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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진돈편액

김제 요교정사

 

 

 

 

 

 

김제시 백산면 자학길 191에 자리하고 있는 요교정사는통상적으로 김제사람들은 이곳을 여꾸다리라 부른다. 동네 이름을 여꾸다리라 불르게 된 연유는 바로 다리 옆에 쌀알같은 붉은 여뀌꽃이 많이 있기 때문아다. 한자로는  여뀌요자를 써서 요교(蓼橋)라 하는데, 이곳을 가려면 김제에서 익산가는 방향으로 흥복사와 관망대 입구를 지나 백산사거리에서 동쪽으로 꺽어 들어가면 자학마을에 이른다.
 요교정사에 도착하니 강암 송성용이 쓴 요교정사라는 편액이 시선을 끈다. 늘씬한  필획에 건장한 맛이 있고, 속기가 없어 마음을 비운 필획처럼 보인다. 내력을 알아보니 바로 이곳이 강암 송성용의 아버지인 유재 송기면이 후학을 가르치던 학당이라 한다. 일생을 통하여 노소와 귀천을 따지지 않고 많은 제자를 길러낸 곳이다. 또 요교정사 뒤에는 병암사가 있어 유재의 위패와 영정을 모시고 있다.
 송기면(1882-1956)은 본관이 여산이며, 여산휴게소 부근에 묘소가 있는 송유익의 후손으로, 자는 군장(君章)이며 호는 유재(裕齋)이다. 그는 초년에는 바로 옆 마을 석정 이정직(李定稷)의 문하에서 문장·서화·역산(曆算) 등을 두루 배웠고, 만년에는 간재 전우(田愚)의 문하에서 성리와 의리에 관한 학문을 받아들여 학문적 기반을 형성했다.
 유재 송기면은 성현들의 도의실천과 백행의 근본인 효를 실천하고자 매월 운암호 앞산에 있는 아버지 송응섭묘소를 다녔다. 일제 강점기에도 항일의식이 누구보다 강해 창씨개명을 거부하여 일본경찰의 갖은 협박을 당했지만 아랑곳하지 않았다. 유재는 당시의 시대 상황을 인식하고 구체신용설(舊體新用說)을 주장하며 옛 것을 몸체삼아 시대에 맞게 새롭게 활용해야 한다는 학설을 내세웠다.
 또, 무엇보다도 중요한 것은 전북서예사의 흐름에서 유재의 서풍을 빼놓을 수 없다. 김제는 송재 송일중이 나타나 서예사적으로 커다란 획을 그었으며, 동시대에 김제군수 창강 조속과  백석 유즙이 크게 활동했다. 이후에 석정 이정직은 신학문에 관심이 많은 실학자로 중국 연경에 가서 견문을 넓혔고 서예자료를 많이 구입한 후 실사구시적 관점에서 제자들을 길러냈다. 그 대표적인 사람이 벽하 조주승, 유재 송기면, 설송 최규상, 유하 유영완 등을 들 수 있다.
 유재는 학예 부분에서 서예와 사군자에 뛰어났는데, 학문적 이론과 실기를 겸비하였다. 주로 왕희지(王羲之)·미불·동기창(董其昌) 필의를 연마했으며, 그가 남긴 금석문으로는 전우의 부탁으로 쓴 임헌회신도비를 비롯, 일재 이항신도비, 송보산신도비, 유극수신도비, 무계정사유적비 등이 있다. 편액으로는 부안 보령원 편액, 임실 남양홍씨 재실 편액, 완주 경주이씨 재실 편액, 전주 삼한국대부인 시사재 편액, 부안김씨 경지재 주련 등이 유명하다.   그리고 정몽주선생을 모시는 삼례의 호산서원편액 등도 빼 놓을 수 없다. 유재의 금석문은 주로 해서와 예서 그리고 전서를 많이 사용했는데 필획의 치밀함과 예술성이 아주 뛰어나다. 
 유재의 학문과 서예의 맥은 많은 제자들에게 이어졌지만 그의 큰아들 송수용과 막내아들 송성용, 사손인 송하영과 손자인 송하선, 송하철, 송하경, 송하진에게 이어졌고, 또 독특한 글씨체를 쓴 전 국회부의장 윤제술(尹濟述) 등을 배출하기에 이른다.
 필자는 조부가 정읍 칠보에 사는 염재 김균(대동천자문 저자)선생이다. 항상 어려서부터 유재선생의 얘기를 듣고 자랐는데 조부의 말씀을 그대로 옮겨본다. “한번은 역꾸다리 유재장의 집을 갔는데 저녁 식사 시간이 되어 들어가게 되었다. 그런데 유재장이 저녁을 먹었냐고 물어보지를 않더라는 것이다. 그런데 조금 있으니 밥상이 들어와서 유재장에게 되물었다는 것이다. 왜 식사를 했냐고 물어보지도 않고 상을 차려왔냐고 하니. 유재장은 말하기를 만약 내가 염재장에게 식사를 했냐고 물어보면 염재는 선비 체면에 먹었다고 할 것 아닌가. 그러니 물어볼 필요가 없지 않는가? 만약 식사를 했다면 물리면 되는 것이 아닌가? 라고 대답하더라는 것이다. 그래서 밥을 굶지 않고 잘 먹었다"
 그래서 필자의 집에도 손님이 오면 물어보지 않고 식사를 챙기는 습관이 생기게 됐다. 요교정사에는 명사들의 글씨들이 많다. 당시의 의리의 대명사로 통하는 석촌 윤용구가 쓴 호문당(好問堂: 묻기를 좋아하는 집)편액과 독특한 전서체를 구사하는 정대유가 쓴 유재편액, 유재의 손자 아산 송하영의 병암사편액 등은 보는 것만으로 안복이라 할 수 있다. 또 병암사 뒤 송림 속에 있는 유재 송기면의 묘소를 둘러 보면서 온고지신(溫故知新)의 정신 속에서 나오는 항일의식과 구체신용에서 나오는 예술혼을 느껴본다면 금상첨화가 아닐 수 없다./ 김진돈 전라금석문연구회장. 전북문화재 전문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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