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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스토리

전북의 농악

전북의 농악

 

김익두 전북대교수, 문학평론가

 

1. 시작하는 말

 

농악은 우리 민족의 귀중한 예술로서 고래로부터 지금까지 면면히 이어져 오고 있으며 민족 예술의 여러 분야에 혼합되어 있다. 이것은 우리 민족의 호흡과 생명 속에서 우러나와, 다시 그것을 재규정하면서 예술적으로 축적 종합 확장된 것이다.

역사적으로는 원시 종합예술의 형태로 시작해서 환단·삼국·고려·조선을 거쳐 오늘에 이르고, 지리적으로는 민족 영지 백두산을 중심으로 해서 만·몽고 한반도 일본에까지 퍼졌으리라고 생각된다.

농악 자체의 역사적 전개로 보더라도 원시 축원농악 형태에서 일과 놀이가 통일된 노작 농악 형태로 이어지고, 여기서 다시 삼국 정립시의 전쟁의 와중에서 군악 농악 형태로, 서역 불교와 중국 유교 문화의 영향을 받아 걸립 농악 형태로, 다시 근자에 와서 관객을 상대로 하는 공연 형태의 연예 농악형태로 변모되어 왔다.

원시 축원 농악의 잔재는 농어촌 마을의 당산제나 풍어제 등에서 볼 수 있고, 노작 농악의 모습은 모래기와 결함 되어 있는 <모방고>나, 논매기와 어울려 있는 <두레굿>이나, <노래굿>의 사설로 쓰이는 노동요에서 찾아 볼 수 있다. 농군악의 잔영은 농악의 진법에서 알 수 있고, 걸립 농악의 유풍은 고깔과 바라와, 잡색 배역의 중·양반광대에서 확인할 수 있고, 연예 농악의 요소는 <도독잽이굿>이나 <일광놀이>와 같은 素劇的 과장에서 나타난다.

그러나 우리 민족의 삶이나 사상이 온갖 역사적 환희와 수난들을 주체적으로 극복해 온 것과 마찬가지로, 농악도 그 자체 내에서의 내적인 연소와 창조적 변신을 통해 모든 시대적 이형태들을 순화 개편하면서 오늘에 이르고 있다.

 

2. 전북 농악의 기초

 

농악은 무용과 음악과 연극의 굿적인 혼합 형태이지만, 현재로서는 음악의 측면이 많이 강조되고 있다.

기본 악장 아래 많은 가락이 세분되고 각 과장의 가락(가림새)에 따라 앞치배의 선도에 뒷치배가 화합하면서, 순차적으로 진법의 율동 동작을 하여 나간다. 윗놀이인 채상놀이와 밑놀이인 가락이 조화롭게 어울리는 가운데, 집단놀이와 개인놀이가 적절하게 연결되는 것이다.

농악의 연행 순서는 한 마을을 단위로 할 때 屋外굿과 屋內굿으로 나눌 수 있으며, 옥외굿은 <들당산굿>, <문굿>, <당산굿>, <판굿>, <샘굿>, <날당산굿>으로 되어 있으며, 옥내 굿은 <당산굿>, <문굿>, <마당굿>, <조왕굿>, <철룡굿>, <고방굿>의 순서로 연행된다.

농악은 또 계절마다의 세시풍속과도 어울려 정월에는 <걸궁굿>과 <판굿>, <줄다리기굿>, <망월굿>, <기마지굿(합굿)>, <선창굿>등이 연행되고, 3·4월에는 <화전놀이굿>, 5·6월의 <단오굿>, <모방고>, 7·8월의 <두레굿>, <백중놀이굿(풋굿·호미씻이굿·초연굿·술멕이굿·장원질굿)>, <추석굿>, 10월의 <당산굿>, 동지섣달의 <설굿(망년굿)> 등, 요컨대 세시풍속과도 농악은 뗄 수 없이 밀접한 관련을 가지고 있는 것이다.

농악의 <채(가락)>란 말 - 좌도는 <채>라는 용어를 많이 쓰고, 우도 농악에서는 <가락>이란 말을 많이 쓴다 - 은 음악과 동작을 동시에 가리키는 명칭인데, 농악의 채는 보통 12채 (12악장·열두거리)라 하고 각 채마다 3가락으로 세분하여 12채 36가락을 보통 농악의 기본이라 한다. 그러나 현전하는 것은 대략 6∼8채 정도이다.

