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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보훈옛그림

토림 김종현

 

 

 

 

 

 

 

 

묵향에 묻혀 지낸 화단의 야인(野人)
 
토림 김종현(土林 金鐘賢, 1913-1999)은 1913년 관찰사서리와 정읍 군수 등을 역임했던 양반집안의 3남으로 전북 정읍에서 태어났으며, 어려서 서당에 다닐 때 공부 대신 그림만 그리려 든다하여 할아버지로부터 회초리를 맞기도 했다.
보통학교를 다닐 때 미술 성적은 항상 최고(甲)였으며, 마침내 아들의 재능을 인정한 아버지의 배려로 18세 때 이당 김은호의 화숙에 입문하게 된다. 이당 김은호 문하에서 운보 김기창, 월잔 장우성 화백 등과 동문수학 했으며 동시기에 우리 지역에서 같이 활동한 벽천 나상목의 채색화와 쌍벽을 이룰 정도로 수묵산수화에 조예가 깊다는 평가를 받았다.
 1930년대 전북에서는 유일하게 선전(鮮展)에 입선했고 이후 국전(國展)에도 입선하는 등 전업화가로서 등용문도 거쳤지만, 그는 화단에 입문한 초년시절부터 중앙위주의 권위주의를 싫어해 이런 류의 미전에는 일절 출품하지 않았고, 곧 향리인 전주에 내려가 후진 양성과 창작활동에만 전념하며 재야작가로서의 길을 걸었다.
 그는 타고난 성품이 과묵하고 사교적이지는 못해 교우관계가 넓은편은 아니었다. 가까이 지낸 문화예술인으로는 신석정 시인과 김영창 화백, 배형식 조각가 등이 꼽힌다. 특히 신석정 시인과는 서정적취향 자연주의적인 예술관과 함께 권귀주위를 배격하는 인생관까지 상통해 자주 술을 들며 투터운 교유를 가졌고, 전주, 광주, 서울에서 시화전도 함께 했었다.
후소회 회원으로 활동하면서 전라북도 미술대전 초대작가 및 심사위원을 수차례 역임했으며, 전북문화상 등을 수상했다. 그는 전주시 경원동 자택 노령산방(蘆嶺山房)에 살며 고령에도 화필을 멈추지 않았고, 그저 화폭과 묵향 속에 묻혀 일상을 보냈으며, 1999년 2월 18일 오후 3시께 전북대병원에서 노환으로 별세했다. 향년 86세.
그의 자연주의적 화풍은 사계절의 실경산수화, 그중에서도 특히 설경을 잘 나타낸다. 스스로 설경을 특별히 좋아하는 것은 아니지만 그의 화실을 찾는 사람들이 유독 설경을 주문하는 경우가 많았다고 한다. 그의 설경은 눈에 덮인 나무의 모습이 세기에 신경을 쓰지 않은 질박성을 강하게 풍긴다. 한편 토림의 실경산수는 사실성이 두드러지고 화가의 목가적이고 전원적인 취향을 잘 나타내주는 화재를 선택하며, 대표적으로 금강산의 사계를 그린 작품이 대표적이다. 그는 작품의 품격이 거래되는 갑에 의해 매겨지는 풍토를 몹시 싫어해, 과묵한 그의 성품과는 달리 그림 인심이 후한 화가로 알려져 우리 지역에 작품이 많이 남아 있다./서보훈 A-옥션 전무이사

그림1. <산수 6곡 일지>, 종이에 수묵담채, 122 x 335 cm, 개인소장, -옥션 제공
그림2. <호조일성 (詩畵)>, 종이에 수묵담채, 31 x 92.5 cm, 개인소장, A-옥션 제공
그림3. <금강산 10폭>, 종이에 수묵담채, 130 x 32.5 cm, 1957, 개인소장, A-옥션 제공
그림4. <사계산수 8폭>, 종이에 수묵담채, 31.5 x 31 cm, 개인소장, A-옥션 제공
그림5. <풍경>, 종이에 수묵(방구부채), 50 x 55 cm, 개인소장, A-옥션 제공
그림6. <추경 8곡 일지>, 종이에 수묵담채, 126 x 339 cm, 개인소장, A-옥션 제공
그림7. <해경(합죽선)>, 종이에 수묵담채, 16 x 50 cm, 개인소장, A-옥션 제공
그림8. <춘경>, 종이에 수묵담채, 66 x 128 cm, 개인소장, A-옥션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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