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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스토리

전북 전통예술의 이해

전라북도 전통예술의 이해

 

류 장 영 (전라북도립국악원)

 

 

1. 전라북도와 전통음악

 

전라북도는 농도이다. 까마득한 옛날부터 드넓은 호남평야를 중심으로 정착생활을 해온 전라북도 사람들은 농경사회를 이루고 농경문화를 삶의 기반으로 삼았다.

이러한 전라북도의 농경문화는 마한의 5월 기풍제와 10월의 추수감사제 그리고 벽골제 등과 같은 까마득한 상고시대의 제의와 유적 등을 통해서도 확인할 수 있다.

전라북도의 지리적 조건은 풍부한 농수산물의 생산을 낳게 되었고, 풍부한 경제야말로 문화발전의 밑거름이 되었음은 말할 나위가 없다.

그런가 하면 이 때문에 오히려 전라도 지역은 가장 가혹한 수탈의 대상이 되기도 하였다. 동학농민혁명이 우리 지역에서 발생한 것도 따지고 보면 가렴주구가 가장 극심했던 지역임을 말하여 준다. 또한, 전라도 땅은 태조 왕건의 훈요십조 이후 끊임없는 정치적 소외와 탄압의 대상이 되었다. 일반적으로 따뜻한 지역에 거주하는 사람들은 추운 지역에 거주하는 사람에 비해서 전쟁을 싫어하고 평화적이라고 한다.

그리고 전라도 지역에서는 소위 세습무(世襲巫)과 그 주변 집단에 의해 각종 음악이 연행되어 왔다. 세습무라고 하는 혈연 무집단(巫集團)은 대물림을 통해 예술성 높은 무굿을 주관하면서 전문적인 소리와 연주 그리고 춤을 발전시켜 왔다.

그리고, 모계로 세습되는 이러한 세습무(‘단골’ 혹은 ‘당골’)의 주변에는 남자로 구성되는 소위 광대집단이 있었으니, 이들은 ‘고인’으로서 단골의 무의식에 반주자로 참여하기도 하고, 관청이나 중앙의 중요한 행사에 동원되어 악기를 연주하고 재주를 부리고 소리를 하였으며, 일반 가정에도 고사소리 등으로 축원을 비는 전문예술인으로서의 역할을 담당해 왔다.

전라북도는 이렇게 농경사회의 풍부한 생산물, 가혹한 수탈과 정치적 소외에 의한 현실 도피 심리, 풍류와 멋을 즐기는 기질, 그리고 세습무와 광대집단의 형성과 같은 이유가 결합하여 판소리, 농악, 산조, 시나위, 풍류음악, 민요, 무악 등과 같은 빼어난 전통예술의 보고가 되었던 것이다.

 

 

2. 판소리란 무엇인가?

 

(1) 판소리의 개념

판소리는 한 사람의 소리꾼(唱者)이 고수(鼓手)의 북 반주에 맞춰 극적(劇的)으로 구성된 긴 이야기를 ‘소리’(歌)와 ‘아니리’(말)와 ‘발림’(몸짓)을 통해 전달하는 우리 나라 고유의 전통공연예술이다.

‘판’의 용어는 세 가지로 해석되는데, 첫째 굿판․춤판․씨름판과 같이 어떤 일이 벌어지는 자리(局面), 둘째 씨름 한판․바둑 한판과 같이 처음부터 끝까지라는 완결(完結)의 의미, 셋째 판춤․판굿․판염불․판소고와 같이 전문예능인들이 벌이는 전문적(專門的)인 예능(藝能)이라는 뜻이 그것이다. ‘소리’는 판소리․민요․잡가처럼 민간에서 불리는 성악곡을 부르던 일반적인 명칭이다.

 

(2) 판소리의 공연 형태

순조 때 윤달선(尹達善)의 <광한루악부>(廣寒樓樂府)에는 판소리에 관하여 다음과 같이 쓰여 있다. “창우희(倡優戱)는 한 사람은 서고 한 사람은 앉아서(一人立一人坐), 선 사람은 소리를 하고 앉은 사람은 북을 쳐서 박을 짚는데(而立者唱 坐者以鼓節之), 잡가 12곡으로 이루어진다(凡雜歌十二腔)” 이와 같이 판소리는 소리를 하는 창자(唱者)와 북을 치는 고수(鼓手) 두 사람이 공연을 한다. 지금의 창극(唱劇)은 여러 사람들이 각자 다른 배역을 맡아서 공연을 하지만, 판소리는 오직 한 사람이 모든 배역의 역할을 담당해 공연하기 때문에 표현하는 음역의 폭이 넓고 성음의 변화에도 능해야 한다. 또한 고수는 무율타악기인 소리북으로 치는 장단과 추임새에만 의존해 반주하기 때문에 같은 장단이라고 하더라도 창자의 소리에 따라 다양하고도 적합한 가락(변채가락)을 순간 순간 선택해 연주하는 능력이 있어야 한다.

 