농악의 동작은 무용적이며 연극적이기도 한데 대개 8진법에 따르고, 농악대의 편성은 좌도 농악의 동작 위주의 전립대(상모대)와 우도의 가락위주의 고깔대로 나눌 수 있다. 여기에 쇄납과 바라가 곁들여지나, 대개의 경우 용당기·영기·농기·나발·쇄납·상쇠·부쇠·종쇠·징·수장고·부장고·수북·북·수법고·부법고, 그리고 대포수·창부·노구·중·조리중·무동·양반광대·할미광대 등의 잡색으로 이루어진다.

윗놀이의 종류로는 <상좌놀음>, <사사윗놀음>, <산치기윗놀음>, <돗대치기>, <이슬털이>, <까치걸음> 등 20여 가지가 있으며 밑놀이 가락도 <행진굿>, <반삼채>, <도드리굿>, <호호굿>, <영산굿> 등 20여 가지에 이른다.

 

3. 전북 농악의 지역적 특성

 

전북의 농악은 좌도 농악과 우도 농악으로 구분된다. 여기서 좌도는 조금 크게 보면 영남 지역권에 속한다. 이러한 농악의 분포특성에 따른 지역 구분은 좁혀서 살피기도 해야지만 점차 넓혀서 우리 민족이 분포해 살아온 전 지역에 걸쳐서도 행해져야 할 것이다.

좌도 농악은 전라선 철길을 따라 내려가며 그 주위에 분포하는 농악으로서 전주·완주·무주·진안·장수·남원·운봉·곡성·구례 등지의 농악을 말하고, 우도 농악은 호남선 철길을 따라서 퍼져 있는 이리·옥구·김제·정읍·부안·고창·영광·광주 등지의 농악을 일컫는다.

좌도 농악이 영남 지역과 인접한 진안 고원과 지리산록의 산간지역쪽에 분포하고 있는데 비하여 우도 농악은 김제 평야를 위시한 평야지역의 농악이다.

좌도와 우도 외에 하나의 지역 구분을 더 둔다면 평야지역의 아래인 서해안과 그 부속 도서지역을 묶을 수 있다. 왜냐하면 이 지역은 폐쇄적이고 운명적인 지리적 환경으로 인하여 풍어제를 중심으로 하여 신앙적인 대동굿이 강하게 유지되어오고 있고 농악이 무속과 밀접하게 관련되어 있기 때문이다.

좌도 농악과 우도 농악의 특성은 이미 몇몇 분들이 고찰해 왔다.

좌도 농악은 복색이 간편하며, 전원이 戰笠을 쓰고, 가락이 빠르고 힘차며 단순하고, 개인 연기보다 단체 연기에 치중하며, 밑놀이 가락보다 윗놀이 동작에 치중하여 소박하고 동적이며 남성적이다.

이에 비해 우도 농악은 복색이 화려하고 고깔을 주로 쓰며, 가락이 느리고 유연하며 다양하고, 단체 연기보다 개인 연기에 치중하며, 윗놀이 동작보다 밑놀이 가락에 치중하며, 화려·유장·섬세하고 정적이며 여성적이다.

그러나 교통이 발달하여 지역간의 상호 교류가 잦아짐에 따라 좌·우도 굿이 서로 섞이게 되어 지역적 특성과 순수성이 점차 사라져 가고 있다. 예를 들어 우도 굿이 장고잽이와 소고잽이는 고깔을 썼으나 근래에도 좌도와 같이 전립을 쓰고 채상놀이를 하는 것이 그것이다. 이러한 변화는 좌도 굿의 소박·강건한 형태에서 우도 굿의 복잡·화려한 형태로 변화되어간 것이라고 볼 수 있으나, 이것이 바람직한 것은 아니다. 이들은 서로 상대적인 것이고, 농악이 뜬패화 되어 현장에서 유리되는 현상과 관련되기 때문이다.

