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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다리

정조의 배다리(주교)

 

 

 

 

 

 

 

                     <출처 및 소장처 :국립중앙도서관, 국립고궁박물관, 국립중앙박물관>

 

옛날, 수심이 깊고 넓은 강에는 나루터를 두고 나룻배로 강을 건너다녔습니다. 하지만 당시 교량건축 능력이 부족했고, 강이 천연적인 방어물이 될 수 있는 상황에서 다리가설은 자칫 위험요소가 될 수도 있기 때문이었습니다.  부족한 기술로 외세에 대항할 국방력을 갖추기 위한 가장 바람직한 시설은 배다리(舟橋, 주교)였습니다.
 배다리는 배를 일정한 간격으로 두고 그 위에 건너지를 수 있는 판을 둔 것으로 설치된 기록을 살펴보면 고구려와 수나라가 전쟁 당시, 이성계가 위화도 회군 당시 군사용으로 놓았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 외에 고려 정종이 통행에 도움을 주기 위해서, 연산군이 사냥을 하기 위해서 만들게 했다고 전해집니다.‘주교’는 조선시대에 왕의 행차를 보다 용이하게 하기 위해 한강에 놓았던 배다리를 말합니다. 주교 정책이 가장 절정에 달했던 시기는 정조 때로, 효성이 지극한 왕으로서 그의 생부인 사도세자의 묘소가 있는 화성으로 가기 위해서는 한강을 건널 주교가 필요했기 때문입니다. 주교를 설치할 때마다 어려움과 폐단이 많아 이를 개선하고자 주교사를 만들었습니다.
 정조는 1795년 혜경궁 홍씨를 모시고 화성에 내려가 다채로운 행사를 치릅니다. 이때를 기념했던 이유는 죽은 아버지 사도세자와 어머니인 혜경궁 홍씨의 회갑이 되는 해였기 때문입니다. 시아버지 영조에 의해 남편이 뒤주에 갇혀 죽은 대참변은 혜경궁 홍씨에게도 큰 슬픔이었을 것입니다. 화성 행궁에서 회갑연을 마치고 아버지의 묘소인 현륭원에서 제사를 지냈습니다. 6,000여 명의 인원이 동원되고 1,400여 필의 말이 투입되었다고 전해집니다.
또 정조는 이 과정을 〈화성능행도병〉으로 남겼는데, 8폭 병풍으로 제작해 혜경궁 홍씨에게 바치고 궁중에도 들였다고 합니다. 김홍도의 지휘 아래 최득현, 김득신, 이인문 등 규장각의 화원들이 제작하여 정조 스스로도 ‘천 년만의 경사’라고 자랑할 만큼 장엄하고 화려합니다.
 8폭 병풍의 제1폭은 화성의 문선왕묘에서 치러진 알성의(謁聖儀, 문무과)를 그린 ‘화성성묘전배도(華城聖廟展拜圖)’입니다. 제2폭은 화성, 광주, 시흥, 과천의 유생들을 대상으로 문무과정시별시(文武科庭試別試)를 치르고 합격자를 발표하는 장면을 그린 ‘낙남헌방방도落南軒放榜圖’이며, 제3폭은 봉수당에서 잔치를 벌인 장면을 그린 ‘봉수당진찬도(奉壽堂進饌圖)’입니다. 제4폭은 수원부 노인을 초대하여 낙남헌에서 베푼 양로연을 그린 ‘낙남헌양로연도(落南軒養老宴圖)’, 제5폭은 화성 성곽의 가장 높은 곳에 위치한 서장대에서 밤에 군사들이 조련하는 장면을 그린 ‘서장대야조도(西將臺夜操圖)’, 제6폭은 득중정에서 정조가 활쏘기를 하고 혜경궁홍씨와 함께 불꽃놀이를 즐기는 모습을 그린 ‘득중정어사도(得中亭御射圖)’ 등입니다.
