는 소리가 예전에 느꼈던 바와 사뭇 다른 느낌으로 다가온다.

1995년 코발트색 하늘가 아래에 물고기처럼 매단, 단아하면서도 고졸함을 잃지 않고, 웅장한 듯하면서도 따뜻한 필치가 우아함을 드러내는 이 편액의 그윽한 경지로부터 우리는 여산(如山) 권갑석(權甲石)선생의 묵적(墨跡)을 만난다.

 무욕의 세계로 이끄는 이 상징 문패가 솔향을 머금은 채 사바 세계의 중생들에게 안국(安國)’정토(淨土)’의 희망 비나리, 속삭인다.

 57정으로 넘쳐나는 이 세상에, 오늘 만큼은 우뚝 솟은 저 산(如山)이 바람처럼 구름처럼 (如風如雲) 살다가라 하네. 강물처럼 별빛처럼(如水如星) 흘러가라 하네.

 

 

 

2.‘삼산(三山)’의 기쁨과 이룬 성과, ‘산처럼(如山)’ 솟았다

 

 ‘지자요수 인자요산(智者樂水 仁者樂山)’

 이는 지혜로운 사람은 물을 좋아하고, 어진 사람은 산을 좋아한다는 논어 옹야편(翁也篇)에 나오는 말로, 지혜로운 사람의 부류에 속하는 이들과 어진 사람의 부류에 속하는 이들의 일반적인 성격과 행동 경향을 설명하고 있다.

 어진 사람은 의리를 편안히 하고 중후하여 옮기지 않는 것이 산과 같다. 그래서 산을 좋아한다고 하였다. 늘 자신과 하늘의 관계에만 관심을 두기 때문에 모든 가치를 위에다 두고 있다. 그리고 호기심이 적어 한 곳에 가만 있기를 좋아해 고요한 성격이 많다. , 마음을 가다듬고 물질적 욕구에 집착하지 않으니 오래 산다. 때문에 지혜있는 사람은 물처럼 움직이기 때문에 즐겁게 살고, 어진 사람은 산처럼 조용하기 때문에 장수를 하게 된다.

 선생의 삶은 바로 움직이지 않는 거대한 산과 같았다. 아니, 산이 높아 골짜기가 깊었는지도 모른다. 그래서 여산(如山)’이란 호는 바로 이 인자요산(仁者樂山)’에서 비롯되지는 않았을까.

 

 83세의 여산(如山)선생이 200768일부터 14일까지 전북예술회관 전시장에서 두 딸과 함께 가족 서화전을 개최했다.

 ‘삼산(三山) 가족서화전은 평소 가족전을 여는 것이 소원이었던 여산如山)선생의 뜻을 받들어 선생의 두 딸이자 서예가인 유산(裕山) 영수씨와 한국화가 안산(安山) 영주씨가 준비했다.

 영주씨는 당시 여든이 넘은 아버지가 혼자 회고전을 여시기에 버거워하시는 것 같아 이번 기회에 평소 아버지의 바람대로 부녀가 함께 서화전을 열기로 마음 먹었다고 말했다. 어렸을 때부터 아버지의 묵향(墨香)을 맡고 자란 두 딸은 자연스럽게, 여전히 아버지의 뒤를 이어가고 있다.

 영수씨는 퇴직 후부터 본격적으로 서예를 전공, 30년 넘게 한글 서체를 공부하고 있으며 아버지의 조언에 따라 한국화의 길로 들어선 영주씨도 현재 원광대학교에서 학생들을 상대로 강의를 하며 왕성한 활동을 하고 있다.

 3개의 산이 보인 이 자리에서 여산(如山)선생은 행, 초서의 한문 작품을, 유산(裕山)선생은 부드러운 서체와 향기로운 글귀가 있는 한글서예 작품을, 안산(安山)선생은 인물화 중심의 채색화를 선보였다.

 특히 이 전시는 여산(如山)선생의 한문과 유산(裕山)선생의 한글, 안산(安山)선생의 인물채색화 작품이 하나의 작품으로 승화되도록, 공동 작품을 시도하면서 각 산마다 갖는 특징과 함께 산이 가진 공통 분모를 잘 보여준 자리라는 평가를 받았다.

 

 전북은 예로부터 산과 같은(如山)’ 서예가들을 수도 없이 키워냈다. 일찍이 송일중으로부터 두각을 보여 온 이 지역 서단은 차분히 실력을 쌓고 세력을 갖추면서 이삼만, 서홍순, 전우, 이정직, 조주승, 이순재, 서홍순, 이광열, 최규상, 유영완, 김정회, 황욱, 송성용, 최정균, 권갑석선생에 이르기까지 한국을 대표하는 서예가를 배출했다.