농악 분야에서의 좌·우도 구분 개념은 더 나아가 민족 예술 전반에 걸친 지역적 특성으로 확대 해석할 수도 있다. 즉, 호남에는 우도 농악적 성격이 그 중심에 있고 영남에는 좌도 농악적 성격이 그 중심에 있다. 그래서 호남에는 밑놀이 가락, 즉 음악을 위주로 하는 판소리가 형성되었고, 영남에는 윗놀이 동작을 위주로 하는 오광대놀이와 들놀음이 형성되었다. 이것은 서로 상대적인 것이며 상호 보완적인 것이다. 이 개념은 학문적 성향에 있어서의 호남 사장파와 영남 도학파 개념과도 관련될 것이다.

호남의 풍부한 들과 기름진 옥토, 거기서의 여유와 치렁거림과 흐드러짐은 화해롭고 풀이적이고 농업적인 풍물굿(농악)과 세습적 단골(무당)과 판소리를 낳았고, 영남의 다기한 산맥과 풍부한 물은 힘차고 동적인 갈등구조인 오광대놀음과 들놀음을 창출하게 했다.

호남의 자족적 토양은 고대 동북아시아 문화의 모태였으나, 반도 내적인 알력이 외세를 끌어들이면서, 이 지역에 억울함과 원한과 비탄을 쌓아 육자배기 진양조와 시나위청과 흐느끼는 귀곡성을 만들었다.

이에 비해 산간의 고립된 소박성에다 사림적 양반의 선비정신이 어울린 영남은 그 토대 위에 서서, 민중의 저항과 양반의 위세가 맞부딪치는 곳에 탈춤이라는 예술적 장치를 마련하였다.

 

4. 전북 농악의 현재

 

전북 농악은 지극히 영세하고 약화되었다. 농어촌에서도 농악기는 사라지고 대부분의 마을에서는 굿을 치지 않는다. 농악이 아직 살아 있는 마을은 대개 당산제, 풍어제가 살아 있는 곳이다. 그러므로 농악을 살리려면 먼저 마을의 대동굿을 살려야 한다. 농악 행위 자체만 발굴하여 문화재로 지정 보호한다고 해서 잘 되는 것은 아니다. 그것은 뿌리를 자르고 가지만 살리자는 식이 되기 쉽다.

현재 전북 농악의 편모를 살펴 볼 수 있는 곳은 정읍군 칠보면 정량리, 부안군 부안읍 돌 모산, 김제군 월촌면 등 일부 당산제가 잔존하고 있는 마을에서 볼 수 있으나 가락이나 동작의 전승 상태가 혼미해지고 그 규모가 영세하기 때문에, 그 전모를 알아보기가 매우 어렵다. 그래서 뜬패적 성격이 다분히 있기는 하지만 지금까지 많이 알려진 곳 서너 군데를 골라서, 이를 중심으로 현 전북 농악의 실상의 대강을 살피고자 한다.

 

1) 좌도 농악

현재 좌도농악의 실상을 비교적 잘 볼 수 있는 곳은 진안군 성수면 도동리 중평부락과, 임실군 강진면 필봉리이다. 중평부락의 농악은 상쇠 김봉렬(74)씨에 의해서 이끌어져 왔으나 현재는 함께 하던 장고잽이도 사망하고 마을에 굿패를 꾸밀 인원이 없어서 제대로 굿판을 못 이루고 있다.

중평 농악 가락의 대강을 순차적으로 적어보면 <질굿>, <문굿>, <가진열두마치(판굿)>, <외마치>, <두마치>, <세마치>, <4·5·6마치>, <일곱마치>, <휘모리>, <여덟마치>, <아홉마치>, <품앗이굿>, <느린삼채굿>, <호호굿>, <호호굿도드래기>, <각정굿>, <노래굿>, <춤굿>, <영산굿>, <반잔지래기>, <파장굿> 등으로 이어져 나간다.

임실 필봉 마을의 농악은 양순용(48)씨가 주동이 되어 이끌어 온 농악으로서 그동안 어려움 속에서도 많은 노력을 기울여 이어내려 왔으나, 양씨가 개인 사정으로 남원으로 이사해 감으로써 현재는 더욱 더 어려워져 버리고 말았다.