 여기까지가 화성에서의 장면이라면 마지막 두 폭 ‘환어행렬도’와 ‘한강주교환어도(漢江舟橋還御圖)’는 화성을 떠나 한양으로 귀환하는 장면입니다. 왕실에 진상한 작품인 만큼 8폭 모두 화가들의 최고 기량이 발휘합니다. 그 중에서도 특히 ‘환어행렬도’는 보는 사람을 압도할 정도로 작품성이 뛰어납니다. 가장 특징적인 장치는 지그재그식 인물 배치입니다.
길을 일자로 배치하면 많은 사람을 담을 수 없을 뿐더러 인물의 다양한 측면을 보여줄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덕분에 구름처럼 몰려들었던 수 많은 백성들의 모습도 함께 찾아볼 수 있습니다. 떡장수, 엿장수의 등장도흥미를 끌고 있습니다.
‘한강주교환어도(漢江舟橋還御圖)’는 현재 국립중앙박물관, 국립고궁박물관, 삼성미술관 리움, 동국대 박물관 등 여러 점이 전합니다. 밑그림이나 필치 등에서 약간씩 차이가 보이지만 기본적인 형식은 똑같습니다.
시점(視點)도 중요합니다. 노량진에 가설된 주교를 건너며 서울로 환궁하는 정조와 혜경궁 홍씨의 행렬 정면을 용산 쪽에서 바라보고 묘사했는데, 최대한 현장감을 살리기 위해 동서양 화법을 다 적용했습니다. 그림 앞쪽에 있는 인물은 크게 그리고 뒤쪽에 있는 인물은 작게 그린 원근법입니다. 조감도법(鳥瞰圖法)을 사용, 높은 창공에 있는 새가 땅 아래를 내려다보는 듯한 시각에서 그린 그림인 만큼 행사에 참여한 수많은 인물들이 한 눈에 들어옵니다. 그래서 정조시대의 회화 역량을 확인할 수 있네요.
 36척의 교배선(橋排船), 240쌍의 난간, 3개의 홍살문, 그리고 수 많은 상풍기(相風旗)와 군기가 펄럭이는 거대하고 화려한 주교가 긴 병풍의 화면을 실로 효과적으로 활용, 전개돼 화면 전체를 압도하고 있습니다. 주교의 앞뒤로 끝이 없는 수행 행렬은 장대한 주교를 더욱 강조해줍니다. 그리고 주변에 구경나온 많은 사람들은 이 그림을 더욱 풍부하고 다양하게 꾸며주고 있을 뿐만 아니라 생생한 풍속화의 성격을 부여해 주고 있습니다.
 정조의 화성행차는 왕실 가족만을 위하는 행사로 끝나지 않았습니다. 혜경궁의 회갑잔치와 함께 노인을 위한 양로연, 젊은 사람을 위한 문무과 시험, 어린 학생을 위한 학문 권장, 일반 백성을 위한 쌀 배급이 있었습니다, 특히 십만 냥의 경비에서 남은 것을 ‘을묘정리곡’이라 이름하고 전국의 군현에 배포하여 백성들에게 혜택이 돌아가도록 했습니다. 이는 모두 왕실의 기쁨을 만백성과 함께 하겠다는 의미를 담고 있었습니다.
  정조는 행사에 관한 기록을 철저하게 정리하도록 했습니다. 국립 인쇄소인 주자소가 의궤청을 설치해 의궤를 편찬하고, 의궤의인쇄가 끝난 다음, 혜경궁을 비롯한 102곳에 배포하도록 했습니다. 의궤 배포처를 일일이 지정한 것은 국왕이었습니다. 이렇게 해서 만들어진 ‘원행을묘정리의궤’는 1795년에 있었던 국왕의 행차 모습, 그리고 배다리 건설 등이 그림과 함께 전과정을 오롯이 보여주는 중요한 의궤입니다./이종근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