(3) 판소리의 유래와 역사

판소리를 생성시킨 주도 세력은 한강 이남의 시나위권, 특히 전라도 지역에서 활동하던 무격(巫覡)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오늘날에도 시나위권의 단골(丹骨)들이 부르는 서사무가(敍事巫歌)에는 그 연행 형태, 장단, 음조 등에서 판소리와 유사한 점을 쉽게 발견할 수 있다. 따라서 17세기, 즉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이라는 중세적 격변기를 거치며 급격히 성장한 평민층의 현실적인 불만과 욕구, 그리고 무엇보다도 최하층의 천민으로서 신분 변화를 꿈꾸던 무격(巫覡)들의 이상이 결합하여 판소리라는 새로운 민속 예술이 탄생된 것으로 보인다. 판소리 유래에 관한 학설로는 무가기원설, 육자백이토리설, 판놀음기원설, 광대소리기원설 등이 있다. 지금까지 발견된 판소리 사설 자료 가운데 가장 오래된 것은 조선 영조 30년(1754년)에 만화(晩華) 유진한(柳振漢)이 지은『만화집(晩華集)』의 <춘향가(春香歌)> 한시(漢詩) 사설 200구(句)이다. 문헌 자료에 의하면, 늦어도 정,순조 때는 12종의 판소리 바탕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당시에는, 과거에 급제하면 광대(廣大)와 재인(才人)들을 불러 3일유가(三日遊街)하고 홍패고사(紅牌告祀)를 지내던 풍습이 있었다. 그런데 정조 때의 가난한 선비였던 송만재(宋晩載)는 잔치를 베풀 수 없었으므로 글로 대신하였는데 그 글이『관우희(觀優戱)』다. 관우희(觀優戱)에는 <심청가>,<춘향가>,<흥보가>,<수궁가>,<적벽가>,<변강쇠타령>,<배비장타령>,<장끼타령>,<옹고집>,<왈자타령>(↔무숙이타령),<강릉매화전>,<가짜신선타령>(→숙영낭자전) 등 12바탕의 판소리 내용이 소개되어 있다. 이 가운데 오늘날에는 <춘향가>,<흥보가>,<수궁가>,<적벽가>,<심청가>의 다섯 바탕이 남아 있다. 이들의 주제(主題)는 오륜(五倫)에서 각각(各各) 찾을 수 있는 바, 부부유별(夫婦有別), 장유유서(長幼有序), 군신유의(君臣有義), 붕우유신(朋友有信), 부자유친(父子有親)이 바로 그것이다. 숙종말 이후 영,정조 때에는 우춘대, 하은담, 최선달과 같은 명창이 있었다. 순조 무렵에는 권삼득, 송흥록, 모흥갑, 염계달, 고수관, 김제철, 주덕기, 황해천, 박유전, 송광록 등의 명창이 있었는데, 이 중 여덟을 골라 ‘전기 8명창(前期 八名唱)’이라 한다. 이때는 특히 판소리의 음악적 수준이 크게 향상되었다. 권삼득의 설렁제, 모흥갑의 강산제(→東강산제), 염계달·고수관의 경드름과 추천목, 김제철·신만엽의 석화제 등 독특한 음악적 더늠이 나온 시기다. 남원 운봉의 송흥록은 동편제의 시조(始祖)로, 순창에서 태어나 보성 강산에서 살았던 박유전은 서편제의 시조(始祖)로, 경기도 여주 출신의 염계달은 중고제의 시조(始祖)로 삼는다. 박유전은 보성 강산에서 오래 살았기 때문에 그의 소리 법제(法制)를 ‘강산제(岡山制)’라 하는데, 이것은 모흥갑의 ‘동(東)강산제’와 구별되는 ‘서편(西便)의 강산제(岡山制)’인 것이다.

 

∙ 동편제 始祖 - 송흥록. 전라도 남원 운봉 태생

∙ 서편제 始祖 - 박유전. 순창에서 태어나 보성 강산에서 살았음

∙ 중고제 始祖 - 염계달. 경기도 여주 출신

 

동서편의 구분은 산악 대 평야, 혹은 섬진강의 좌우를 그 분기점으로 삼는다. 지형적인 특색으로 말미암아 동편제는 빠르고 씩씩하며 웅장하되 고졸한 소리가 주류를 이룬다. 반면에 서편제는 느리고 애잔하며 장식음이 많고 기교적인 소리가 주류를 이룬다. 그리고 가왕(歌王)으로 불리던 송흥록은 진양 장단을 완성하였다. 철종 무렵에는 박만순, 이날치, 송우룡, 김세종, 장자백, 정창업, 정춘풍, 김찬업 그리고 김정근, 한송학 등이 활약하였는데 그 중 여덟을 골라 ‘후기 팔명창(後期 八名唱)’이라 한다. 전기 팔명창시대는 판소리가 동편, 서편, 중고제 등의 流派로 분화되어 제각기 다른 스타일로 발전하기 시작한 시기인데 반해, 후기 팔명창시대는 이러한 유파적 특성과 음악적 특색이 정착되고 더욱 심화된 시기라 할 수 있다. 후기 팔명창 중에서 박만순·송우룡·김세종·장자백·김찬업은 동편제를 이었고, 이날치·정창업은 서편제를, 김정근·한송학은 중고제를 각각 계승하였다. 고종 후기에서 일제하의 1930년대까지를 ‘오명창 시대(五名唱 時代)’라 한다. 그리고 김창환, 송만갑, 이동백, 김창룡, 정정렬, 박기홍, 유성준, 김채만, 전도성 등의 명창 중 다섯을 골라 ‘오명창(五名唱)’이라 한다. 대개 송만갑, 이동백, 김창환, 김창룡, 정정렬을 꼽는다. 1940년 이후에는 김정문, 정응민, 공창식, 장판개, 조몽실, 임방울, 김연수, 박동실, 정광수, 성원목 등의 남자 명창과 이화중선, 박녹주, 김여란, 박초월, 김소희 등의 여류 명창이 활약하였다.

판소리는 18세기에 이르러 하나의 독립된 예술 장르로 확고히 자리잡게 되었다. 이때까지는 일반 서민들의 호응이 절대적인 뒷받침이 되었다. 적어도 이때까지는 12바탕의 판소리가 있었음이 확인되었다. 이후 판소리는 점차 양반들의 관심과 사랑을 받으면서 양반들의 기호에 맞는 내용으로 변화하였다. 양반들은 사설의 윤색과 개작에 많은 관심을 기울였는데, 19세기 후반 고창의 신재효(1812~1884)는 구전(口傳)으로 전수되던 판소리 사설 가운데 여섯 바탕을 직접 문자로 정리하였다. 중인으로서 아전 출신이었던 그는 풍부한 재력을 바탕으로 많은 판소리 제자를 배출하고 후원하였는데, 특히 판소리계 최초의 여자 창자인 진채선에 관련된 많은 일화가 전한다.