전해오는 가락으로는 <오채질굿>, <외마치굿>, <좌질굿>, 일채부터 칠채까지의 <채굿>, <풍류굿>, <잦은몰이>, <휘몰이 (다드래기)>, <짝드름>, <호호굿> 등이며 <칠채굿>과 <짝드름>은 좌도농악의 특징이라 할 수 있다.

필봉 농악의 가장 볼 만한 연행 부분(과장)은 <판굿>으로서, <칠채굿>, <호호굿>, <쌍방울진굿>, <짝드름>, <느린풍류>, <반풍류>, <미지기영산>, <잦은 영산>, <다드래기영산>, <노래굿>, <돌굿(춤굿)>, <수박치기>, <등지기굿>, <군영놀이>, <도둑잽이굿>, <탈머리굿> 등의 순서로 전개되는데, 특히 <도둑잽이굿>은 소극적인 잡희가 많아 연극의 성격이 강한 부분이다. 그러나 이 <판굿>은 좌도농악의 순수한 형태는 아니며 뜬패들의 영향으로 우도농악이나 창작적인 요소가 가미되어 있다.

 

2) 우도농악

 

우도 농악은 일설에 의하면 정읍군 입암면 대흥리 보천교에서부터 생겼다고 할만큼 정읍의 농악은 유명하였으며, 이 우도 농악은 전국적으로 퍼져 나가 오늘에 이르고 있다.

우도농악이 제대로 전승되고 있는 마을은 거의 없다. 현대 김제군 진봉면 산정리 마을에 어느 정도 우도농악의 소박한 형태가 잔존하고 있으나, 전승 상태가 나쁘다.

우도 농악의 고형적인 진수로는 고깔법고놀이가 있는데 지금은 좌도적인 윗놀이에 치어서 그것이 제대로 발휘되지 못하는 실정이 되었다. 우도 농악의 잔형을 비교적 잘 알아 볼 수 있는 곳은 현재 이리지역인데, 이리농악은 85년 12월 1일자로 무형문화재 제11호가 지정되어 우도 농악의 보존과 계승에 기여하게 되었다. 그러나 현재의 이리농악은 이리 지역에서 싹터서 전승되어온 것이 아니라 부안 출신의 김형순(54)씨 등을 중심으로 우도 가락의 쇠꾼들과 잽이들이 모여서 재정비한 농악이다. 그래서 지역적 순수성과 토착적인 생명력은 약한 편이나, 우도 농악의 원형(고형)을 가장 잘 정비하고 있다는 점에서 이 농악의 가치와 의의는 부인할 수 없다.

이리 농악의 종류로는 <매굿>, <마당 밟기>, <당산굿>과 같은 축원농악, <모방고>, <두레굿>과 같은 노작농악, <고사굿>과 같은 걸림 농악, <깃굿>, <판굿>과 같은 연예농악 형태들이 있다. 그런데 <모방고>가락은 전승되지 않고 있고 <두레굿>은 벼농사의 기계화로 이제는 거의 치지 않는다.

<판굿>을 치는 절차는 <채굿>, <진풀이>, <개인놀이>, <도둑잽이굿> 등의 순서로 전개되지만, 이를 더 세분하면 <낸드름질굿>, <우질굿>, <좌질굿>, <양산도>, <안바탕>, <호호굿>, <달어치기>, <미지기굿>, <짝드름>, <일광놀이>, <구정놀이>, <인사굿>, <방울진 굿> 등으로 나눌 수 있다.

음악적 특성으로는 비교적 느린 가락이 많고 다채로우며 구성지다. 좌도 농악의 꽃인 <영산>과 <싹드름>이 약하고, 대신 <오채질굿>이 강하다.

동작 면에서도 상쇠의 <상모놀이>와 <장고춤>, <법고춤>, <행진무>가 좌도보다 다양하다.

우도 농악의 전승지역을 하나 더 들자면 김제 농악인데 이 농악은 장수 번암 출신의 백남윤(70)씨를 중심으로 해서 최근에 각지의 농악꾼들을 모아 급조된 농악이기 때문에 그 우도 농악적 특성과 현장성을 찾기에는 아직 어렵다. 그러나 백남윤씨는 전해오는 우도 농악의 가락과 연행 내막을 자세히 기록 도해하여 그 업적이 크게 부각되고 있다.