 하지만 이 가운데 19세기 추사 김정희(1786~1856), 눌인 조광진(1772~1840)과 함께 삼필(三筆)’의 한 사람인 전북출신 창암(蒼巖) 이삼만(李三晩, 1770~1847)선생의 재조명작업이 부실하다고 판단한 여산(如山)선생은 창암기념사업회 회장으로 활동하면서 행운유수체(行雲流水體, 구름처럼 흘러가고 물처럼 흐르는 자연스런 글씨체)’가 빛을 볼 수 있도록 했다.

 “창암 선생님은 이 고장이 낳은 명필이죠. 야인이었고, 워낙 깊은 산골짜기에서 홀로 작업을 주로 해와 제자들이 많진 않지만, 그의 서예술은 보존할 만한 문화적 가치가 충분해요그래서 창암기념사업회를 꾸려 유묵첩 발간과 서예비 제막 등의 활동을 벌여왔다.

이같은 노력으로 인해 20021129일 전주 덕진 체련공원에 연비어약(鳶飛魚躍, 솔개가 날고 물고기가 뛴다는 뜻으로, 온갖 동물이 생을 즐김을 비유이란 이삼만선생의 서예비가 세워져 창암(蒼巖)의 글씨가 지금도 살아 꿈틀거리고 있다.

 

 여산(如山)선생은 산과 같은(如山)’ 스승 소전 손재형(1903-1981)선생을 만났다.

 소전의 스승인 무정 정만조와 성당 김동희선생은 또다른 산과 같은(如山)’ 원교 이광사선생에 뿌리를 두고 있다. 산이 크기 때문인가, 소전의 애제자는 원곡 김기승, 학남 정환섭, 해청 손경식, 무여 신경희, 강암 송성용, 남정 최정균, 우정 양진니, 동강 조수호, 평보 서희환, 여산 권갑석 선생 등 한국 서예를 빛난 별들로 가득 차 있다.

 

 여산선생은 익산 출생으로 전주사범학교를 졸업하고, 대한민국 미술전람회 입선 4, 대한민국 미술전람회 특선 4회를 거쳐 국전 제21회 서예부 최고상을 수상, 문화공보부장관상을 차지한 바 있다.

 그후 국전 추천작가, 초대작가, 심사위원, 국립현대미술관 초대작가 등을 역임하면서 국민훈장 동백장을 수훈하기도 했다. 대한민국서예전람회 운영위원장, 심사위원장, 한국서예연구회장, 창암기념사업회장 등을 역임했으며, 한국서가협회 공동의장과 고문 등을 맡기도 했었다.

 교사 시절, 본격적인 서예 공부를 시작한 그는 이같은 과정을 거치면서 한국 서단의 거목으로 성장했다.

교단에서 정년 퇴임하며 현역 생활을 정리한 지 오래된 시점에서는, 지금으로부터 40여년 전부터 손수 꾸려온 한국서예연구회를 통해 한중일국제서예교류전을 추진하는 등 못다 이룬 꿈을 일궈가기도 했다.

그는 또 신춘휘호대전과 한국서예대전 등을 통해 서예의 저변 확대에 많은 공을 들였으며, 전북서예교육연구회와 여산묵연회(익산), 묵향회(군산) 등을 통해 후학들을 길러내기도 했는데, 우암 이태중, 가천 심동식, 여송 김계천선생 등이 묵연회 출신의 제자다.

 그래서 그는 2002년엔 제10회 목정문화상 수상자로 선정되기도 했다. 한국서가협회 공동의장, 창암 이삼만선생기념사업회장 등으로 활동한 데 따른 수상인 셈이다.

 

 “서예는 붓으로 정성스럽게 쓰는 예술입니다. 조용히 앉아 먹을 갈다 보면 내가 보이고 또 글을 음미하다 보면 말할 수 없는 그 어떤 매력이 덥썩 나를 붙들곤 하죠. 더디 가는 길이 꼭 나쁜 것 만은 아닌 까닭이죠. 느린 만큼 깊이 더 헤아릴 수 있을 테니까 말입니다

 그래서 여산(如山)의 족적과 흔적들이 이곳저곳에서 때론 도도한 산이 되고, 때론 물이 되어 넘쳐나고 있다.