 

(4) 판소리의 구성

판소리는 아니리, 소리, 발림으로 구성된다. 최근에는 추임새를 중요한 요소로 보아 판소리의 구성 요소를 아니리, 소리, 발림, 추임새의 네 요소로 보는 경향이다. ‘아니리’는 소리가 아닌 말로 설명하는 부분이다. ‘소리’는 ‘일왈창’(一曰唱)이라는 말이 있듯이 판소리의 핵심이 되는 요소이다. 말 그대로 창(소리)로 표현하는 부분이다. ‘발림’은 무용적인 동작을 말한다. 판소리는 한 사람이 등장인물들이나 상황을 모두 표현하는 예술이기 때문에 적절한 몸동작을 곁들여 공연함으로써 보다 효과적인 표현을 유도하고 있다. ‘추임새’는 반주자인 고수뿐만 아니라 구경하는 관객도 함께 넣는다. 창자를 추어주는 일종의 조흥사의 구실을 하며 추임새를 통해 반주자와 창자 그리고 무대와 관객을 열린 구조 안에 하나로 만든다.

그렇다면, 소리판은 어떻게 구성되는가? 소리판은 말할 것도 없이 무대, 창자, 고수, 관객으로 구성된다. 무대는 양반의 사랑이나 대청마루 혹은 잔치집의 마당, 장터의 가설무대 등이었으나 지금은 일반적인 공연용 무대를 많이 사용한다. 창자는 전통적인 창옷(요즈음은 보통 소매가 넓은 양반용 두루마기를 무대용으로 개발한 것) 속에 바지 저고리를 입고 갓을 쓴다. 도상자료를 보면 예전에는 중갓을 썼으나 지금은 창이 넓은 양반갓을 쓴다. 오른손에는 합죽선을 들고, 왼손에는 수건을 든다. 합죽선은 창자의 땀을 식히기도 하고 장면을 설명하는 소도구로 이용되기도 한다. 수건은 두루마기 소매 속에 넣어 두었다가 때때로 꺼내어 땀을 닦는다. 고수는 역시 바지 저고리에 두루마기를 걸치고 갓을 쓴다. 고수는 북채를 쥐고 소리북을 앞에 놓고 창자의 왼쪽에 비스듬히 창자를 바라보며 앉는다. 고수가 북을 잡고 앉는 집고 자세에는 두 가지가 있으니, 하나는 오른발을 왼발 위로 올려 앉는 자세이며, 하나는 왼발이 오른발 위로 올라오는 보통 양반다리라고 일컫는 자세이다. 대개는 후자의 자세를 택한다. 고수는 창자의 소리를 주의 깊게 들어가며 소리에 부합하는 장단을 짚어갈 뿐만 아니라, 적절한 추임새를 넣어 창자와 관객의 흥을 돋구기도 한다. 또한 창자가 사설 내용을 잊어버렸으면 재치있게 이를 일러주기도 하고, 소리하는 속도를 조절해 주기도 한다. 관객들은 서양식 음악회처럼 숨소리를 죽여가며 조용히 앉아 감상만 하는 것이 아니라 적극적으로 공연에 개입하며 무대 위의 창자 고수와 함께 적극적으로 판을 만들어 간다. 이런 역할을 하는 것이 추임새이다.

 

(5) 판소리의 악조

판소리의 조에는 우조(羽調), 계면조(界面調), 평조(平調)의 세 가지가 있다. 이 중 우조와 계면조가 판소리의 양대 악조에 속하고 우조와 계면조의 중간에 평조가 존재한다. 판소리에서는 원래 호령조, 엄성, 설움조, 경조, 추천목, 권조, 석화제, 반드름 등의 악조와 관련된 용어가 있었으나, 선비들의 음악인 정악의 영향을 받아 정악에서 사용하던 우조, 평조, 계면조 등의 용어를 쓰게 되었다. 우조는 가곡, 시조와 같은 정악의 선율을 판소리에서 사용한 것을 일컫는다. 웅장하고 호탕한 느낌을 주기 때문에 남성답고 호기 넘치는 장면에서 사용한다. 진우조, 가곡성 우조, 평우조로 세분하기도 한다. 우조는 서양 계이름으로 치자면 솔-라-도-레-미의 음계로 구성되며 특히 판소리의 우조는 라음이 생략되는 경우가 많아 솔에서 본청인 도음으로 완전4도 도약진행이 많다. 솔-라-도-레-미의 음계는 혼히 창부타령조라고 일컫는 서울 경기 지역의 음악을 대표하는 음계이다. 그러나 순차진행이 많아 부드러운 느낌을 주는 창부타령조에 비해 판소리의 우조는 도약진행으로 씩씩한 느낌을 준다. 평조는 역시 정악의 영향을 받은 음악으로 서양의 계이름으로 치면 레-미-솔-라-도의 음계를 지니고 있다. 그러나 이것은 백대웅의 선법 이론에 의한 것이며, 전통적으로는 예를 들어 춘향가 중 사랑가나 금의 내력을 아뢰는 대목과 같이 계면조의 음계를 지닌 곡이라도 가볍고 너끈한 발성을 사용하는 악상으로 표현된다면 평조라고 불러왔다는 점을 주의해야 한다. 계면조는 서양의 계이름으로 미-솔-라-시-도-레의 음계를 가진 슬프고 애절한 느낌을 주는 악조이다. 평계면, 단계면, 진계면으로 구분하기도 한다.