 

5. 이름난 굿쟁이와 향토 농악 연구가, 기타

 

전북의 이름난 굿쟁이들은 그들이 지닌 솜씨와 기예를 제대로 전수하지도 못한 채 거의가 다 세상을 떠나고 있다. 장고 가락의 명인, 임실의 신기남옹도 얼마 전에 타계했다. 지금 생존해 있는 분들로는 진안의 좌도 농악 상쇠 김봉렬(74)씨와 임실의 양순용(48)씨, 부안의 우도 농악 상쇠 박남석(69)씨, 김제의 소고잽이 백남윤(70)씨, 정읍의 징쇠 김용업(53)씨 등을 들 수 있다.

 

김봉렬씨는 현재 진안군 성수면 도동리 중평 마을에 거주하며 18세 때부터 농악을 배우기 시작하였다. 진안군 백운면의 김인철씨에게 수학했으며 실력이 붙자 걸립패를 인솔하고 다니기도 하였다. 그는 상쇠뿐만 아니라 북·징·장구·피리에도 능하다. 그러나 마을에는 농악대를 꾸밀 사람이 부족하고 연로한 데다가 손까지 다쳐, 중평농악의 장래에 어두운 그림자를 드리우고 있다.

 

양순용씨는 임실군 강진면 필봉리에서 태어나 4대째 계속해온 상쇠로 아버지 양병철씨로부터 농악을 배웠다. 그는 그동안 필봉농악으로 전국민속경연대회에서 대통령상을 수상하는 등 좌도 농악의 보존과 부흥에 기여하였다.

 

박남석씨는 부안군 줄포면 우포리에서 태어나 2대째 내려오는 상쇠로서, 어려서부터 걸림 패의 농악을 보고 이에 몰두하기 시작하였으며, 열네 살 때는 걸립패에 가담하여 잡색의 무동으로 잔심부름을 하면서 곰소의 상쇠 김바우와 정읍의 김도삼으로부터도 배웠다. 십오 세에는 중쇠로서 상쇠의 뒤를 이었고, 이십 세 이후는 상쇠로서 전국 방방곡곡에 알려지게 되었다. 삼십 세 이후로는 전국 각지의 농악경연대회에 출전하여 스무 번 이상이나 최고상을 받았고 전주 농고 등 여러 곳에서 농악을 지도하였다. 현재는 몸이 불편하여 농악 기능의 보존과 전수에 많은 어려움을 겪고 있다.

 

백남윤씨는 장수군 번암면에서 태어나 번암국민학교를 중퇴하고 열한 살 때부터 굿판에 뛰어 들었다. 열네 살 때에는 정읍군 태인면의 김도삼에게 쇠와 장고와 춤을 배웠으며 동작이 유연하여 소고춤을 특히 잘 하였다. 열아홉 살 때에는 부안의 김바우에게 본격적인 농악 수업을 받았고, 스무 살에는 남사당패에서 소고를 전공한 정읍의 김광래씨에게서 독특한 소고 기능을 익혔다. 그 후 정읍 농악단의 창립 멤버, 각급 학교 및 단체 기관의 농악 지도 강사와 많은 수상 경력을 갖고 있다. 특히 그에게서 중요한 것은 계속해서 써온 농악인으로서의 일기와 그 속에 담긴 농악에 관한 기록이다. 여기에는 농악의 동작과 쇠가락, 장고가락 등이 그림의 도해와 함께 기록 설명되어 있고, 그의 스승이었던 김도삼의 삼채가락, 김바우의 무용, 김광래의 상모놀이 등이 상세히 기록되어 있다.

 

김용업은 정읍군 북면 화해리에서 김몽치의 장남으로 태어나 농악경연대회에서도 여러 번 수상하였다. 어려서는 잡색의 무동으로, 왜장녀 역도 했고 스무 살 때에는 정읍의 李正範농악대에서 징 수업을 받았다. 스물 네 살 때 지원병으로 군에 입대했다가 부상으로 제대한 후 계속 농악에 정진하여 전라도 특유의 <좌질굿>, <우질굿>으로 구분되는 매우 까다로운 <오채질굿>의 혼합박자를 그는 모두 능란하게 다룰 수 있다. 그의 무용도 일품으로 평가되고 있다.

