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실 효충서원(임실읍 정월리) 내 정려각에 우뚝 서 있는 ‘김복규.김기종 효자정려비 및 정판’(金福奎.金箕鍾孝子旌閭碑 및 旌板)은 전북 유형문화재 제144호로, 조선 철종 때의 김복규, 김기종 부자의 효행을 기리고 있는 문화유산이다.
사연에 의하면 김복규는 효심이 지극한 사람으로, 16세에 부친상을 당하였으나, 묘지를 정하지 못한 채 밤낮으로 슬픔을 이기지 못했다. 그러던 중 꿈에 나타난 도사가 일러준 대로 약을 구해 아버지께 다려드리니 다시 깨어나 천수를 누리게 된다. 바로 이러한 그의 효행을 듣고 나라에서는 증 공조참판동지의금부사의 벼슬을 내려주었다.
그의 아들 기종 역시 아버지에 대한 효가 지극한 나머지 부모상을 당하자 3년 동안을 묘 옆에 초막을 짓고 살며 애통해 했다. 그 때의 울음 소리가 마치 호랑이의 울부짓음과 같았다 고 해서 마을 이름을 ‘호동(虎洞)’으로 바꾸어 부르게 되었다는 이야기가 전한다. 이 비는 낮은 사각받침돌 위로 비몸을 세운 간결한 모습으로, 2기 모두 형식이다. 앞면에는 각각 비의 제목을 세로로 새겼는데, 모두 추사 김정희가 쓴 글씨이다.
추사 김정희가 쓴 정려기에는 ‘증참판 김복규의 정려기라. 김복규는 효자이다. 정려를 세웠는데, 그 송(頌-칭송하는 글)에 말하기를, 고목나무 버섯의 뿌리요, 단샘의 근원이라 효자에는 효자 정문을 세워 그 효행을 대대로 빛나게 하리. 완당 김정희 서’ 라 새겨져 있다.
손자 영곤의 비문에는 ‘아버님이 남기신 말씀에 따라 완옹(김정희)에게 비명을 부탁했다. 완옹의 글은 매우 간결하고 엄숙했다. 편액에는 ‘양세정효각(兩世旌孝閣)’이라 쓰고 또 ‘효덕연경당(孝德衍慶堂)’또는 ‘육행당(六行堂)’이라 적었다. ‘2대에 걸친 효자각’이요, ‘효행의 덕으로 경사스러움이 넘친다’, ‘여섯가지 덕행’이다 하는 이 뜻만으로도 더 이상 누누한 여러말을 할 필요를 느끼지 않아 삼가 그 대략을 쓰는데 그친다’하고 날짜와 비를 세운 이, 글 지은 이, 글쓴 이, 글 새긴 이의 이름을 적었다’고 적혀 있다.
소설가 김태진씨는 장편소설 ‘모악산’(도서출판 푸른향기, 값 1만6,500원)을 통해 전주 삼천동 상거마마을(쌍룡아파트 곰솔나무 인근)에서 임실로 옮겨 현재 시집살이를 하고 있는 이 비를 원래의 장소인 전주로 옮겨야 함이 마땅하다고 주장했다. 작가는 “오랫동안 전주시의 표상이요, 효행의 상징으로 전주시민의 사랑을 받았던 효충서원과 효자비각이 피치 못할 사정으로 임실로 옮겨지게 됐다”며 “이번 기회에 귀중한 문화재 효자비각이 제자리를 찾아 문화도시 전주의 긍지를 더욱 빛내고, 효행을 널리 펼칠 수 있는 기회가 되기를 바라는 마음을 이 소설에 담았다”고 말했다.
이 비가 임실로 시집살이를 간 것은 1981년 전주도시계획에 의거, 아파트가 지어지게 되자 당시 김해김씨 문중의 총무를 맡은 김재두(작고)씨가 여러 장소를 물색하다가 그 곳을 택한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또, 이들 문중 어르신들은 얘기 속 ‘호동(虎洞)’ 마을을 소양과 용진 사이에 있는 예비군훈련장 인근으로 보고 있지만 정확한 것은 아니다.
‘“참으로 추사는 해동의 보물이야. 명필 중의 명필이지.” 이곳 효자비각은 김 참판의 조부와 증조부 두 부자의 지극한 효성을 기리기 위해 철종대왕이 효자비를 하사하시고, 비각과 비문은 당시 대교로 있던 ·추사 김정희에게 쓰게 하였던 것이다. (중략) 효자비각을 중심으로 주위에는 제실과 서원 등을 관리하고 운영하고 있는 사람들이 몰려 사는 이십여 호의 작은 마을이 있었는데, 이 마을을 옆에 있는 효자비각을 따서 효자골이라고 불렀다’
저자의 자전적 이야기이기도 ‘모악산’ 은 500년 왕조와 봉건이 무너진 조선 말기부터 6.25전쟁까지 김 참판 일가와 이 진사 집안에 얽힌 기막힌 인연을 그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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