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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름다운사람

이규태 조선일보 논설고문 별세

 “이제는 그만 글을 마쳐야겠습니다. 24년 동안 선보였던 ‘이규태 코너’가 24년, 6천7백2회를 마지막회로 해서 더 이상 독자들을 만날 수 없기 때문입니다. 특히 글로 먹고 사는 사람에게 항상 무언가를 쓸 수 있는 공간이 있다는 것은 행운이었습니다.
 1983년 3월 1일. 이처럼 오랫동안 코너가 계속될 줄은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습니다. 이제, 욕심이라면 ‘이규태 코너’보다 훨씬 뛰어난 코너가 독자들의 마음과 머리를 적셔드렸으면 하는 것입니다.”
 장수출신 이규태(73, 수필가) 조선일보 논설고문은 조선일보 23일자 1면을 통해 이같이 소감을 피력하면서 중년이던 나이는 이젠 칠순을 지난 늙은이가 됐고, 강산은 두 번 반이 바뀌었다고 느낌을 술회하기도. 
  이고문은 지난 1933년 장수에서 출생, 연세대 이공대를 졸업하고, 조선일보 문화부, 사회부 차장, 사이공 특파원, 문화부장, 조사부장, 전무이사 등을 역임하면서 한국신문상, 서울시문화상을 수상했다. 전공(화학공학)과는 달리, 기자의 길로 접어든 것은 당시 공채 신입사원을 뽑는 회사가 드문 시대상 때문.
 특히 그는 미국 하버드대학 엔칭 도서관에 소장된 그의 저서만 줄잡아 1백20여 권에 이를 만큼 평생을 한국학에 몰두해온 장인이기도 하다. 그래서인가, ‘개화백경’, ‘한국인의 인맥’, ‘한국인의 재발견’, ‘한국인의 의식구조’, ‘한국인의 생활구조(①우리의 옷 이야기, ②우리의 음식 이야기, ③우리의 집 이야기)’, ‘한국인의 성(性)과 미신’ 외 다수를 발간하는 등 한국인의 뿌리를 찾고 구 문물의 내력을 밝혀 외국과 비교하는 것들이 주를 이루고 있다.
  “당시 방우영 사장께서 ‘이규태 코너’란 이름과 함께 분량과 지면의 위치까지 정해주시며 시작하라고 했던 이 글이 벌써 6천7백1회를 기록했습니다. 3,1절을 맞아 3,1선언 현장인 명월관의 내력을 쓴 ‘이완용의 집 고목’에서 시작해 얼마 전 ‘책찜질 이야기’까지 햇수로 24년이 흘렀습니다. 컴퓨터로 계산하니 오늘(2월 18일 기준)로 8천3백91일이나 됩니다.”
 투병 중인 필자의 구술에 의해 작성된 마지막 ‘이규태 코너’를 통해 이고문은 요즘에 와서는 격일, 또는 3일에 한 번씩 연재했지만 20년간은 휴간일 빼놓고는 매일같이 글을 써야 했기 때문에 마치 마라톤을 달리는 선수와도 같은 입장이었단다. ‘이규태 코너’ 속 삽화 역시 마찬가지. 곰방대 문 모습에서, 연필을 손에 쥔 모습으로, 그러다가 1993년부터 현재의 컴퓨터 자판 앞에 앉은 모습으로 바뀌는 등 그동안 3번의 큰 변화가 있었다.
 “잘 뛰는 선수야 2시간 좀 넘는 레이스이지만 저에게는 24년이라는 긴 여정이었습니다. 이제는 골인 지점에 다다른 것 같습니다. 30년 아니 50년, 7천회 아니 1만회를 넘기고 싶지만 그건 과욕이라고 생각합니다. 많은 후배들에게 기회를 넘겨야 할 때가 됐습니다. ‘이규태 코너’가 6천7백1회까지 이어올 수 있었던 것은 오로지 많은 사람들의 성원과 사랑 덕분이었다는 것을 제가 어떻게 잊겠습니까.” 

 한편  이고문은 2월 25일 오후 4시 15분 지병인 폐암으로 서울삼성병원에서 별세했다.이종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