이 밖에도 경드름, 반드름, 권제, 석화제 등이 있다. 경드름은 19세기 초 경기도 여주 출신의 염계달이 창제하고 일제 때 활약했던 송만갑(1965~1939)이 발전시킨 것으로 경조라고도 한다. 서울 사람이나 왈자들의 행동을 표현할 때 사용하는데, 이도령이 춘향이 달래는 대목, 남원골 한량들이 사또 욕하는 대목 등이다. 반드름은 반경드름이라고도 하는데 경드름에 계면조가 살짝 물들인 것을 말한다. 권제는 권조, 덜렁조, 설렁제 등으로 일컫는다. 가마꾼이 가마 모는 소리를 판소리화 했다는 것으로, 완주 용진 출신으로 최초의 양반 광대(비가비)였다는 권삼득이 창제해낸 창법이다. 춘향가에서 군로 사령이 춘향이 잡아 들이는 대목, 심청가에서 남경장사가 처녀를 팔라고 외치는 대목, 흥보가에서 놀보가 제부 후리러 가는 대목 등이 이에 해당한다.

 

(6) 판소리의 장단

판소리에 사용되는 장단은 7가지이다. 그것은 진양, 중머리, 중중머리, 자진머리, 휘머리, 엇머리, 엇중머리이다. 판소리 장단은 북반주에 의해 이루어지는데, 판소리 반주에 사용되는 북을 소리북, 혹은 고장북이라고 한다. 소리북의 타점은 합궁점(*합,*덩), 반각점(*따,*딱), 매화점(*따르락,딱), 온각점(대각점, *척), 채궁점(당,다), 뒷궁점(*궁, *구)으로 구분한다. 이를 대별하면 합궁점, 온각점, 뒷궁점으로 나눌 수 있으며, 이것은 각각 인(人), 천(天), 지(地), 그리고 음양으로 보자면 중성(中性), 양성(陽性), 음성(陰性)으로 구분된다. 판소리 장단의 원리도 이러한 음양의 법칙에 따른다. 즉, 판소리 장단은 반드시 중성으로 시작하여, 양성으로 맺고, 음성으로 푸는 것이며, 기(起 : 일어남)-경(景 : 그림)-결(結 : 맺음)-해(解 : 풂)의 원리가 차례로 적용된다. 기와 결 사이에 경을 두어 갖가지 사연과 삼라만상을 담고 있는 것이다. 또한 이것은 춘하추동(春夏秋冬) 사계절의 순환에도 비유된다. 참으로 판소리 장단의 원리는 우주의 원리에 다름이 없음을 알 수 있다. 실제 명창은 아니로되 소리를 잘 분별하여 들을 수 있는 사람을 귀명창이라고 했다. 전문적인 고수(鼓手)는 아니로되 창자의 소리를 듣고 장단을 분별하여 소리에 부합하는 장단을 치고, 또한 소릿속을 알아 이면에 맞게 북가락을 운용할 줄 알며, 적절한 변채가락과 추임새로 창자를 보비위(補脾胃)할 수 있는 사람은 한량북이라 하였다. 한량북은 비록 아마추어지만 북을 가운데 놓고 능히 전문 창자와 대면할 수 있는 사람이다.

 

① 진양(6박× 4각=24박)

미는 각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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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는 각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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딱딱-

딱-딱

맺는 각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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푸는 각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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궁궁-

궁-구

② 중머리(4분음 12박)

③ 중중머리(8분음 12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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④ 자진머리(점4분음 4박)

궁-따

⑤ 휘머리(4분음 4박)

궁따

⑥ 엇머리(8분음 10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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⑦ 엇중머리(4분음 6박)

그러나 실제 판소리 반주에서는 위에 든 기본 장단 외에 여러 형태의 변형가락(변채가락)이 사용된다.

 

(7) 단가의 이해

단가(短歌)는 바탕소리[本事歌]인 판소리 전에 부르는 짧은 노래를 말한다. 단가의 기능은 일종의 다스름[調音]에 있다고 하겠다. 창자는 목 상태를 미리 점검하고 목을 따뜻하게 만들어 줌으로써 본격적인 소리를 편하게 시작할 수 있고, 고수도 단가를 통해 미리 손과 목을 풀며, 청중들에게는 본격적인 소리에 대한 기대감을 높여주는 기능을 한다. 판소리에서 단가라는 말을 사용하기 전에는 가사나 별곡과 같은 장가(長歌)에 비해 짧은 노래하는 뜻으로 시조를 단가(短歌)라고 불렀으나, 지금은 판소리 부르기 전에 부르는 짧은 노래만을 단가라고 칭한다. 단가를 예전에는 영산(靈山)․허두가(虛頭歌)․초두가(初頭歌) 등으로 불렀다. 단가 한 편을 부르는데 소요되는 시간은 보통 3분~7분 정도가 소요된다. 단가의 장단은, 너무 느리지도 않고 너무 빠르지도 않은 중머리 장단이 주류를 이룬다. 그러나 ‘고고천변’과 같이 중중머리 장단으로 짜여진 단가도 있고, 또한 ‘사창화류’와 같이 오래된 단가는 엇중머리 장단으로 짜여져 있기도 하다.

단가의 선법과 음계는, 대부분 우조(솔음계)나 평조(레음계)와 같이 부르기 편하고 화평한 느낌을 주는 악조로 구성되어 있다. 그러나 ‘이산 저산’과 같이 근래에 만들어진 단가는 계면조(미음계)로 되어 있기도 하다. 단가 내용은 인사(人事)에 관한 것과 자연 풍경을 묘사한 서정적인 것이 대부분을 차지한다. 단가의 종류는 약 50여종에 이른다. 이중 오늘날 많이 불리는 단가는 만고강상, 진국명산, 고고천면, 죽장망혜, 불수빈, 강상풍월, 운담풍경, 풍월강산, 홍문연가, 백수한, 탐경가, 편시춘, 장부한, 소상팔경, 초한가, 초로인생, 사시풍경가, 백발가, 사절가, 호남가 등이다.