 전라북도 예맥(藝脈)의 도도한 흐름. 그 길은 넓고 길다. 때문에 디뎌온 길도 디뎌갈 길도 단단하다. 아니, 아주 느릿하고 느긋하다. 저 여산(如山)선생 처럼.

 

 3. ‘산처럼(如山)’ 융숭한 예술혼 지금도 살아꿈틀거린다

 

 생각하시라. 세월의 더께가 묻어나는 돌담길을 따라 자분자분 걷노라면, 고색창연한 어느 옛집에서 인자한 모습의 할머니가 버선을 벗고 달려나와 반갑게 맞아줄 것만 같은 환상을. 야생화들이 무리지어 앞다투어 쑥쑥 커 가면서 해맑은 웃음을 짓는다. 소낙비 젖은 안마당은 총기 서린 애국 지사의 눈동자처럼 더욱 반들거리고, 이끼는 파랗게 섬돌 위를 덮어 푸르름을 뽐내면서 정갈하게 매무새를 가다듬고 있다.

 한적한 당산나무 그늘 아래에 앉아본다. 지나가는 바람 소리가 아득하기만 한데, ‘오도독그 옛날의 눈깔사탕 하나 한입 물고 단내음을 음미하니 옛 일이 감미롭다. 시나브로 한 폭의 수채화처럼 고요히 자리잡은 마을 어귀에서 당산나무를 만나면 살듯한 풍경이 수묵담채화처럼 펼쳐진다. 그러나 세월의 흐름 속에 낙후와 쇠락의 길을 걷고 있는 전라도 완산(전주시와 완주군의 예전 명칭)의 영화가 그리워지는 오늘에서는.

 

한벽청연(최승범시인)

 

저 숲에서 오는

바람소리 물소리에

마음 가벼운

이 고장 선비들

한벽당 음률일 때면

이 내도 너울너울

푸른 가운으로

술잔에 어려들어

맑은 흥결 마낭

춤사위로 돋우웠다네

한벽당 저 날의 이 내

그리워라 오늘이여

 

완산8경의 하나인 한벽청연(寒碧晴烟)’은 전주천이 물안개를 일으키며 흐르는 모습을 옥류동 한벽당에 앉아 조망하는 청아한 풍경을 말하지만 추억 서린 새벽 이슬이런가.

 여산(如山)선생은 이같은 아쉬움을 떨쳐내고 미래의 희망을 담아 전주풍남제전위원회(현 풍남문화법인)가 출향 인사와 전주 시민들에게 보급하기 위해 만든 완산팔경병풍에 다가사후(허소라시인), 위봉폭포(이운룡시인), 한벽청연(최승범시인) 3점의 한글 서예를 휘호, 단아함과 역동적인 필력으로 독창적인 서체를 뽐냈다.

다가사후(多佳射帿)는 다가 천변 물이랑을 끼고 있는 활터(천양정)에서 무관과 한량들이 과녁을 향해 화살을 당기는 모습으로, 백설 같은 입하화(立夏花)가 나비처럼 날리고 삼현 육각(三絃六角) 선율에 기녀들의 노래와 춤사위가 함께 하는 일대 장관의 풍정을 집약한 풍경이 아니던가. , 위봉폭포(威鳳瀑布)는 인간이 보면 질투할까 봐 심산유곡을 돌고 돌다가 홀로 부서지는 위봉폭포의 비경을 폐허에 홀로 앉아 바라보는 풍경으로, 이들 작품을 통해 알싸한 완산의 풍경을 잘 보듬고 있다.

 원광대학교 박물관이 소장하고 있는 대작 백두산천지는 합작품으로, 현림 정승섭화백과 김삼룡박사의 시, 그리고 여산(如山)선생의 한글 서예가 서로 조화를 이루고 있으며, 정읍사비 글씨와 정산종사 빗돌(고은시인)도 한글 서예의 융숭한 멋과 힘찬 필력이 돋보이는 작품이다.

하지만 아무래도 그의 작품은 한문 행,초서의 곧고 우아한 서체의 필법 세계가 단연 돋보인다. 얼음장 위에 던져놓은 돌이 강 밑바닥에 닿을 때까지 얼마나 많은 시간이 흘러야 하는가. 익산 숭림사 일주문 편액를 비롯, 월출산 도갑사, 금산사 조사전, 실상사 천왕문, 오목대의 대풍가 등 작품마다 구증구포(九蒸九曝, 아홉 번 찌고 아홉 번 말리기를 거듭하다)를 통해 숙성되면서 동국진체(東國眞體)의 예술 세계가 뜨끈한 숭늉 누룽지처럼 펼쳐진다. 간간히 창암 이삼만과 원교 이광사, 소전 손재형선생의 흔적들이 필묵에 실어 또다른 울림을 줄때는.