 

우리 나라의 농악을 연구하는 사람은 지극히 드믄 실정이지만, 전북 농악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이 방면의 연구가들로는 앞서 언급했던 김제의 백남윤(70), 전주의 이기주(65), 권희덕(46), 군산의 박순호씨 등이다.

 

백남윤씨는 실기와 이론을 겸비한 분으로 실기로는 특히 소고놀이에 특징이 있다. 어려서부터 배운 스승 김도삼·김바우·김광래 등의 가락과 동작을 상세히 기록하고 그리는 작업을 하는 한편 농악인으로서의 일기를 써온 것도 귀중한 문헌이다.

 

이기주씨는 전주 출신으로서 어려서부터 예능 방면에 뛰어난 소질을 보여, 음악 공부를 즐겨 하였고 그 후 전주 농고 재직시(1956)부터 전통 예술에 몰두하기 시작하여 전주 권번의 上首才人이었던 정갑성씨의 아들 정형인씨의 기예에 반하여 그의 문하에 들어가 무용을 비롯한 전통 기예를 두루 익혔다. 나중에는 정형인씨 대신 그가 지도하던 국악의 모든 부서(삼현부창부·농악부·무용부)를 도맡아 가르칠 정도였다. 그는 전북지역의 3현악도 깊이 연구하여 그 자료는 분실하고 없으나 아직도 그 골자를 잘 기억하고 있다. 무엇보다는 그는 전북의 농악을 깊이 연구하여 필사본으로 써서 농악의 일반적인 개관과 전북 농악의 특징과 연행 방법을 자세하게 설명해 놓고 있다.

이 필사본 저술의 대략을 보면 먼저 자기가 창설한 농악예술반의 유래, 농악의 굿거리, 국악의 당면 과제, 교육 기관을 통한 국악의 보급책, 국악 진흥의 방책, 박남석씨의 문굿 해설이 있다.

 

그 다음으로 농악의 본격적인 설명이 이어지는데 1. 농악의 유래, 2. 농악의 형성 과정, 3. 농악의 형태와 특징, 4. 농악과 계절, 5. 농악의 채와 가락, 6. 농악대의 편성, 7. 기법과 용어, 8. 농악의 순서와 해설, 부록으로 농악진행도설로 되어 있다.

그의 말에 의하면 현재 연행되고 있는 농악은 많이 변질이 되어 그 옛 모습을 제대로 지니고 있지 못하다. 다시 지금이라도 우선 농악의 바른 모습을 제대로 찾는 것이 급선무이며 그러기 위해서는 현재 생존해 있는 시골의 농악 기능 보유자들을 모아서 연행시켜 이를 바탕으로 그 원뿌리를 찾아서 다시 가다듬어야 한다. 그는 옛 가락과 동작과 그 '정신'을 꿰뚫어 알고 있으므로 연행하는 모습을 보고 그 진수를 다시 찾아 낼 수가 있다고 말한다.

그는 좌농악의 진수를 지닌 마지막 기능 보유자로 완주군 소양면 대흥리의 손판돌(1906년 생)과 전남 구례의 상쇠 기창수씨를 친다. 그는 이 두 분이 어울려 친 옛 좌도 농악의 독특한 윗놀이 동작도 두루 기억하면서 순수한 좌도농악 재현의 꿈을 꾸고 있다.

옛날에는 확연했던 좌도 굿과 우도 굿의 순수성이 사라지고 예술성과는 별 관계없이 마구 뒤섞이는 데 대하여 안타까워한다. 그는 우도농악의 특징인 고깔법고놀이도 정형인씨에게 배워서 잘 파악하고 있다. 최근에 그는 이를 다시 살리기 위해서 김제군 광활면에서 70여 세의 고깔법고놀이 기능 보유자를 찾아냈고, 아직도 미미하게나마 그 소박한 옛 우도농악의 고형을 재현하여 정착시키려는 계획을 가지고 있다.

