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채 인생 50년 방화선 선자장, ‘법고창신의 바람’ 솔솔
새전북신문 문화교육부장
부채와 50여 년의 세월을 함께 해온 방화선 선자장(전북도 무형문화재 제10호)이 낫으로 가늘고 긴 낭창낭창한 왕죽을 한웅큼 베어 왔다.
돌 하나 올리고, 별 하나 얹고, 바람 하나 얹고, 시 한 편 얹고, 그 위에 여름의 땀방울을 떨어 뜨려 소망의 돌탑 하나를 촘촘하게 쌓았다.
대나무의 파란 기상을 생각하며, 위안부 할머니의 가슴 뭉클한 사연을 심장 깊숙이 간직한 채 태극 하늬선을 만들었다. 왜 이렇게 눈물이 나는지, 참 알 수 없는 일이지 않나.
또, 곡두선 앞면에 무궁화를, 뒷면에 태극기를 담았으며, 하얀사 고운 백선에는 백의민족의 혼을 고스란히 담았다.
그는 하늘이 우리 선조들이 눈물을 너무 흘러서 파란색 인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더 진중하게 작업에 임했다.
“더위도 달래고 광복절의 기쁨도 나누면서 그 날의 함성을 같이 공유한다면 얼마나 좋을까요.”
부채는 바람을 타야 하고, 광복은 자유를 타야 함이 마땅할 터이다. 이 세상, 어디에도 아픔없는 독립은 없지 않나.
“오늘, 세계로 나아가는 한국인 모두에게 잘 될 것이란 희망 바람 '솔솔솔' 선물합니다. 우리는 자랑스런 대한민국, 나는 곧 당신입니다.”
이는 선생이 지난 8월 7일부터 9월 2일까지 전주부채문화관에서 '바람의 함성'을 주제로 전시하면서 가진 생각에 다름 아니다.
“바람에도 종류가 있습니다. 이를테면 에어컨 바람은 날카롭게 날을 세운 매섭고 서늘한 바람이고 선풍기 바람은 상대를 배려하지 않는 거친 성품의 바람입니다. 반면 부채 바람은 부드러운 미풍입니다. 단번에 땀방울을 식혀주지는 못하지만 은근한 바람결에는 상대를 배려하는 마음과 리듬이 있습니다. 누군가의 마음이 담겨 있는 부채라면 그 온기가 더없이 시원한 바람이 되어 부채 끝으로 전해집니다. 또, 부채의 바람은 재앙과 병을 몰고 오는 부정한 것들을 쫓는다는 뜻도 담고 있습니다. 무더위에 바람은 흐느껴도 부채 바람은 멈추지 말아야 하는 까닭입니다.”
“민족의 아픔을 부채살 하나 하나에 담으려 했다.”는 그는 한경필(1895-1959, 전주 부채 명인으로 일제때부터 활동)선생의 제자인 아버지 방춘근(1927-1998, 전 전북도문화재 선자장)의 계보를 이어 1965년부터 현재에 이르기까지 50 여년 동안 2대째 부채의 고장 전주에서 단선(태극선, 한지선 등)을 만들고 있다.
특히 2010년 전라북도 문화재 선자장으로 지정, 국내 유일의 여성 선자장 장인이 됐다.
지난 1990년부터 가나부채 연구실을 만들어 운영하고 있는 가운데 2002년 한국소리문화의전당에 상설체험장을 만들어 전주세계소리축제를 통해 국내,외에 부채의 우수성을 널리 알리고 있다.
뿐만 아니라 201년부터 2012년까지 전주시 평생학습센터에서 ‘한스타일 하는 학교 만들기 사업’에 참여해 초등학생과 고등학생, 일반 시민에 이르기까지 3,540명에게 부채제작 과정을 가르치면서 전통의 맥을 잇고 있다. 이와 함께 전주 풍남제, 무주 반딧불축제 등에 부채 관련 행사를 갖는 가운데 40여 회의 국내 전시와 국외 전시를 가진 바 있으며, 코리아 나라장터 엑스포 등 행사에도 참여해 전주부채의 긍지를 널리 과시했다.
“해방이 되면서 일본인 자본이 사라지고 중앙동이 발전하면서 부채 장인들은 이분 들을 주축으로 인후동의 가재미와 안골, 아중리의 석수리로 터를 옮겨 새로운 자본가를 중심으로 공방들을 형성하게 됩니다. 특히 가재미골은 그 때부터 부채골로 형성됩니다. 당대의 부채의 명인인 방춘근 선생과 이기동 선생, 엄주원 선생이 가재미에서 모두 터를 잡고 사신 것을 보면 알 수 있습니다. 바로 제 본적이 인후동 322 가재미골인 까닭입니다.”
최근엔 전주문화재단의 ‘전주한옥마을 전통창작예술공간 입주작가’로 선정돼 전주 한옥마을에 입주해 전통부채 아카데미 운영, 시민 체험 프로그램, 전통 부채 전시, 전통공예 학술활동을 견인하면서 부채의 전통을 잇는 한편 미학적 가치를 추구, 전주 부채의 재도약을 위한 선봉장에 서 있다. 현재 송민희, 송명환 등에게 기능을 전수하고 있다.
