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양규창문학비

익산의 가람시비

 

 

 

 

 

 

 

 

 

 

 여산에서 호남로를 따라가다 원수저수지를 지나면 가람길을 만난다. 신막정류소 부근 좌회전 골목을 비집고 나가면 바로 단정하면서도 기품 있는 초가 채가 손님을 맞는다.  ‘어리석음을 지키며 사는 집’이란 수우재(守愚齋)다. 1891년, 가람은 이 집에서 태어났고 1968년 이 집에서 눈을 감았다. 가람은 현대시조를 창안하고 정착시킨 현대시조의 개척자이며 한국문학사의 기본 줄기를 잡아준 한국문학의 선구자였다. 가람은 전통의 복원과 현대화를 통해 일제 민족문화 말살에 저항한 선도적 문화민족주의 거장이었다.
 가람은 일제의 강요에도 끝끝내 굴하지 않고 지조를 지키며 단 한편의 친일(親日)적인 글을 쓰지 않아 후학들의 귀감이 되었다. 생가 안으로 들면 집의 모양새와 배치가 남다르다. 담백한 선비의 생활상을 그대로 엿볼 수 있는 아름다운 집이다. 연못가의 오래된 산수유와 배롱나무들도 옛 주인의 여유와 멋을 자랑하는 듯싶다. 전라북도 기념물 제6호(1973년)로 지정된 가람의 생가는 안채와 사랑채, 고방채, 정자 등 여러 채의 초가로 이루어져 있다. 지붕은 원래 초가였으나 그후 기와로 개량하였다가 다시 초가로 환원했다. 생가의 탱자나무는 2001년 전북 기념물 제112호로 지정됐다. 이 탱자나무의 수령은 200년 정도로 추정하고 있으며, 원추형으로 수관을 형성하고 있는 매우 아름답고 독특하다. 가람의 시<고향으로 돌아가자>비와 함께 건립된 가람의 동상을 둘러보고 생가 뒤편으로 오르면 햇살이 잘 드는 언덕에 아담한 그의 유택이 조성되어있다. 현재 생가 관리는 가람의 자부 윤씨 부인이 하고 있다. 잠시, 사랑채 툇마루에 앉아 바람소리를 듣고 있노라면 시인이 읊었을 시조 몇편이 떠오른다. 지금은 폐교가 된 여산 남초등학교에 세워진 시비에 새겨진 <별> 이다.


바람이 서늘도 하여 뜰 앞에 나섰더니
서산머리에 하늘은 구름을 벗어나고
산뜻한 초사흘 달이 별과 함께 나오더라.

 

달은 넘어가고 별만 서로 반짝인다.
저 별은 뉘 별이며 내 별 또한 어느 게오.
잠자코 홀로 서서 별을 헤어 보노라.(별)

 

비교적 늦게 신학문을 접한 가람은 나라와 겨레를 생각하여 밤이면 조선어강습원에 나가 주시경(周時經)선생의 조선어문법 강의를 수강, 우리말과 글의 연구에 대한 뜻을 세웠다.1913년부터 교편 생활 중 시조를 중심으로 시가문학을 연구, 창작하였다. 1922년부터 동광고등보통학교 · 휘문고등보통학교에서 교편을 잡으면서 시조에 뜻을 두고, 1926년 '시조회(時調會)'를 발기하였고,1930년 연희전문.보성전문학교의 강사를 겸하면서 조선문학을 강의하다가 1942년 조선어학회 사건으로 옥고를 치렀다. 1946년부터 서울대 교수 및 각 대학 강사로 동분서주, 6.25를 만나 전라북도 전시연합대학교수, 전북대학교 문리대학장을 지냈다. 1960년 학술원 임명회원이 되었다. 시조부흥론이 일기 시작한 1924년 무렵, 20여편의 시조론을 잇따라 발표한 바, 그 중에서 시조 혁신의 방향을 구체적으로 명시한 기념비적 논문은 <시조는 혁신하자>였다. 현대시조의 혁신은 내용면에서 실감 실정(實情)의 표현, 취재의 범위 확장, 용어의 수삼(數三)이며, 형식면에서 격조의 변화, 연작 형태 지향, 쓰는 법과 읽는 법 개선을 제시했다. 1939년 <가람시조집>을 펴내 대단한 인기를 끌었다. 그의 주된 공적은 시조에서 이루어졌지만 서지학(書誌學)과 국문학분야에서도 많은 업적을 남겼다. 특히 묻혀있던 고전작품들,〈한중록〉·〈인현왕후전〉·〈요로원야화기(要路院夜話記)〉· 춘향가〉를 비롯한 신재효(申在孝)의 '극가(劇歌)' 즉 판소리 등을 발굴, 소개한 공로는 크다. 전라북도예총장(藝總葬)으로 장례가 치러졌다.
 전주시 다가공원에는 그의 시 「시름」이 새겨진 시비가 세워져 있고, 그의 생가와 가까운 여산남초등학교 교정에도 그의 시「별」을 새긴 비가 있다. 매년 서울과 익산에서 가람시조문학제, 가람시조문학상 시상, 가람시조백일장 등이 개최되며 여산 순천방향 휴게소에는 2012년 조성된 시조시인 가람과 만남의 쉼터가 조성되어 있다. 시비 “난초” “고향으로 돌아가자”등 12점, 생가 전경사진, 선생 약력 및 활동내역 홍보판 등이 있다. 그는 스스로 술복, 문복, 제자복이 있는 '삼복지인(三福之人)'이라고 자처할 만큼 술과 시와 제자를 사랑한 훈훈한 인간미의 소유자였다. 생가 뜰에 세운시비<난초>는 학창 시절에 암송했던 기억이 난다.

 

빼어난 가는 잎새 굳은 듯 보드랍고
자줏빛 굵은 대공 하얀한 꽃이 벌고
이슬은 구슬이 되어 마디마디 달렸다.

 

본래 그 마음은 깨끗함을 즐겨하여
정한 모래 틈에 뿌리를 서려 두고
미진(微塵)도 가까이 않고 우로(雨露)받아 사느니라. 양규창(시인/전라북도문학관 사무국장)

 

'양규창문학비' 카테고리의 다른 글

서정주시비  (0) 2015.06.07
김환태문학비를 찾아서  (0) 2015.05.25
남원 호암시비공원  (0) 2015.04.27
전주 덕진공원  (0) 2015.04.13
부안 매창공원시비  (0) 2015.03.3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