갑자기 초여름이다. 아깝지만 에어컨을 켜고 전주 남원 간 도로를 달려 도착한 남원고을에 연둣빛 봄의 향연이 절정이다. 남원은 고전소설의 배경지로 여러 번 등장해 풍부한 문학 자원을 보유하고 있다. 특히 금오신화의 만복사저포기, 춘향전, 흥부전, 변강쇠전 등이 남원을 무대로 한다. 특히 광한루원을 무대로 한 춘향전은 남원의 대표적인 이미지로 전국에 각인돼 있다. 남원은 동편제 발상지, 정유재란을 맞서 싸운 충절의 고장, 4.19혁명의 도화선이 된 김주열 열사의 고향으로 역사와 전통, 그리고 문화예술이 생생히 숨 쉬는 유서 깊은 고을이다.
‘호암시비공원’이 소재한 덕과는 1919년 당시 일제에 대항한 자주독립을 위해 식목일을 가장해 격문을 발표하고 주민 1,000여명과 함께 만세운동을 함으로써 남원 전역으로 확산되는 시발점 역할을 한 자랑스러운 민족정기가 흐르는 고을이다. ‘호암시비공원’은 덕과면 만도리 만동마을 초입 도로변 약300평의 규모이다. 받침대 위에 흑색이 나는 석물로 20여기가 줄지어 서있는 모습이 눈에 들어온다.
남원문화원과 전라북도, 남원시, 그리고 건립추진위원회가 구국충절을 일깨우며 국난에 임하여 살신성인 으로 조국을 보위한 명문 명가 출신선비들의 올곧은 선비정신을 기림과 동시에 격조 높은 선인들의 시향을 음미하기 위함이다. 호암서원과 주변의 아름다운 자연경관에 조성된 ‘궁포조대’ 하천부지 낚시터 옆에 조선시대 남원과 관련된 시인가운데 구성과 문학성이 뛰어난 작품으로 20인을 선정했다. 당초 '선비공원'으로 추진하다가 '호암시비공원'으로 변경했다. '백두대간 만행산하 유서 깊은 호암서원 앞 뜰 궁포조대에 고매한 선인들의 시혼을 모신다. 선인들은 애국의 명신이거나 학자인 동시에 시인이었으니 그 생애가 일월처럼 빛났다. 우리는 선현들의 가르침을 본받아 인간을 사랑하고 바른길을 따라 참되게 살아온 인, 의, 예,지(仁, 義, 禮, 智)정신을 표상으로 삼고자 남원 관련 선인들의 시를 모아 돌에 새겨 이곳에 세웁니다'
호암시비공원의 건립 취지문이다. 20인의 신인과 작품 내용은 <수용암> 김화, <헌매> 소산복,<무진장>오정길, <용천사>최상중, <몽중불수기>백용성 ,<청계정사> 고경명,<영읍성>안성, <행목시>소연, <최락당>김선, < 춘규사>김삼의당, <광한루> 양성지, <취음>이점,<광풍루> 황희, <등광한루>신흠, <상한사>정철, <요천>강희맹,<수모시> 윤효손 , <범국잉득일절>노진,<퇴사시> 심구령, <알행궁> 이서 등 20인이다.
시비공원 머릿돌에 '돌아! 너에게 선인들의 시를 새기리니 그대는 후인들의 가슴에 시를 읊어다오. 인간은 천체우주원리와 대자연의 섭리에 따라 수천 년 여울여울 시로써 원융(圓瀜)하리니(2007.6.28)'라고 밝혀 앞으로 선현들의 가르침을 본받아 仁, 義, 禮, 智 정신을 표상으로 삼고 천년고도 남원의 올곧은 선비정신을 후인들에게 전하고자함이 강렬하게 와 닿았다. 작품들 중 조선말기 승려로3.1독립운동민족대표 백용성조사의 <夢中佛授記>몽중불수기를 감상해본다. '不忘前世事 불망전세사 / 夢中佛授記 몽중볼수기/ 出家德密庵 출가덕밀암/ 其佛親夢佛 기불친몽불 (전생의 일 잊지 아니하고/ 꿈결에 부처님 수기 받아 받들었네/교룡산 덕밀암으로 출가하여/부처님 뵈니 꿈에 뵌 바로 그 분이셨네)'
조선 초 명신 황희정승의 작품 '관풍루'다. '軒高能却暑 헌고능각서 / 詹豁易爲風 첨활이위풍/ 老樹陰垂地 노수음수지/遙岑翠掃空 요잠취소공 (집이 높으니 능히 더위를 물리치고/ 처마가 넓으니 쉬 바람이 통 하는구나 /큰 나무는 땅에 서늘한 그늘 드리우고/ 먼 산봉우리는 푸르게 하늘을 쓰는 듯하구나)' 벌써 잡초가 우거지는 공원을 보며 아쉬운 점은 너무 외진 곳에 위치하여 탐방이 쉽지 않은데다가 일부 시비의 글씨가 판독이 불가할 정도로 지워진 상태였다. 그리고 시비의 배치나 모양 형식이 너무 단조로운 구성이다 보니 여러 가지 보완이 필요하다고 생각된다.
문화와 예술의 고장인 남원의 문학비는 ‘호암시비공원’ 외에도 전주와 남원 길을 오가다 눈에 익은 오리정의 성춘향과 이몽룡의 이별이 서린 길목에 ‘성춘향 옥중시비’가 남원의 표지 석 역할을 한다. 그리고 사매면 노봉에 ‘최명희문학비’ 춘향테마파크에 ‘춘향소재시비단지’ 교룡산성에 조성된 ‘박항식시비, 김삼의당시비, 방원진시비, 이도령어사시’가 있다. 만인의총 앞에 멋지게 자리한 ‘오늘이 오늘이소서’ 비와 흥부전발상지인 성리마을에 ‘김소월시비’는 이례적이다. 또 지리산 능선마다 등산객들과 정겨움을 나누는 정령치 ‘이원규시비’ 강희맹의 ‘내고향’,최익현의‘천왕봉’ 문동도의‘지리산’ 원응 스님의‘천왕봉상조경장관음’등이 산재해있다. 남원추어탕으로 점심을 하고 ‘요천’으로 나오니 어디서 태평소 소리가 간들 어 진다. 마침 변학도 거리 행차공연이다. 올봄에는 문화예술의 르네상스시대를 열어가는 남원에서 머물고 싶다.양규창(시인/전라북도문학관 사무국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