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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업실사람들

서예가 김진돈

 

 추사의 전형적인 예서체의 전범을 뚜렷이 보이는 김정희(1786년-1856년)의 ‘귀로재(歸老齋)’ 편액. ‘귀(歸)’자와 ‘재(齋)’자는 크게 포치를 하고, ‘로(老)’자는 글씨를 바짝 조이면서도 내려 길게 맞춰 조형성을 최대한 살리고 있는 명작 중의 명작란 평가다.
 몇해 전, 기자가 보도한 이 작품은 서양화가 김홍선씨가 보여준 6대조 할아버지 김기종(1783년-1850년)선생의 재실 편액으로, 예술의전당 서예박물관에서 열린 대한민국 서도대전에 탁본을 하여 서예가인 후암 김진돈(49, 전라금석문연구회장)씨가 소개하면서 세상에 더욱 더 알려지게 됐다.
 “귀로재의 편액은 임실 관촌 김기종(金箕種)재실에 있었던 것으로, 추사의 글씨가 분명합니다. 귀로재의 상량문을 보면 건립 연대가 1859년 기미(己未)로, 추사가 타계한 후 3년 되는 해로, 아마도 추사 말년인 1855년 김기종의 아들 영곤(永坤) 양세효자비(兩世孝子碑)를 써줄 때, 이 편액도 동시에 해준 것으로 추정할 수 있습니다”
 효자 김기종은 아버지 복규(福奎)와 함께 임실 정월리에 모셔진 양세효자비의 주인공으로 추사가 이를 직접 찬서했으며, 이 재실엔 전북출신 창암(蒼巖) 이삼만(李三晩, 1770년-1847년)이 쓴 ‘구암(龜巖)’ 편액과 상량문이 함께 전해오고 있는 등 미술사 연구에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는 실정.
 특히 ‘귀로재’의 편액은 추사의 험경(險勁)한 개성적 필치가 잘 나타난 고예풍(古隸風)의 글씨가 고졸해 보인다는 작가의 설명. 30여 년의 필력을 가진 작가가 가장 주안점을 두고 있는 것은 발품을 팔아 역사를 건져내는 금석문으로, 탁본을 통해 작품으로 재탄생시키고 일상.
 “어릴 적, 채용신이 그린 고조부의 초상화와 항일 정신이 깃든 투수도(投水圖)를 보고 자랐습니다. 그 작품을 보고 있으면 단순한 그림을 넘어 사람의 정신과 마음까지 읽어질 만큼 사실적이죠. 그래서 자연적으로 서예에 입문하게 된 것입니다”
 작가의 고조부는 정읍출신의 항일지사 김영상(1836년-1911년)선생. 신필화가 채용신이 1910년대 정읍에 유숙하며 여러 항일지사들의 그림을 그렸다는 사실을 할머니와 아버지로부터 전해들은 기억이 지금도 생생하단다.
 작가는 2006년 11월 금석문을 통해 선조들의 치수법을 찾아봤다. 물과 관련된 샘, 보, 다리, 석조 등과 바위 등에 새겨진 물과 관련된 금석문을 찾아 전시회를 열었기 때문. 작가는 ‘설보비’ 앞에서 “이는 임실군 덕치면 회문리에서 떠온 ‘설보비(雪洑碑)’입니다. ‘설보비’는 냇가에 눈이 녹은 흔적을 따라 보를 쌓았다고 해서 지어진 이름인 것이죠. 이 비는 설보를 쌓게 된 유래와 방법 등이 상세히 적혀있습니다”
 2007 세계서예전북비엔날레엔 ‘진묵대사(1562년-1663년)’의 시를 행서로 써서 출품하기도. ‘하늘은 이불이요 땅은 자리, 산은 베개로다/달은 촛불이요 구름은 병풍, 바다를 술통으로 삼는도다/거나하게 취해 일어서 춤을 추려하니/긴 소맷자락이 곤류산에 걸릴까 하노라’    고지(古紙)를 통해 노르스름한 맛이 흠뻑 배어나고 시의 내용처럼 후련한 가슴에 광활함과 하늘을 찌를 듯한 기상 작품에 번득인다. 어찌 그리도 훨훨 털어버릴 수 있을까.
 진묵대사는 계율에 얽매이는 것을 무엇보다도 싫어했고 술을 유달리 좋아했던 인물. 그래서 그에겐 정말 걸릴 것이 없어 보였나 보다. 곤륜산조차 소맷 자락 아래 있으니. 그러나 사소함에 얽매이지 않고 큰 것을, 먼 곳을 보고 살아가기란 결코 쉬운 일은 아닐 터.
 바로 얼마 전, 순창 남계리 석장승(중요민속자료 102호)이 거무스레히 먹물을 머금은 적이 있었다.
 작가는 ‘전북의 역사문물전 Ⅶ-순창(국립전주박물관 전주기획전시실, 10.16-11.25)’에 이 석장승을 탁본해 선보였다. 살찌고 무거운 모습하며 옆으로 찢어진 가는 눈, 가늘고 손상된 코에 입은 작으면서 장난스럽게 혀를 조금 내민 모습이 우리 앞에 그대로 모습을 드러낸 것도 작가의 노력 덕분이다.
 그러나 작가는 추사가 그도톡 인정했던 창암 이삼만, 특히 남고진사적비(1846년, 최영일 찬, 이삼만 글씨)의 경우, 전북의 역사를 잘 나타내고 있는 명문임에도 불구하고 문화재로 지정되지 않아 멸실의 위기에 처해있는 아쉬움이 크다고.
 전라도의 창암 이삼만선생은 서울의 추사 김정희와 평양의 눌인 조광진(1772년-1840년)과 함께 조선 후기 3대 서예가로 불리우고 있는 서예가로, 그의 초서는 세상 사람들이 ‘유수체(流水體)로’ 부르고 있단다. “추사는 반듯이 강하게 쓴 직선 획이, 창암은 물 흐르듯 부드러운 글씨가 각각의 특징이다”는 작가는 입체적인 것이 평면이 되고, 잘 보이지 않던 것이 더욱 선명하게 되살아나는 탁본을 하기 위해 오늘도 먼 발길을 나선다.
 한번 찍은 ‘탁(拓)’은 시(時)와 공(空)을 뛰어 넘어 혼자 걷는 것과도 같은 일이리라. 조심스레이 전주한지를 덮고 솜방망이에 먹물을 묻혀 두드리자 환하게 웃는 비석의 모습 금세 드러난다. 전민일보 이종근기자
 