 

 

3. 전라북도의 농악

 

(1) 한국의 농악

우리 나라에서 농악은 북쪽으로 올라갈수록 약화되고 남쪽으로 내려올수록 강화되는 현상을 보인다. 남쪽에서도 서남쪽, 즉 호남지역의 농악이 풍부하다. 즉 농업이 발달하고 특히 논농사가 발달한 지역일수록 농악이 성행했음을 알 수 있다. 농악의 명칭은 1936년 조선총독부에서 발행한 『부락제』라는 책에서 처음 사용하였다. 전통적으로는 ‘매구’ ‘풍물’ ‘풍장’ ‘걸궁’ ‘걸립’ 등으로 불렀으며, 농악을 치는 것을 ‘굿친다’ ‘금고(金鼓)친다’ ‘매구친다’ ‘풍장친다’ ‘쇠친다’ 라고 불렀다. 농악기는 ‘굿물’ ‘풍물’ ‘기물’로 불렀다. 그런가 하면 농악을 종교적 기능에서 부를 때는 ‘굿’ ‘매굿’ ‘지신밟기’ ‘마당밟기’라 했으며, 노동예능으로 볼 때는 ‘두레’라 불렀고, 풍악이나 풍류로 해석할 때는 ‘풍장’이라 표현했다. 일부 지방에서는 농악을 군악으로 보아 ‘군고(軍鼓)’라 부르기도 한다. 농악의 유형은 ‘축원농악’ ‘노작농악’ ‘걸립농악’ ‘연희농악’으로 분류할 수 있다. 지역별로 구분하면, ‘경기충청농악’ ‘영동농악’ ‘영남농악’ ‘호남좌도농악’ ‘호남우도농악’으로 나뉘는데, 경기충청농악은 ‘웃다리농악’, 그에 반해 호남과 영남농악은 ‘아랫다리농악'이라고도 한다.

 

(2) 전라북도의 농악

농악이 가장 성행했던 전라도농악의 뿌리는 모두 전라북도에 있다. 전라도 농악은 두 파로 나뉘는데, 서쪽에 위치한 평야지대의 농악을 ‘호남우도농악’이라고 하고, 동쪽에 위치한 산악지대의 농악을 ‘호남좌도농악’이라 한다.

호남우도농악은 익산, 부안, 김제, 고창, 정읍, 군산, 장성, 영광, 나주, 광주, 함평, 무안, 목포, 영암, 장흥 등지에 전승되어 왔다. 호남좌도농악은 진안, 무주, 장수, 임실, 남원, 순창, 곡성, 구례, 화순, 광양, 순천, 보성, 승주 등지에 전승되어 왔다.

지형적인 면에서 보자면, 소백산맥과 노령산맥의 동부 산악권을 따라 호남좌도농악이 분포하고, 동부산악권에서 발원하여 서해와 남해로 흘러드는 하천의 중하류지대에 속하는 드넓은 호남평야를 배경으로 호남우도농악이 분포한다. 농악대의 편성은 ‘앞치배’와 ‘뒷치배’로 나뉜다. 앞치배는 ‘농기’ ‘영기’ ‘날라리’(새납, 태평소)와 쇠, 징, 장구, 북의 ‘사물’(四物)을 이른다. 뒷치배는 ‘소고’(법고)와 ‘잡색’을 이른다. 앞치배는 주로 연주를 담당하고 뒷치배는 춤이나 연극적인 놀이를 담당한다. 지신밟기나 두레농악악에서는 편성이 간소하나 전문적인 판굿을 벌일 때는 대편성을 한다.

상쇠는 농악단을 지휘하는 사람이기 때문에 옷이나 장식품이 가장 화려하다. 머리에는 화려한 부포상모를 쓰고, 흰바지 저고리 위에 반소매의 창옷(홍동지기)을 입는데 소매끝을 오색동이로 치장하기도 하고, 등에 궁글게 만들어 반짝이는 원형의 쇠붙이(거울)를 붙여 지위와 위엄을 나타내기도 한다. 또한 다른 치배들과 같이 화려한 삼색띠(색드림, 화복)를 어깨와 허리에 감고, 거울을 붙일 때는 등에 붙여 아래로 늘어뜨리기도 한다. 상모에는 채상모와 부포상모가 있다. 채상모는 전립 꼭대기 물채에 이어서 한지종이를 달아맨 것이다. 부포상모는 물채 끝에 부포(꽃상모)를 다는 것으로, 좌도농악에서는 물채 끝이 부드러운 노끈으로 된 부들상모가 쓰이고, 우도농악에서는 물채 끌에 철사를 넣어 뻣뻣하게 곧추 새울 수 있는 뻣상모를 쓴다. 좌도농악의 경우 대개 쇠꾼은 부포상모(부들상모)를 쓰고, 나머지 치배들은 채상모를 쓴다. 우도농악의 경우 대개 쇠꾼만 부포상모(뻣상모)를 쓰고, 나머지 치배들은 고깔을 쓴다. 이 밖에 판굿의 개인놀이에서는 열두발 채상모를 쓴 사람이 나와 열두발상모놀음을 펼친다. 쇠에는 암쇠과 숫쇠가 있다. 숫쇠는 고음이 나고 금속성 소리가 강하다. 암쇠는 다소 저음이 나며 부드러운 소리를 낸다. 상쇠는 숫쇠를 치는 것이 상례이다. 장구는 열채로 두드리는 채편이 원통이 작고 얊은 가죽을 사용하여 높은 소리인 수소리를 내고, 궁채로 두드리는 궁편이 원통이 크고 두꺼운 가죽을 사용하여 낮은 소리인 암소리를 낸다. 이 밖에 징에도 암징과 숫징이 있으며, 북은 예전에는 대북, 중북, 소북으로 나뉘었으나, 호남지방의 북은 좀 작고, 영남지방의 북은 좀 크다. 전라북도에서는 북놀음이 약화되고 장구놀음이 강화된 반면 영남지방과 전라남도에는 아직도 북놀음이 성행한다. 대개 외북채로 치나, 전라남도 진도와 경상도 금릉 그리고 김해 지방의 농악에서는 쌍북채 놀음을 한다. 호남좌도농악은 전원 상모를 써서 윗놀음(부포놀음)이 화려하나 상대적으로 밑놀음(굿가락)은 담백한 편이며, 가락이 빠르고 소박하며 단체연기에 치중하고 빠른 몸놀림을 특징으로 한다. 호남우도굿은 고깔을 주로 써서 윗놀음보다 밑놀음이 발달했으며, 느린 가락이 많아 치밀하고 다채로운 변주가 많고 개인놀음이 발달했으며 느린 춤사위를 특징으로 한다. 그러나 호남우도농악에서 뻣상모가 개발된 후로는 개인놀음에서 상쇠의 상모놀음이 중요한 비중을 차지하고 있다.