그에 의하면 현재 무형문화재 11호로 지정된 이리농악도 우도의 순수성을 어느 정도 지니고는 있으나 순수한 우도가 정착된 것이 아니기 때문에 문제라고 한다. 그는 또 좌도농악을 진안군 성수면 중평리에다가 김봉렬씨를 중심으로 재현 정착시키려는 계획을 갖고 있다.

그는 늙은 인간문화재의 기능을 과신하는 것은 문제가 있다고 지적한다. 몸으로 하는 연행예술은 너무 고령이면 안되며, 50세 이하의 사람들에게 진수를 제대로 가르쳐 뿌리내리게 해야 예술적으로 생기를 얻고 살 수 있다고 한다. 젊었을 때는 특별한 무엇이 있었을 것이나 늙으면 '김빠진 맥주'라는 것이다. 지금 남아 있는 농악의 기능 보유자들은 그 농악의 진수를 제대로 발휘하지 못하므로 이것을 바탕으로 다시 재구해야 한다. 지금은 아직 그 뿌리 찾기가 가능하지만 더 이상 시간이 지나면 어렵다고 한다.

또 전북지방은 전통 예술이 풍부한 고장이기에 이 지역의 젊은이에게 향토 예술을 정리해주고 전수할 수 있는 국악학교의 설립이 절대 필요하다고 한다. "필봉농악은 좌도가 아니다. 망가졌다. 답답하다. 다시 재구성하고 싶다"고 그는 안타까워한다. 지금은 전국적으로 전라 우도 농악이 펴져, 심지어 부산의 농악에까지 우도 가락이 스며들어가게 되었지만, 우선 그 지역의 특징을 지닌 그 지역 농악을 살리는 것이 급선무이다. 같은 호호굿이라도 좌도와 우도가 다르다. 그러나 아직 현대의 때가 끼지 않은 토박이 상쇠도 있다.

지금의 농악무는 다른 무용가락이 섞이어 들어가서 순수하고 소박한 농악 나름의 몸놀림이 변질되었다. 이제는 독특한 것을 제대로 찾을 때가 되었다. 옛날에는 같은 좌도, 우도라도 골짝 하나만 넘어도 달라졌으나 지금은 모두 똑같다.

중부지방의 농악이 모의 노동행위를 하는 노작농악이라면 남부지방의 좌·우도 농악은 3국 대치 시에 지루함을 잊고 군사적 목적을 살리기 위해서 이루어진 農軍樂이다. (<호호굿>은 군대의 점호, 오방진은 진 쌓는 것과 관련됨) 전라 좌도농악은 경상도에서 넘어온 것이다. 좌도농악은 윗놀이인 상모돌리기가 주가 되고 산세에 따라 동적이며 격렬하고 마치 쌈 싸우는 것 같이 한다 호남 좌·우도의 농악은 원래 웅장한 맛이 있고 군대 조련 때처럼 엄숙미가 있어야 한다. 그래서 전사섭과 이명식의 장고는 서로 다르게 들린다. 전자가 흥행방식이라면 후자는 정신과 얼이 들어 있다. 농악을 살리려면 잘못 끼인 가락과 동작을 빼고 그 지역의 그대로를 정신과 함께 살려야 한다. 또한 농악은 저 혼자 있는 것이 아니므로 마을의 대동굿(당산굿·풍어제 등)과 함께 살려야 한다.

 

이상이 이기주씨 말씀의 대강이다. 그는 오늘도 농악의 길이 잘못되어 가고 희미해져 가는 것을 안타까워하고 기회만 주어진다면 못쓰게 변질되지 않은 진짜 전북의 농악을 되살려 정착시키겠다고 말한다.

다음으로 들 수 있는 분은 권희덕(46)씨로 그는 전북 정읍군 옹동면 산성리에서 태어나 어려서부터 농악의 기예와 정신을 몸에 익힌 분으로 그동안 전국각지를 누비며 농악의 실제를 찾아 연구하는 한편 여러 학교에 농악대를 창설하고 지도하였다. 그는 또 농악의 가락을 악보화할 수 있는 채보 능력을 가지고 있어서 농악의 진귀한 가락들을 기호화하여 보존하는 데도 기여하고 있다. 1981년에는 <농악·선예굿·악기놀이>라는 책을 후반기출판사에서 간행하여 이 분야에서 그가 그간에 쌓은 공력을 활자화하였다.