 현림 정승섭화백이 문방사우를 그리고, 월전 장우성선생이 난을 치고, 여산(如山)선생이 한자로 제()를 했던 대작 부작란(不作蘭)’ 기명절지도를 보면, 특히 이같은 느낌이 강하게 든다.

여산(如山)선생은 만년에 이르기까지 연서의 자세를 흐트리지 않고 자신의 영역에서 독자성을 추구하며 일가를 이룬 작가다.

예서로 쓴 반야심경병풍이 선생의 대표작의 하나며, 행초서로 쓴 유여예(遊於藝), 행초서로 쓴 산고수장(山高水長), 향원익청(香遠益清), 귀원전거(歸園田居), 산중문답(山中問答), 그리고 마이산 등 작품이 수 없이 많지만, 특히 귀거래사(歸去來辭)’ 병풍은 더욱 선생만의 독특한 예술성이 돋보이는 가운데 탈속의 경지를 그대로 드러내는 듯하다.

3회 세계서예전북비엔날레(2001106~115) 본 전시에 선보인 행초서는 작품의 명제가 없지만 선생인 손수 지은 자작시, 지필묵과 함께 해온 사람으로서 평소에 가슴에 품은 서예 사랑과 향토애가 물씬 풍겨나기도.

 

 

 ‘명가들 글씨 잔치 이 나라에 열게 되니, 서기의 어우름이 푸른 하늘 가득하다. 우뚝해라! 높은 산에 흰 달이 휘황하고, 망망해라! 넓은 들에 미풍이 정동한다. 떠들썩한 티끌 세상, 스며오는 봄 기운에 황홀한 인간들의 들판놀이 한창이다. 사해 모두 하나됨에 나누는 정 무거웁고, 비노라니 나라마다 운수대통 영원하소서(번역)’  

 

 밤 사이 눈이 내려 온천지가 설국(雪國)이 된 모습을 보니 어느새 기분이 좋으며, 아무도 밟지 않은 눈길을 걸어보니 마음은 벌써 동심으로 돌아가고 있지 않는가.

 

 ‘눈 덮인 들판을 걸어 갈 때/마땅히 되는대로 어지럽게 걷지 마라/오늘 내가 남긴 발자국은 마침내 뒷사람의 이정표가 되리니. 답설야중거(踏雪野中去), 불수호란행(不須胡亂行), 금일아행적(今日我行蹟), 수작후인정(遂作後人程)’

 

고창 무초회향미술관이 소장하고 있는 선생의 행초서 답설(踏雪)’이란 시를 보면, 전체적으로는 정제되고 균형 잡힌 필의가 자유로우면서도 씩씩하고 변화가 풍부하다.

 특히 맑고 우아한 신체가 자연스러움에 합치하는 장법과 탁 트림이 있으면서도 전체적으로 깔끔히 정리되는가 하면 먹빛이 생생하고 풍만하면서도 매끄러운 맛이 드러나 보인다.

3회 세계 서예 전북 비엔날레에 선보인 특별기획전 천인천자문(千人千子文)’은 해,,,,전서 등 한문 5체가 망라됐다.

 이 천자문의 한 자()당 글씨 크기는 가로 세로 13cm, 16폭 병풍으로 크기가 20m에 달한 가운데 1,000명의 중견 서예가가 2개월 간에 걸쳐 천자문을 한자씩 써 모았는데, 첫 글자 하늘 천()’은 여산(如山)선생이 바로 그 주인공이 됐다.

 선생의 작품은 이처럼 단 한 자의 글씨, 또 한자를 쓰더라도 여러 체가 함께 들어있는 섬세함과 치밀함이 있고, 남의 입에 오르내리지 않았던 고졸한 선비의 올곧은 자세가 여과없이 고스란히 드러나면서 건강한 생명력을 더하기도 한다.

 그래서 감동과 메시지를 담아낼 수 없다면 명품이 될 수 없다는 생각으로 소천할 때까지도 작품에 매진하는 등 상락정진(常樂精進)’의 끈을 놓지 않았던 여산(如山)선생의 마음가짐과 예술혼은 오늘까지도 여전히 귀감이 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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