 

 

4. 전라북도의 민요

 

(1) 민요의 구분

민요는 흔히 통속민요(대중민요)와 토속민요(향토민요)로 대별한다. 통속민요는 아리랑, 창부타령, 도라지 등과 같이 시기적, 지역적으로 국한되지 않고 많은 사람들에 의해서 향유되는 민요이다. 이에 반해, 토속민요는 거문도 뱃노래, 임실 두월 들노래 등과 같이 특정 시기, 특정 지역에서 특정한 사람들에 국한되어 불리는 민요를 말한다. 또한, 민요는 기능요와 비기능요로 구분되기도 한다. 기능요는 노동요, 의식요, 유희요로 나뉜다. 노동요는 농업노동요, 어업노동요, 그리고 그 외의 다른 잡다한 일과 관련된 잡역노동요로 나눌 수 있다. 농업노동요와 어업노동요는 대개 여러 사람이 함께 부르는 집단 노동요에 속하며, 잡역노동요에는 토목운반과 같은 집단노동요가 있는가 하면 수공업이나 집안일을 하면서 부르는 것과 같은 개인노동요도 있다. 대개 남자들이 부르는 민요는 집단노동요가 많고, 여자들이 부르는 민요는 개인노동요가 많다. 의식요는 사람이 일생을 살면서 거치게 되는 통과의례(通過儀禮)와 일년 동안의 각 절기에 따른 세시의례(歲時儀禮)를 거행하면서 부르는 노래이다. 환갑노래, 상여소리, 지신밟기 등이 있다. 유희요는 그 주체에 따라 남성유의요, 여성유희요, 아동유희요로 나눈다. 강강수월래, 놋도리밟기노래, 대문열기, 잠자리꽁꽁 등이 그것이다. 비기능요는 기능요가 일시 전용되거나 기능에서 파생된 것이 대부분이다. 전라도 지역의 모심기 소리(상사소리)가 판소리 춘향가에서 ‘농부가’로 변화한 것이 그 좋은 예라 할 수 있다.

 

(2) 전라북도의 민요

전라북도의 농요는 논파는 소리, 논꾸미는 소리, 물품기 소리, 모심는 소리, 김매기 소리, 장원질 소리, 벼베는 소리, 등짐 소리, 타작 소리, 방아 소리 등 그 종류가 매우 많다. 특히 가장 많은 노동력이 필요로 하는 김매기 작업에는 그만큼 많은 소리가 다양하게 분화되어 불리고 있다. 김매기는 지역에 따라 두세벌만 매기도 하고 혹은 네다섯벌을 매기도 하는데, 초벌매기, 두벌매기, 세벌매기, 만두레 등의 과정에서 불리는 소리가 각각 다르고, 혹은 하루 중에서도 아침과 점심 그리고 새참 전후의 소리가 모두 다른 경우도 나타난다. 이처럼 전라북도의 농요는 우선 전라남도 지역과 더불어 농요의 종류가 타 지역과 비교할 수 없을 만큼 많다는 게 중요한 특징중 하나이다. 전라북도 농요에는 전라도의 대표적인 소리인 육자백이 토리가 많다. 실제로 서부평야지역의 농요에는 육자백이 토리로 된 노래가 많다. 그러나 전라북도 농요가 모두 육자백이 토리로 불리는 것은 아니다. 서부평야지역의 일부 소리들(만경산타령, 방아타령, 흥아소리, 등짐소리 등)에서는 한 곡조 안에 육자백이 토리와 남도 경토리가 동시에 나타나고 있으며, 충청도를 통해 유입된 것으로 보이는 만물산야(익산)는 메나리 토리로 불린다. 그런가 하면 동부산간지역의 농요는 대부분 경상도와 같은 메나리 토리로 불린다. 그리고 서부평야지역과 동부산간지역의 접경지역(완주, 진안) 그리고 동남부 산간분지(임실, 순창, 남원)지역에서는 육자백이 토리와 남도 경토리의 특색이 공존하여 나타난다. 특히 동남부 산간분지인 순창과 남원은 판소리의 발생지로 이 지역의 기층음악인 농요에 판소리의 양대 선법 즉, 남도 계면조(육자백이 토리)와 우조(남도 경토리)가 고르게 분포한다는 사실은 판소리 음악 어법의 근원을 밝힐 수 있는 단서를 제공할 수 있다는 점에서 시사하는 바가 크다.

전라북도에서 문열가, 이슬털이, 만경산타령, 방아타령 등과 같이 초벌 논맬 때 부르는 소리는 이른바 ‘숨을 다할 때까지 늘여 부르는’ 유장한 소리로 무장단의 불균등 박자로 불린다. 그 외에는 대개 3소박 4박자의 굿거리류나 자진머리류, 2소박 12박의 중머리류, 혹은 3소박 6박자의 진양류의 균등박자로 되어 있다. 그러나 풍장이나 못방구 등과 같이 반주악기를 동원하지 않고 부르는 농요의 경우에는 대체적으로 박자가 내재되어 있는 경우가 많다. 즉, 내재되어 있는 박자는 있으나 호흡에 따라 그때그때 박을 조금씩 늘이고 줄이는 박의 자유로운 변용을 많이 볼 수 있다.

