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기 900년 견훤이 세운 백제의 수도인 전주는 500년을 꽃피운 조선왕조의 발상지다. 조선시대에는 전라도 지역과 제주도까지 관할했던 전라도의 수도였다. 전주는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된 판소리의 본고장으로 한옥, 한식, 한지 등 가장 한국적인 전통문화의 도시다. 일전에 한국갤럽조사에 ‘국내 살고 싶은 도시’ 6위를 차지한 살아볼만한 매력적인 도시다. 여기에 전주의 격을 더 해주는 명소가 있으니 아시아 최고의 전통공원으로 도약을 준비 중인 덕진공원이 있다.
덕진공원은 견훤이 방위를 위해 늪을 만들었다는 설과 동국여지승람은 전주가 3면이 산으로 둘러싸인 분지로 북쪽만 열려있는 탓에 땅의 기운이 낮아 가련산과 건지산 사이를 제방으로 막아 저수함으로써 지맥이 흘러내리지 않도록 했다는 것이다. 대부분의 저수지가 관개용으로 만들어진 것에 비해 유래가 독특하다는 생각이 든다. 호반을 가로지르는 아취형 연화교등이 상징적인 덕진공원은 찾는 사람들에게 행복한 안식처 역할을 한다. 총면적 3만평 정도인데 반쯤은 연꽃이 식재되어 칠월을 한바탕을 북새통으로 달군다. 덕진공원은 왕년에 한자락 사연 없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지금이야 무료입장이지만 예전엔 쌈짓돈을 끄집어내야 입장을 하기도 했다. 그러다보니 데이트에 바람이라도 맞으면 죽을 맛이었다.
언제부터인지 온통 한옥마을로 쫓아가는 바람에 인기 순위가 바뀐듯하지만 시민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는 공간이다. 덕진공원을 최고의 전통공원으로 명소화하기 위한 사업들도 적극적으로 추진되고 있다. 보도 자료에 의하면 국회 김성주 의원이 덕진공원 건지산 명소화 사업 중 수질개선사업을 환경부 사업으로 확정 받아 실시설계비 14억 등 총 예산 337억 원을 확보 했다. 전북은 한국문학의 거목들을 배출한 문학의 메카이다.
덕진공원을 찾는 이들에게 초콜렛처럼 달콤한 감동을 선사는 김해강, 신석정, 이철균, 백양촌의 시비가 마주한 시의 거룩한 공간을 만나게 된다. 먼저 점잖은 노신사가 걸터앉아있는 모양의 신석정(辛夕汀, 1907 - 1974)시비가 있다. 마치 공원 내 포토존 처럼 사람들이 사진을 찍거나 앞자리를 비켜주지 않는 명당자리다. 특히 시인의 동상으로 구성된 시비는 드문 경우다. 그의 시 <네 눈망울에서는>을 감상해보자. '네 눈망울에서는 초록빛 오월 하이얀 찔레꽃 내음새가 난다 / 네 눈망울에는 초롱초롱한 별들의 이야기를 머금었다 / 네 눈망울에서는 새벽을 알리는 아득한 鐘(종)소리가 들린다 / 네 눈망울에서는 머언 먼 뒷날 만나야 할 뜨거운 손들이 보인다 / 네 눈망울에서는 손잡고 이야기할 즐거운 나날이 오고 있다'
신석정의 시풍은 잔잔한 전원적인 정서를 음악적인 리듬에 담아 노래하는 데 특색이 있고, 그 맑은 시는 마음까지 순화시키는 감동적인 호소력을 지니고 있다. 2011년 부안 생가 터에 ‘석정문학관’이 건립되어 전국적인 명소로 각광받고 있다. 석정의 시비 좌측으로 아름다운 목가적 시 세계와 학처럼 맑게 살다간 김해강(金海剛)의 시비가 그의 문학적 위상을 짐작케 하고 있다. 시비의 좌대 휘호는 서예가 석전 황욱 선생이 쓴 것으로 석전이 남긴 마지막 작품이라고 한다. 시비에는 <금강의 달>이 맑고 환하게 떠있다. 해강의 좌우명은 '사무사(思無邪)’로 고고한 인간적 지절(志節)을 중시했고, 깨끗한 품위를 견지함으로써 깊고 은은한 시의 향기를 발산, 전형적인 시인으로 존경받았다고 한다. 해강시비의 좌측으로 사막을 걸어가는 낙타의 등 모양을 한 이철균(李轍均)시비인데, 그는 낙타처럼 혼자 사막 같은 세상을 걸어 가버린 듯하다.
한평생 시와 함께 살았고, 떠돌이로 시가 곧 생활 자체이며 인생 전부였던 이철균은 단 한 권의 유고 시집만을 남기고 한 줌의 재로 떠난 것이다. 그의 시 <한낮에>를 감상해보자. '嶺(영) 넘어 구름이 가고 / 먼 마을 호박잎에 지나가는 빗소리/ 나비는 빈 마당 한 구석 조으는 꽃에/ 울 너머 바다를 잊어/ 흐르는 千年(천년)이 환한 그늘 속 한낮이었다. 여기에 함께 서로를 마주하고 있는 부안 출신 시인 이자 교육자인 백양촌(白楊村, 1916 - 2003)의 시비가 있다. 조용한 성품의 시인인 그가 있어 향토문학은 심해처럼 깊어졌고, 거목처럼 자라기 시작했다는 평이다.
덕진공원에 건립된 전북문단 거목들의 시비를 보며 다시 한 번 전북은 선배문인들이 이루어놓은 ‘수준 높은 문학’의 고장임을 실감하게 된다. 덕진공원 외 전주에 산재해있는 시비는 남고산성 정몽주 우국시비, 다가공원 가람시비, 덕진 체련공원 입구 소세양시비, 박동화문학비, 전북대학교 삼성문화회관 이병기, 신석정시비, 전주교육대학교 신동엽시비, 휴비스 전주공장 서정주시비 등이 있다. /양규창(시인. 전라북도문학관 사무국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