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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다리

그림으로 만나는 다리(상)

 

 

 

 

 

 

 

 

 

 

 여러 점의 문화재에 다양한 다리가 등장하고 있다는 사실을 아십니까. 조선시대 회화에서는 대부분의 작품이 풍경 중심입니다. 때문에 다리는 작품의 주요 소재로 다뤄지지 않고, 매개체 또는 스토리를 이어주는 역할을 하고 있습니다. 사정이 이렇다보니 다리의 명칭을 알 수 있는것은 아주 극소수에 불과합니다.
 ‘성세창 제시 미원계회도(成世昌 題詩 薇垣契會圖, 보물 제868호, 국립중앙박물관 소장)는 풍류를 즐기고 친목을 도모하는 문인들의 모임을 그린 계회도로, 크기는 가로 49㎝, 세로 57㎝이지만 누가 그렸는지는 알 수 없습니다.
 산수의 배경이 화면 대부분을 차지하고, 계회의 모습이 작게 상징적으로만 나타나 자연을 중시하던 당시의 풍조가 엿보입니다. 현존하는 국내 계회도 중 가장 오래된 작품으로, 16세기 중엽 유행하던 안견파의 화풍과 계회도의 제반 형식을 잘 나타낸 작품입니다. 그림을 보면 근경에는 소나무 두 그루가 언덕 위에 있고 아래쪽에는 계회를 열고 있는 모습이 보이며, 그 뒤로 산봉우리를 배치했습니다. 무엇보다도 언덕의 우측에는 낮은 다리가 놓여 있으며, 다리 건너편에는 폭포가 있는 거대한 주산이 보이는 가운데 왼쪽으로는 강에 배 한 척을 띄워 운치와 시정을 자아내고 있습니다. 하단에는 계회에 참여한 사람들의 관직, 성명, 본관 등을 기록해 놓았으며, 그림 위쪽으로는 성세창의 글이 있어 1540년에 제작된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
 또, 김홍도가 52세 때인 1796년에 그린  ‘병진년화첩’ 중 ‘기우도강도(騎牛渡江圖)’도 마찬가지입니다. 당시 한국의 산천과 풍물이 고스란히 담겨있습니다 이 그림은 물이 불은 하천에는 나무다리가 놓여 있고, 그 위로 지팡이를 짚은 선비, 땔나무를 진 나무꾼들이 지나갑니다. 한편 목동들은 소 등에 타고 깊지 않은 강물을 그대로 걸어서 건너갑니다. 강가에는 수양버들이 서 있고, 경치 좋은 모퉁이에는 기와를 인 누각이 보입니다. 멀리 산과 들은 연무 속에 아스라히 잠겨 있습니다.
 ‘성세창 제시 하관계회도’(成世昌 題詩 夏官契會圖, 보물  제869호, 국립중앙박물관 소장)는 군사에 관한 업무를 맡아보던 하관에 근무했던 관리들의 계회모습을 가로 59㎝, 세로 97㎝의 비단 바탕에 그린 계회도입니다. 1541년에 그린 이 계회도의 상단에는 ‘하관계회도(夏官契會圖)’라는 명칭이 적혀 있으며, 중단에는 산수를 배경으로 한 야외에서의 계회 장면이 그려져 있습니다. 하단에는 참석한 선비들의 관직, 성명, 본관 등의 사항이 기록되어 있으나 오래되어 알아볼 수 없는 글자도 있다. 왼쪽 여백에 쓰인 조선 중기 문신인 성세창의 시를 통하여 1541년 가을의 작품임을 알 수 있으며, 오른편에 섶다리가 자리하고 있습니다.
 ‘성세창제시미원계회도’와 그림의 구도 및 크기가 매우 유사하며, 산수의 묘사는 오른쪽으로 치우친 편파 구도 및 짧은 선과 점들을 이용한 산과 언덕의 묘사 등 안견파 화풍을 따르고 있는 등 조선 전기 산수화풍과 계회도양식을 연구하는데 중요한 자료가 되고 있습니다.
 선문대 박물관이 소장하고 있는 석파 김용행의 ‘심매도(尋梅圖)’에 한 선비가 모습을 드러냅니다. 선비가 당나귀를 타고 조용한 산속에서 조그마한 다리를 건너고 있고, 시동(侍童)은 긴 막대에 짐주머니를 꿰어 메고 선비 뒤를 따르고 있습니다. 눈 덮인 산은 덮칠 듯 겹쳐져 있고, 헐벗은 가지에도 눈이 쌓여 있는데, 다리를 건너고 있는 선비는 의연한 모습입니다. 서울대가 소장하고 있는 창강 조속의 ‘책장도(策杖圖)’는 둥근 달이 중천에 뜬 밤에 한 인물이 지팡이를 짚고 동자와 함께 다리를 건너 오른쪽 소나무 사이로 난 길을 통해 멀리 사찰로 가는 모습을 그렸습니다.
 동자의 모습을 그린 그림이 또 있습니다. ‘김시필 동자견려도(보물 제783호, 삼성미술관 리움)는 조선 중기의 화가 김제(1524∼1593)의 산수 인물화로 가로 46㎝, 세로 111㎝의 대각선구도를 사용, 비단에 채색하여 그린 작품입니다.  이 그림은 통나무 다리를 사이에 두고 건너지 않으려고 버티는 나귀의 고삐를 억지로 잡아끌고 있는 동자의 모습을 생생하게 묘사 하고 있습니다. 화면 왼쪽에 날카롭고 각지게 표현된 가지와 뾰족한 잎을 지닌 소나무가 화면 아래에서 위 주봉까지 치솟아 그림의 여백을 메우고 있습니다. 뒤편으로는 비스듬히 치솟아있는 주봉과 함께 통나무다리가 등장하면서 또다른 맛을 더하고 있습니다.