이 책은 찾아보기 어려운, 농악에 관한 훌륭한 개설서로서·농악의 역사적 고찰·여러 가지 농악의 이해와 해설·12채 농악해설·농악체조·지방별 농악의 도해 악보·기능별 농악의 도해악보·학생 교육농악·이상적인 농악경연 심사기준표 등의 순으로 구성되어 있다. 이 책의 특장은 다른 것도 많지만, 우리의 농악이 몸에 배인 젊은 실력자(그는 쇄납을 특히 잘 다룸)가 일생동안 스스로 전국을 돌아다니면서 농악의 진수와 요체를 찾아서 그것을 종합적으로 알기 쉽게 정리 해설하고 역사적으로 고증하려고 한 점이다.

그는 이 책 외에도 만족 예술 전 분야로 시야를 넓히고 깊이 천착해 들어가고 있다. 이제 우리 민족 예술의 연구는 한 가지만 붙들고 앉아 있어서는 안되고 그 뿌리에까지 찾아 들어가 다시 그 전체상을 종합적으로 연구해야 한다는 것이 그의 지론이다.

 

마지막으로 더 들어야 할 분은 군산의 박순호씨이다. 그는 일찍부터 전북의 민속 전반에 관심을 기울여 전북의 모든 지역을 발로 누비며 민속·민요·놀이·무당굿·농악 등 민중문화 전반에 걸친 조사를 많이 한 분으로 아려져 있다. 농악 분야에는 현재 이리 농악을 육성하는데 참여하고 있다.

전북은 농악의 고장인 만큼 그 동안 농악기를 만드는 뛰어난 장인도 많았다. 대체로 악기로는 정읍과 남원의 것을 제일로 친다. 장고에 관해서는 고 신기남씨가 그 제조법에도 밝았으나 이미 작고했고, 정주시의 서남규와 그의 아들 서기석씨가 만들고 있는 장고가 훌륭하다. 이들은 기계나 종업원을 따로 쓰지 않고 수제품으로만 만들어 왔으나 요즘은 장고의 수요가 증가함에 따라 장고의 통을 깎는 기계 설비를 하여 만들고 있다.

 

6. 맺는 말

 

이상에서 전북의 농악을 간략히 살펴보았지만, 농악의 문제는 우리 민족 예술의 전반적인 문제와 그 궤를 같이 한다. 농악을 사리려면 어떻게 해야 한다고 하는 말도 더 이상 효력이 없는 때가 되었다. 이제 문제는 말이 아니라 우리 모두가 관심을 가지고 우리 스스로가 농악의 주체가 되고, 농악을 우리 예악의 정당한 자리, 그 중심에 있게 하는 것이다.

다른 예술 분야에 비해서 농악의 향수 인구와 연구인원이 적고, 특히 젊은 10대 층에 적은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동양적이고 한민족적인 전통 예악 가무의 원리에 바탕을 두고, 민중적이고 민족적인 예술을 창조하고자 하는 뜻 있는 사람들의 뼈를 깎는 고행 속에서 우리의 농악은 다시 새롭게 살아날 것이다.

농악은 이제 농어촌의 당산제나 풍어제 같은 마을 대동굿과 함께 그의 정당한 삶의 자리로 되돌아가야만 할 때가 왔다. 뜬패들의 공연예술로서의 농악이 아니라 각 마을 사람들이 주체적으로 지니고 사는 농악이 뿌리를 내려야 할 때가 왔다. 도시는 도시대로 도시 문화의 상처를 치료하기 위해서는 농악이 끼어들 수 있어야겠다. 전북에는 얼마 안 있으면 전주시 덕진동에 사습놀이 전수회관이 준공될 예정이다. 이 건물이 완공되고 향토예술인들이 조금이나마 설 수 있는 기회가 주어진다면 농악에도 가느다란 미풍이 불어올지도 모른다.

문제는 우리 민족의 근본적이고 본질적인 문화 창조 능력의 확보와 단련인데, 우리의 농악, 특히 전북 농악의 앞길이 열리면, 이 큰 흐름의 깊고 큰 원천의 하나가 될 것이라고 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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