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에게 부탁하노니, 시간에 반항하지 않기를 바랍니다. 우아하려고 노력하지 않는 그대로의 모습이 더 좋아 보입니다. 젊어도 보았으니 늙어도 보아야 하지 않나요. 당신의 주름 하나하나마다 훈장처럼 당신의 아름다움이 묻어납니다. 앞으로 주름과 같이 살아가고자 다짐합니다. 꽃살문처럼 세월의 풍파를 고이 간직한 채로 말입니다. 내소사의 고풍스런 문창살은 장인들이 땀을 쏟아 하나하나 새겨 놓은 국화와 연꽃 문양들이 하나의 화사한 꽃밭을 이루고 있습니다.
온통 꽃밭 천지로군요. 그러나 그 꽃은 땅에 피어난 게 아닙니다. 창호(窓戶, 문)에 활짝 핀 꽃, 바로 문창살에 조각해 놓은 상징으로 영원히 시들 줄을 모르며 우리를 맞이합니다.깊은 밤, 꽃살에 붙은 창호지 틈새로 은은한 달빛이라도 새어들면 세속의 욕망은 소리 없이 흩어지고 금방이라도 해탈의 문이 열릴 듯 합니다.
아름다운 동화를 한 폭의 그림으로 옮겨 놓은 듯, 오랜 세월에 나무결이 빛바래 신비감을 더해주고 있네요. 똑같은 아파트에, 똑같은 창을 달고 사는 현대인의 품격은 어디에서 살펴볼 수 있을런지요.
"날씨가 추워진 뒤에야 소나무와 측백나무가 시듦을 안다”고 했나요? 요즘의 어수선한 정국을 보면서 추사 김정희의 ‘세한도(歲寒圖)’를 감상해 봅니다. '세한도'를 처음 봤을 때 한겨울의 스산함이 너무 강렬해 가슴이 철렁했던 기억이 있습니다. 썰렁한 배경에 늙은 소나무와 잣나무 몇그루 그리고 야트막하고 조그만 집 한 채만 덩그러니 자리한 한 폭의 동양화. 이 황량하고 메마른 분위기가 자아내는 고독한 정서는 무엇을 말하려 함인가요.
이는 김정희의 대표작으로, 1844년 제주도에서 귀양살이를 하고 있을 때 그린 것으로 그림의 끝부분에는 자신이 직접 쓴 글이 있습니다. 이 작품은 한 채의 집을 중심으로 좌우에 소나무와 잣나무가 대칭을 이루고 있으며, 주위를 텅 빈 여백으로 처리해 극도의 절제와 간략함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오른쪽 위에는 세한도라는 제목과 함께 ‘우선시상’, ‘완당’이라 적고 도장을 찍어 놓았습니다. 거칠고 메마른 붓질을 통하여 한 채의 집과 고목이 풍기는 스산한 분위기가 겨울의 분위기를 맑고 청절하게 표현하고 있습니다. 마른 붓질과 묵의 농담, 간결한 구성 등은 지조 높은 작가의 내면세계를 보여 주고 있습니다.
그는 영.정조 시절에 제주도에 유배를 가게 됩니다. 김정희 주변의 대부분 사람들은 그가 제주로 유배당하고 나서, 그의 권세 없음에 실망해 가까이 하기를 꺼렸습니다. 그러나 이같은 상황에서도 오직 제자였던 이상적은 김정희에 대한 존경과 애정을 버리지 않았으며, 오히려 더 굳건한 믿음을 보여주며 역관으로서 북경에 다녀올 때마다 귀한 서책들과 북경의 여러 지인들의 소식을 기꺼이 전해주었습니다.
이에 추사는 그의 은혜에 답하며 세한도라는 그림을 그려 주었습니다.‘눈보라가 치고 난 연후에야(歲寒然後) 소나무와 잣나무가 시들지 않는 나무라는 것을 알게 된다(知松栢之不彫)’ 작품 왼쪽에는 ‘논어’에 나오는 공자의 가르침과, ‘권세와 이득을 바라고 합친 자들은 그것이 다하면 흩어져버린다(以權利合者權利盡以交疎)’는 사마천의 ‘사기’의 구절이 불세출의 명필로 빼곡하게 쓰여져 있습니다.
한반도 남단의 외진 땅에서 추사가 청대의 지식인들에게 버금가는 19세기 최고의 국제 감각을 발휘할 수 있었던 것은 어쩌면 이상적의 우정이 있었기에 가능했던 것인지도 모릅니다.‘세한도’는 우리가 잊고 있던
이 덕목들을 새삼 일깨우는 측면이 있습니다. 맞아요. 날씨가 추워진 뒤에야 언제나 소나무와 측백나무가 시듦을 알 수 있습니다.
공양 중에 꽃 공양이 제일이라 했습니다. 자고로, 아름다움에는 국경이 없는 법.반드시 불자가 아니어도 그 지극한 마음에 걸음은 자연스레 멈춰지기 마련입니다.
단청의 화려함이 사라지니 오히려 꽃살문 자체의 수려하고 본 모습이 드러나군요. 누렇게 변한 나무의 속살이 고색창연함을 더해줍니다. 반드시 코로만 향기를 맡을 수 있는 것은 아니지요. 이제라도 나비가 내려앉을 듯 생생한 그 꽃송이 하나하나에선 향기가 묻어납니다. 세월이 많이 지났어도 나무의 화려함은 변화가 없는 것처럼, 은은하게 향기를 우려내는 꽃창살처럼, 아름다운 마음 고이고이 간직한 채 곱디곱게 늙었으면 참 좋겠습니다. 지금의 내 주름을 넓은 마음으로 헤아려주기를 두 손 모아 당부합니다. 사계절의 순환을 잘 따르는 당신이 진정한 멋쟁이입니다. 시간에 반항하지 않으면서 상춘의 느낌을 맛보러 마실을 가는 당신, 이 봄의 화사한 꽃들처럼 활짝 피어나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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