“전라감영에 소속되었던 선자청이 언제 사라졌는지는 정확히는 알 수 없지만, 아마도 단오선을 공납하는 제도가 필요 없어진 일제 강점기 전후였을 것으로 추측됩니다. 선자청에서 근무하며 부채를 만들던 ‘경공장’이나 선자청에 납품을 하던 ‘외공장’의 장인들은 일제 강점기를 겪으면서 선자청을 벗어나 지금의 전주 중앙동 에 터를 잡게 됩니다.
당시 중앙동에는 부채를 도매로 전국에 공급하는 중간상인 이였던 송지방(지금의 남문 근처)을 비롯, 삼화 상회, 무궁화 공예사 등이 자리를 잡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구전하는 60년대 이야기로는, 중앙동 근처에 비단 장사와 사복(부채를 고정하는 금속제 고리)을 만드는 곳이 있었고, 오거리에도 사복을 만드는 곳이 있었다고 합니다. 많은 사람들이 찾는 한옥마을 인근에 전주시가 ‘선자청’을 복원할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요.”
부채살에 비단이나 종이를 붙여 만든 둥근 모양의 그가 만든, 방구 부채는 접고 펴서 쓸 수 있는 합죽선과는 또 다른 전통미를 보여 준다. 선면은 둥근 것을 기본으로 하지만 주로 식물의 잎과 꽃잎의 모양을 응용하고 있으며, 장수와 구복을 바탕으로 한 십장생과 우주의 원리를 담고 있는 태극문양 등이 미적 가치를 더한다.
부채 자루의 조각 솜씨도 부채의 아름다움을 보여주는 또 다른 모습. 꽃봉오리나 줄기 모양을 따오거나 넝쿨이 올라간 복잡한 모양새를 맵시 있게 조각해 선면의 단순함을 보완하기도 한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서민들의 생활속에서 그들의 희로애락을 함께하며 방구부채가 일으키는 시원하고 선한 바람이 선조들의 넉넉한 웃음을 떠올리게 한다.
유물로 전하는 곱장원선, 까치태극단선, 방아실부채(듸림부채), 화엽선, 태극선, 세미선(통영의 부채)을 만들 줄 알며, 복원도 할 줄 안다. 또, 최근엔 곱장단선(옻칠), 곡두연엽선(채화칠, 옻칠), 곡두오엽선, 단청선녀선, 선녀선민화, 선녀선목어, 주칠오엽선, 선녀선주칠, 태극옻칠선, 알태극유지선, 목단알태극 등 무수히 많은 작업을 바탕으로 전통을 재현, 그 맥을 잇고 있다.
“어제는 전주 관왕묘(지방 문화재자료 제5호)의 ‘신장부채(관우를 지켜주는 부채라고 함)’를 제대로 재현하고자 이 곳을 찾아 품을 팔았습니다. 전국 곳곳에 숨어있는 부채를 전통 방식으로 살려내 햇볕을 볼 수 있도록 내 삶의 모든 궤적에 더욱 열정을 쏟고 싶습니다.”
그가 만드는 태극부채선의 경우, 대나무 선별 작업(2-3년생)부터 마디 자르기 등 자룻대 및 사복박기 등 48개의 과정을 거쳐 명품으로 태어난다. 특히 민가에서 사용한 단선은 물론, 궁중에서 약을 다릴 때 쓰는 듸림부채을 완벽하게 복원, 눈길을 끌고 있다.
선면의 위쪽이 넓고 아래쪽이 좁거나, 선면의 길이가 길어 오리발을 연상케 하는 ‘듸림부채’의 응용들을 통해 심미의식의 발현과 예술적 탐색의 징후들을 보여준다. 또, 옛 문살틀이나 목재로 만들어진 생활 용품들을 오브제로 사용해 이를 부채와 연결시켜 하나의 예술 작품으로써 독특한 미학도 선보인다.
‘당신이, 새롭게 우뚝 솟아오르는 태양과 같이 솟아오르는 대나무처럼 언제나 울울창창했으면 참 좋겠다. 당신이, 상현달처럼 모두에게 희망을 주고, 건지산처럼 영원히 오래 살았으면 참 좋겠다. 당신이 이지러지~도, 무너지~도 않는, 소나무와 잣나무처럼 무성히 행복하게 살았으면 참 좋겠다’
‘법고창신(法古創新, 옛 것을 가지고 있되 새로운 조류를 받아들이는데 적극적임을 의미)’ 의 바람으로 흥건한 가운데 그는 오늘도 ‘삼국사기’ 의 ‘견훤조’에 견훤이 고려 태조(재위 918∼943)에게 공작 깃으로 만든 ‘공작선’을 보냈다는 기록을 생각하며, 이를 제대로 복원할 부푼 꿈에 하루 해가 짧음을 속절없이 아쉬워 하고 있다. 그는 ‘더 열심히 파고 들고, 더 열심히 말을 걸고, 더 열심히 귀를 기울이고, 더 열심히 사랑하자’고 소곤소곤 속삭이고 있다.<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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