익산, 전주, 완주, 군산, 김제, 부안, 정읍, 고창의 서부평야지역은 논농사가 중심이다. 드넓은 평야에 풍부한 일조량과 따뜻한 기후 그리고 기온의 연교차가 적어 논농사에 적합한 지역이다. 따라서 밭매는 소리가 거의 소멸되고 없으며 남성 중심의 논농사에 관련된 농요 가창이 두드러진다. 서부평야지역에서는 다른 지역과 달리 논농사의 전과정에 걸쳐 많은 소리가 불린다. 다른 지역에서는 찾아보기 힘든 논파는 소리, 모찌는 소리, 벼베는 소리, 벼등짐소리, 타작소리, 방아소리 등을 서부평야지역에서는 쉽게 발견할 수 있다. 연행방식은 대규모 두레조직이 동원되어 대부분 풍물을 반주악기로 하며 거의 모든 노래가 한사람이 앞소리를 맥이면 나머지 사람들이 후렴구를 받는 선후창 방식으로 불린다. 또한 대부분의 노래가 아래음을 굵게 떨고 중간음을 평으로 내며 윗음을 급격히 꺾어 내리는 특유의 남도 육자백이창법으로 불린다. 무주, 진안, 장수, 완주 일부(운주면), 남원 일부(산내면, 운봉면, 아영면, 동명)의 동부산간지역은 좁은 농지에 산으로 둘러싸여 일조량이 적고 날씨도 낮으며 기온의 연교차도 상대적으로 크다. 전라북도에는 동부산간지역이라고 해도 답률이 40% 이하인 전작지대는 없다. 이 곳에서는 논농사와 밭농사가 거의 같은 비율로 이루어지며 모심는 노래와 밭매는 소리가 농요의 중심이 된다. 밭매는 일은 주로 여성들이 담당하며 논농사에도 남성과 여성이 함께 작업하는 경우가 많다. 따라서 같은 소리를 밭맬 때와 모심을 때 동시에 부르는 미분화된 양상이 많다. 풍물은 거의 동원되는 일이 없고 가는 소리를 처량하게 길게 늘여뜨리는 메나리 창법으로 거의 모든 노래가 한 사람씩 혹은 그룹별로 한 절씩 나눠 부르는 교환창 방식으로 불린다. 후렴이 없기 때문에 앞 사람이 노래하는 사이 사이 ‘어리씨구나’ ‘좋구나’ ‘이히히’ 등의 추임새를 넣어 흥을 돋군다.

임실, 순창, 남원의 남동부 산간분지 지역은 서부평야지대보다는 지대가 높고 동부산간지역보다는 지대가 높아 평균기온과 일조량 그리고 기온의 연교차도 그 중간에 있다. 하지만 이 지역은 위도상 동부산간지역보다 아래쪽에 위치함으로써 실제 기후면에서는 서부 평야지역과 비슷한 조건을 갖추고 있어서 논농사가 발달한 지역이다. 이들 지역은 가창 방식에서도 서부평야지역의 선후창 방식과 동부산악지역의 교환창 방식이 섞여 있으며, 특이하게도 제창 방식도 많이 발달하여 가창방식이 가장 다양한 지역임을 알 수 있다. 음악적인 면에서도 서부평야지역과 동부산악지역의 선율 및 창법적 특징 외에도 남도 경토리의 특징이 두드러지게 나타나 가장 풍부한 음악적 내용을 담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또한 김매기 소리가 가장 다양하게 분화되어 불리는 곳 또한 이 지역이다. 풍물은 최대한 간소하게 동원된다.

위도, 왕등도, 비안도, 말도, 무녀도, 선유도, 신시도, 횡경도, 어청도 등 서해에 위치한 많은 도서들과 전북 서해안지역은 민요의 종류상 어업노동요가 많고 이것들이 그대로 농요로 불리는 경우가 많다. 어업요에는 슬비 소리(그물당기는 소리), 가래질 소리(고기퍼올리는 소리), 배치기 소리(만선의 귀향 소리) 등이 있는데 이들 노래가 그대로 농요, 제의요, 놀이요로 전환되어 불린다. 연행 방식은 모두 선후창 방식이며 후렴에 대한 의존도가 높다. 또 작업의 특성상 계속 쉼 없이 소리를 해야하기 때문에 장형의 사설로 이루어져 있으며 가창자 역시 모두 남성으로서 소리에서도 대단히 강렬하고 역동적인 힘을 느낄 수 있다. 만선으로 귀향하는 뱃길에 부르는 배치기 소리에는 풍물을 반주악기이나 실제 어로 작업에는 모든 소리가 무반주로 불린다.

 

 

5. 전라북도의 산조(散調)

 

전북에서 전승되고 있는 산조는 가야금산조, 거문고 산조, 그리고 대금산조, 피리산조, 해금산조 등으로 구분된다. 먼저 가야금산조는 김죽파류를 시작으로 최옥산류, 김윤덕류, 강태홍류, 정남희류, 김병호류, 심상건류, 박상근류, 그리고 전북지역을 대표하는 신관용류를 들 수 있다.

