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각적이고 실험적인 형태의 자연이미지
고화흠 (高和欽 1923-1999)은 전남 구례 출생으로 전주 사범학교를 졸업하고 일본 동경 녹음사화학교 회화과에서 본격적인 미술 공부를 시작했다. 광복 후 귀국하여, 목포에서 직장을 가지고 작품 활동을 하였으며, 1953년부터 어러 차례 개인전을 가졌다. 이어 1955년 서울로 직장을 옮기면서 국전에 출품하면서 작품 활동을 활발히 전개하였고, 1956년에는 창작미술협회 회원으로 활동하며, 대외적으로도 많은 일을 시작했다.
고화흠은 유화작업은 물론 수채화에도 많은 애정과 관심을 보탰다. 그는 1950년대 후반에 들어와 수채화라는 분명한 장르 이념 하에 ‘한국수채화협회’를 결속한다. 1956년 창립멤버로는 고화흠, 최덕휴, 이경희, 이규호, 이종무, 장리석, 유경채, 이준 등이다. 그러나 이와 같은 결속의 의미는 좋았으나 그저 같은 이념의 동조 그룹 의식으로 만났기 때문에 제대로 작 품활동이 이루어지지 않았다.
이들 중 국전 제 1회 때 수채화로 특선을 차지한 이경희와 고화흠만이 다작의 수채화를 발표했다. 친목적 성향이 강했던 한국수채화협회는 1957년부터 본격 미술단체로서의 체계를 갖추고 활동에 들어간다. 이후로도 왕성한 활동을 보이며 수채화의 개척과 새로운 조형언어로서의 깊이를 정기적인 전시를 통해 나날이 새롭고 진보된 수채화를 선보였었다.
"고화흠씨가 나보다 1년 선배요. 나는 강경상업고등학교 다닐 때 미술 선생님한테 배웠고, 고 선배는 일제시대 수채화 지도를 받았어요. 둘 다 어딜 가도 빠지지 않는 실력이었죠. 그런데 1980년인가…. 고 선배가 김용봉 선생이 수채화 그리는 게 어렵다고 하니까, 단체 하나 만들자 그러대요. '수채신작파전(水彩新作派展)' 이란 이름도, 글씨도 다 그가 만들었죠."
서양화가 전병하씨는 고 고화흠 원광대 교수가 전북 수채화의 모태가 됐다고 기억했다. 그가 아니었으면, 수채화는 언제까지나 유화의 밑그림으로 여겨졌을 법도 했다. 서양화가 이형구씨도 고씨의 갑작스런 죽음을 안타까워했다.
"저는 장수하실 줄 알았어요. 예술원 회원이 못되신 게 너무 안타깝죠. 1998년부터 전남을 시작으로 경북·남, 서울 작가들이 이곳에 들어왔죠. '제2의 전성기'를 보는 것 같았습니다." 고화흠의 작품세계는 색채의 조화와 자연이미지를 강조한 자연주의에서 출발했지만 점차 감각적이고 실험적인 형태 해석을 거치면서 구체적 이미지가 없는 서정적인 추상 경향에 도달했다. 원광 대미술대학장을 역임하는 등 미술교육의 수장으로서도 중요한 몫을 담당했던 그는 1961년과 1971년 국전 추천작가와 심사위원을 역임하고, 1988년 국민훈장 모란장을 수상했다./서보훈 A-옥션 전무이사
그림1. <우후도교>, 종이에 수묵담채, 51 x 29 cm, 개인소장, 남농 허건 合作, A-옥션 제공
그림2. <풍경>, 종이에 수채, 38.5 x 54.5 cm, 개인소장, A-옥션 제공
그림3. <K양>, 종이에 수채, 29.5 x 30 cm, 1992, 개인소장, A-옥션 제공
그림4. <여인>, 종이에 수채, 36 x 27 cm, 1974, 개인소장, A-옥션 제공
그림5. <장미와안개꽃>, 캔버스에 유채, 53 x 45.5 cm (10), 고창판소리박물관 소장
그림6. <백안92>, 캔버스에 유채, 133 x 133 cm, 1992, 국립현대미술관 소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