1.작가의 말

 

 돌, 나무, 쇠에 새겨진 글씨 속에 숨은 이야기를 찾아 꺼내는 일은 선조들의 사상과 정신을 직접 보는 것 같아 한편 흥분도 되지만 또 한편으로는 조심스럽기도 하다.
 기본도 없이 휙휙 날다가 가볍게 지나가는 글씨를 쓰지 않기 위해서는 금석학이 기본이 되어야 한다. 가볍게 쓴 작품은 후세에 욕을 먹기 십상이다.
 근원이 있는 작품이야말로 진정한 의미를 부여할 수 있으며, 마음을 다잡고 표현하는 도(道)를 추구하기 위해 마모되고 흔적없이 사라지는 우리 역사 문화의 현장으로 발길을 돌린다.


2.작가가 걸어온 길

 

정읍 출생
원광대학교 서예학과 동 대학원 졸업
전북대학교 철학과 박사과정 수료
전국 대한 미전 금상
전국서화백일대상전 대상
전북미술대전 우수상, 최우수상
제2회 향토문화연구논문 대상
논문 ‘창암 이삼만의 서예 연구’
추사 김정희 금석문 2점, 오수의견비 개 문양, 송일중 비문, 옥천부원군 조원길 묘비 등 발견
(현) 대한민국서도대전 초대작가, 한국서도협회 전북지회 부지회장, 전북미술대전 초대작가
(현) 국사편찬위원회 사료 조사위원, 전라금석문연구회장, 전주문화원 사무국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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