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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보훈옛그림

석지 채용신<1>

전북서화의 맥<25> 석지 채용신<상>


-고종의 어진을 그린 당대 최고의 어진화사

 

 

 

 

 

 

 

석지 채용신 (石芝 蔡龍臣)은 평강 채씨(平康 蔡氏)로, 1850년 2월 4일 서울 삼청동에서 태어났으며, 1941년 6월 24일 92살의 나이로 전북 정읍에서 생을 마감했다.
석지의 본명은 동근(東根)이었고, 아명(兒名)은 용덕(龍德)이었다. 용신(龍臣)이라는 이름은 1886년 그가 무과시에 급제하면서부터 사용했다.  이번호는 그의 생애에 대하여 주로 알아보았으며, 다음 2부에서는 그의 작품을 주로 알아보기로 한다.<편집자 주>

 그의 조상은 본디 전주(全州)와 익산(益山)등지에서 살았다고 한다. 그도 을사보호조약이 체결된 후 벼슬을 버리고는 전라도로 낙향하였기 때문에 그의 자손들도 그곳에서 살게 되었다.
 원래 채용신의 부친 권영은 궁중에 참빗을 납품하게 되었다. 이때 어린 채용신을 빗에 그림을 그려 넣는 일을 맡았는데 그 솜씨가 워낙 탁월하여 그 소문이 궐내에 자자하였고, 이러한 소문은 궁궐에 널리 알려져 대원군의 귀에도 들어가게 되었고 이를 계기로 그가 22세 때인 1871년 무렵에는 대원군 이하응(李昰應)(1820-1898)의 초상화를 그렸음을 알 수 있으며, 그가 그려준 초상화를 보고서 탄복했다고 한다.
채용신은 37세 되던 1886년에는 무과(武科)에 급제하였고, 급제후에는 그 전까지 사용하던 동근(同根)이라는 이름을 버리고 대신 용신(龍臣)이라는 이름을 쓰기 시작하였다. 그의 관직재임 기간은 이때부터 1906년 완산군수직(完山郡守職)을 물러날 때까지 약 20년에 이르는데 중간에 두 차례의 공백기를 빼면 16년을 관직에 있었던 셈이다.
그는 1899년 퇴임(退任)과 동시에 서울로 돌아오지 않고 향리인 전주(全州)로 내려가 머물고 있었다. 1899년 선원전(璿源殿)에 봉안할 태조 영정을 소리 조석진과 함께 모사하였고, 1900년 선전원에 화재가 발생하여 태조, 숙종, 영조, 정조, 수조, 익종, 헌종의 어진을 다시 제작하게 된다.
그는 잠시 낙향하였다가 1901년 고종황제의 어진을 그렸다. 고종이 몹시 만족하여 正3品인 중추원 의관(中樞院議官)에 임명됐다. 그의 부친(父親) 채권영(蔡權永)(1828-1901)이 전북(全北) 금마(金馬)에서 세상을 떠났으며, 탈상 후 그는 계속 전라도의 덕망 있는 선비들과 사귀면서 그들의 초상을 많이 그렸다.
그는 종2품(從2品) 정산군수(定山郡守)가 되었으나 을사보호조약에 따라 통감부가 설치됨과 동시에 정산군수를 그만두고 다시 전라도로 낙향하여 익산, 변산, 고부, 나주, 남원, 칠보 등지를 10년 여 동안 전전하다가 신태인에 정착하였다.
이후 왕성한 작품 활동에 몰입했는데 현재 남아 있는 작품은 대부분 이 시기에 제작된 것으리 이당시 제작된 작품은 크게 두 가지 유형으로 나눌 수 있다.
첫째는 우국지사와 도학자의 초상으로 대개 대가 없이 그려준 것들이다. 둘째는 주문 제작화로서 합당한 대가를 받고 그려준 것이다. 특히 후자는 근대작업화가의 출현으로 평가받을 수 있어 사회사적으로 그 의미가 크다고 할 수 있다.
 1929년(80세)에는 그의 부인 이씨(1863-1929)와 사별하였는데 석지는 부인의 죽음에 크게 상심하였고, 노년기에는 주문을 받는 대로 초상화는 꾸준히 그렸다.
1941년 6월 4일 채용신은 초상화가로서의 긴 생애를 마감하니 이 때 그의 나이가 92세였다.
 채용신에 대해서는 한국인보다는 일본인들이 더 높이 평가해 그의 사후 3년만인 1943년 6월에 일본인에 의해 유작전(遺作)이 서울에서 열리기도 하였다. 그는 서울 화단에서 활약하지도 않았으며, 도화서 화원도 아니었지만 어진 화가였던 독특한 이력을 가진 화가 였으며, 줄곧 전라도에 기거하며 전라도와 관련된 인물들의 초상을 많이 남겼고, 지금도 우리 지역에 그의 작품이 남아 있다./서보훈 A-옥션 전무이사

 

그림1. <자화상>, 비단에 채색, 규격 미상, 1893, 개인소장
그림2. <고종황제 어진>, 비단에 채색, 137 x 70 cm, 20세기 초, 원광대학교 박물관 소장
그림3. <1943년 유작전 화보>
그림4. <2011년 7월 발표된 위미우표-석지 채용신의 운낭자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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