신관용류는 1911년에 태어나 1957년에 작고한 신관용이 짠 산조로, 신관용은 전북 김제시 만경면 출신이다. 15세때 부터 판소리를 공부하는 한편 김제군 만경에 살던 이영채에게 가야금풍류와 가야금산조를 2년간 배웠다. 그 뒤 거문고, 피리, 대금, 해금, 양금, 장구, 꽹과리 등을 배워 여러 악기에 능하였으나 가야금이 제일 뛰어났다. 30세까지 김제에서 주로 살며 활동하다가, 40세 이후에는 전주 남원, 이리, 군산, 마산 등지의 국악원 사범으로 있으면서 전라북도 각지에서 가야금 명인으로 이름을 떨쳤다. 그의 가야금은 계면조를 주로 하여 구성되었으며, 붙임새의 기교가 복잡하여 여러 가지 어려운 가야금 기교가 많이 구사되는 것이 특징이다. 그의 제자로는 남원출신 강순영과 전주의 송순섭 등이 있다고 전한다.

가야금산조에 절대적 영향을 끼친 인물로는 정읍출신의 김윤덕을 들 수 있다. 1916년 정읍시 입암면 신금리에서 태어난 김윤덕은 김요근에게 거문고 풍류를, 정남희에게 가야금 산조를, 한갑득에게 거문고산조를 배웠다. 정읍에서 초산율계에 참여하여 가야금이나 거문고를 탔고, 후에 서울에 올라가서 국악예술학교 교사로 근무하면서 후진 양성에 힘쓰다가 1968년 중요 무형문화재 제 23호 가야금산조 기능보유자로 지정되었다.

그리고 거문고 산조를 대표하는 신쾌동 역시 전북출신이다. 익산시 삼기면 오용리에서 부친 신광조의 6남매중 둘째 아들로 조선성악연구회를 중심으로 활발한 활동을 한 것은 물론 현존하는 국악예술고등학교에서 수많은 거문고 명인을 배출했으며, 1967년 중요 무형문화재 제 16호 거문고 기능보유자로 선정되어 거문고 산조를 거론할 때 빼놓을 수 없는 인물이다.

대금산조에 있어서는 남원출신의 강백천을 첫손으로 꼽는다. 1898년에 태어나 1982년에 작고한 산조명인으로 남원태생이지만 말년에는 부산에서 살았다. 어려서부터 대금 시나위를 잘 불었는데, 여러 창극단에서 대금을 불었다. 대금산조를 먼저 짰다는 박종기와 교분이 있었고, 서로 영향을 주고받으며 대금산조를 짰다. 그의 산조는 진양, 중모리, 중중모리, 자진모리장단으로 조성되고, 우조와 계면조로 짜되 계면이 주가 되어 대금 시나위에서 완전히 벗어나지 못한 특징을 가지고 있다. 1971년 중요무형문화재 제 423호 대금산조 기능보유자로 인정받았다.

단소산조의 창시자 역시 전북출신의 전용선이다. 전추산으로 잘 알려진 전용선은 출생연도에 대해서는 1879년, 1884년, 1997년 등의 증언이 다양하며 작고 년도도 불분명하다. 단소에 관한 한 거의 신화적인 존재로 알려져 있는 그는 한곳에 오래 머물기를 싫어하여 평생을 유랑하였으며, 그 과정에서 호남과 영남 일대에 수많은 제자들을 두었다. 1930년대 후반에 정읍의 대부호였던 김기남의 산정에 머물며 풍류를 하였는데, 이때 김용근, 신달룡, 이기열, 나용주 등이 함께 어울리며, 풍류를 했으며, 몇몇 제자를 양성했다고 한다.

 

 

6. 전라북도의 무악(巫樂)

 

사람이 사는 곳에서는 어디나 음악과 종교가 있다. 이 양자는 긴밀한 친연성을 지니고 있다. 종교는 의식을 통하여 구상화되며 의식은 음악을 통하여 표현된다. 특히 우리의 전통적인 토속신앙은 굿이라는 의례를 통하여 구체화되는데, 종교와 음악의 결합체를 굿이라는 의식을 통해서 이를 확인할 수 있다. 이러한 현상은 멀리 상고시대의 가무전통에서부터 비롯되며, 그 맥을 잇고 있는 굿이라는 의식은 지금도 전국 각처에서 전승되고 있다.

굿에서 쓰이는 음악은 각 지역의 자생음악을 바탕으로 전승되어 왔다. 굿음악은 지역음악과 민속음악의 이해라는 차원 못지 않게 예술음악의 뿌리라는 점에서도 중요성이 강조된다고 하겠다.

오늘날 전라북도 무가의 구송이 완결성을 갖추고 있는 굿거리는 많지 않다. 그만큼 무녀 자신이 이미 사설을 많이 잊어버린 상태이다. 전라북도에 생존해 있는 대부분의 세습무는 이미 무업을 중단한 상태이다. 그 중 2명만이 현재까지 무업에 종사하고 있는데, 그 마저도 세습무의 전통적인 의례가 아닌 점복(占卜)과 같은 방식으로 일을 하고 있다. 따라서 세습무 무의식의 원형은 이미 단절되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또한 전라북도의 전통적인 무업은 무악 반주자의 반주에 맞춰 가무를 수행하였다. 이들 반주자를 ‘고인’이라고 부르는데 이와 같은 전통적인 고인들 역시 급속히 굿판을 이탈한 상태이기 때문에. 이 역시 세습무의 굿 수행을 제대로 할 수 없게 만든 이유가 되고 있다. 따라서 세습무의 굿판은 인위적인 방법으로도 그 원형을 복원하기가 어려운 상황이다. 봉건시대 신분제도에서 최하층에 속했던 무업 당사자들은 지금도 극심한 피해의식에 젖어 있다. 일제강점기에는 혹세무민하는 ‘미신’으로 철저한 타파의 대상이 되었으며, 군사정권이 집권하면서도 근대화 정책에 역행된다는 이유로 철저히 배격되었다. 그러나 나중에는 민족문화에 대한 각성이 일면서 이들을 문화재 기능보유자로 지정하게 되었다. 그러나 전라북도에서는 이들 세습무들이 굿판으로부터 이미 너무나도 멀리 떠나 있어 굿을 예전으로 되돌리기 어려운 상황이 되어 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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