 기산 김준근의 ‘기산풍속화첩’을 보면 서로 교차되어 있는 낚싯대 끝을 바라보고 있는 아들과 깊은 생각에 잠겨 있는 아버지가 함께 있습니다. 아버지와 아들이 홍예(무지개) 다리 위에서 낚시를 하고 있습니다. 낚시를 한다고 하지만 서로의 칸 반 낚싯대는 교차되어 있고, 그 끝을 보는 아들과는 달리 아버지는 생각에 감겨 시선을 엉뚱한 곳으로 돌리고 있습니다.  아들 옆에는 미끼를 담고 고기도 담을 다래끼까지 놓여 있습니다. 고기를 낚는다기 보다는 휴식과 이완을 위해 부자가 강가에서 시간을 보내고 있는 듯합니다. 몇 줄 평범한 물결선과 여백을 통해 흐르는 강물을 표현한 큰 강가에서 왜 조그마한 무지개다리가 걸쳐 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이들 부자의 물고기 낚시의 꿈이 작은 무지개처럼 소박하다는 것을 나타낸 것일까요? 흐르는 강물에 낚싯줄을 드리우는 모습처럼 평화로운 풍경이 또 어디에 있을까요.
 최북의 ‘금강산 표훈사’에 그려진 돌다리는 홍예가 틀어진 모습입니다. 어부가 고기를 잡고 집으로 돌아오는 흙다리가 정겹습니다. 19세기 초 이재관이 그린 ‘귀어도(歸漁圖)’에도 흙다리가 나옵니다.   ‘정선필 풍악도첩(보물 제1875호)’ 중 ‘금강내산도(金剛內山圖)’는 1711년 겸제 정선이 제작한 작품으로, 국립중앙박물관이 소장하고 있습니다.  ‘정선필 풍악도첩’은 현재까지 알려진 정선의 작품 중 가장 이른 연대를 지니고 있습니다. 따라서 겸재의 진경산수화를 이해하는 데 있어 훌륭한 기준역할을 할 수 있다는 점에서 이 작품은 주목됩니다.
 초기작이므로 후기의 원숙한 화풍에 비해 일면 미숙한 부분도 엿보이긴 하지만, 풍악도첩에 수록된 그림들은 한결같이 화가 초창기의 활력과 열의로 가득 차 있다. 금강산을 처음 대하는 화가의 정서적 반응, 그리고 우리나라 산천을 앞에 두고 이에 가장 걸맞는 표현 방식을 모색해내려는 겸재 필 진경산수화의 형성과정이 잘 드러나 있는 작품입니다.  그림 속에 연꽃 한 송이가 탐스럽게 피었습니다. 줄지어 선 흰 화강암봉이 꽃 이파리라면 그 사이로깊게 음영을 드리운 계곡들은 마치 겹겹이 포개진 틈새의 그늘 같습니다. 메다꽂듯 내리찍은 암봉의 필획들은 빠르고 예리하고 각지고 중첩되지만 봉우리마다 변화무쌍 하나도 같은 모습이 없습니다.  또 어떤 곳은 붓두 자루를 한꺼번에 쥐고 그었는데 짙고 옅은 농담의 변주가 절묘합니다. 골짜기 사이로 아스라히 먼 곳에 절집이 어른거립니다. 이렇게 절경을 빚어내는 솜씨는 조물주에게나 비길 수 있으리라. 저 짙푸른 흙산의 녹음 속 오른편 끝에 보이는 장안사(長安寺)의 무지개 다리는 유달리 청량한 느낌이 듭니다.  작품이 담겨진 부채를 들고 금강산 1만2,000봉을 한 손에 틀어쥐어 솔솔 부친다면 아마도 봉래산 향내에 취하여 그대로 신선이될지도 모릅니다.
 ‘신묘년 풍악도첩’중 국립중앙박물관이 보관 중인 ‘백천교(百川橋)’를 보면 조선시대 금강산 관광의 일단을 엿볼 수 있습니다. 백천교는 유점사 아래 있었으며, 가마를 타고 금강산을 유람한 양반들이 나귀로 갈아타고 돌아가는 환승구역이었습니다. 억불숭유 정책을 쓰던 조선시대엔 금강산 유람용 가마를 메는 가마꾼 겸 관광가이드들이 다름 아닌 스님들이었습니다. 왼쪽 아래 부분엔 가마를 내려놓고 쉬고 있는 고깔 쓴 ‘가마꾼 스님’들이 보입니다. 아마 대부분 유점사에 있는 스님들이었을 것입니다. 양반들은 그림의 오른쪽 아래에서 주인나리를 기다리며 대기하고 있던 하인들이 몰고 온 나귀를 타고 금강산을 빠져 나갈 요량입니다. 1720년대에 정선이 그린 ‘쌍도정도(雙島亭圖)’는 성주(星州) 관아의 객사인 백화헌(百花軒)의 남쪽 연못에 있던 정자를 그린 그림입니다. 왼쪽 섬에는 소나무만 심어져 있지만, 오른쪽 섬에는 정자가 설치되어 있습니다. 두 섬은 다리로 연결되어 있고, 연못 주변에는 소나무와 버드나무, 느티나무와 단풍나무가 심어져 있으며, 섬 뒤쪽으로는 괴석이 보입니다. 미술사학자 이태호씨는 이 쌍도정의 조성이 고산 윤선도의 성주목사 재임시절(1634~1635)과 관련이 있다고 보고 있으면서, 그림을 그린 시점은 정선이 인근의 하양에서 현감으로 재직하던 무렵(1721~1726년)으로 추정하고 있습니다./이종근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