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리꾼들이 가락과 함께 넘던 무주군 안성면은 마침표 없는 ‘겨울동화’. 하얀 눈이 소리 없이 내린다. 융단을 깔아놓은 듯 가파른 등고선을 그리는 덕유산은 순백의 곡선으로 거듭나고, 석양에 물든 눈구름은 금세 잿빛으로 변한다. 이제 막오른 겨울 풍경에 취해 밤을 하얗게 보낸 보름달이 서둘러 산을 넘는다. 지금 무주군은 안성면 공정, 금평, 덕산리 일대 2백45만평에 대한전선과 손을 잡고 1조천억 원을 들여 관광레저형 기업도시를 조성, 온통 장밋빛 전망을 낳고 있다.
천상의 꽃들이 만개한 덕유산 자락 아래에서 태어나 나무에 얼어붙어 생긴 하얀 ‘설화(雪花)’같은 사람, 아동문학가 서재균(71). 오래토록 간직한 가슴의 불은 항상 정의로움으로 귀결된다. 대꼬쟁이 같은 성격을 갖고 있으면서도 언제나 따사로운 기운으로 사람들을 대하는 그의 면면은 어제 그리고 오늘, 앞으로도 변함이 없을 터.
아동문학과 인연을 맺게 된 것은 지금으로부터 40여 년. 지난 1957년 군생활을 하면서 대구의 한 초등학교 여학생의 위문편지를 받고난 직후란다. ‘군인 아저씨. 군인 생활이 퍽이나 힘드시지요. 그래도 나보다 괜찮을 거에요.왜냐하면 난 부모가 없는 고아이니까요....’
지극히 가난하고 슬픈 아이들에게 희망의 메시지를 전할 수 있으리라 생각하면서 시작한 문학 생활이 햇수로 40여 년. 무수히 많은 세월은 동화집 ‘햇빛이 노는 개울가’로 등단한 이후 ‘아름다운 선물’, ‘산철쭉’, ‘솔매골의 까치’, ‘골선방 할아버지’, ‘할아버지 옛날 이야기’ 등이 있으며, 동시집 ‘산에도 들에도 하얀 들국화’, 동화로 엮은 내 고장 설화집 ‘천배산의 북소리 상, 하’ 등을 낳고. 그래서인가, 버스속에서 자리를 양보한 아동들들 보면 아동문학 작품집 한 권을 꺼내 들고 어깨를 어루만지면서 선물로 주었다는 얘기를 들은 것이 한 두번이 아님에랴. 그는 또 월간 ‘소년문학’ 대표로 10년이 넘도록 활동하면서 아이들을 위한 글쓰기의 텃밭을 마련한 주인공.
지난해 여름 본보가 제1회 전라북도 초등학생 일기쓰기대회의 심사위원장을 맡았을 때 말했다. 일기쓰기가 대회를 치를 정도로 바뀐 세상에 새삼 놀라움을 금치못하고 있다고. 부탁하건데, 방학동안에 쓴 일기를 중심으로 심사를 하면 학부모들의 간섭한 흔적이 보이는 등 부작용이 많아 평상시에 일기를 쓰는 습관을 기르는 노력이 필요하고, 이를 심사의 대상으로 할 수 있도록 노력함이 요구된다. 이때 덧붙여 하는 말. 아이들의 일기는 삶이 묻어나는 생활글로 생각해야지 작문 또는 문학 작품으로 본다면 아주 잘못된 생각이라고.
“나는 절대로 글에 대해 비굴하지는 않을 것입니다. 글이라는 이름을 팔고 사지는 않을 것이이기 때문입니다. 다만 ‘비오는 가을 밤, 하나 둘씩 소리없이 떨어져 가는 낙엽’ 쯤으로 기억해 주었으면 좋겠습니다.”
지난해 첫 산문집 ‘게으른 자화상(신아출판사, 값 9천원)’을 펴낸, 일흔고개에 접어든 노작가는 소년처럼 밝은 미소를 보여주면서 언젠가 모 월간 잡지에 소개한 ‘사랑하는 K기자에게’란 글을 다시금 떠올리게 만들었다.
이 산문집은 제1부 삶의 길목에서, 제2부 아름다운 여정, 제3부 사람의 향기, 제4부 사랑하는 사람에게, 제5부 기도 등 5부에 49편의 산문이 소개, 인생 여정들이 진득하게 담겨져 있다.
‘예순두 살. 그는 언제나 허무와 고독으로 살다간 시인으로 우리는 오랫동안 기억할 것이다. 고뇌와 갈등으로 머리를 쥐어뜯어본 일도 없는 나와 같은 문인들을 비웃고 있을 그에게 나는 이 세상에 남아서 그의 시를 읽으며 앉아있는 꼴이 우스꽝스럽지 않느냐고 되묻고 있을 뿐이다.(‘어느 시인의 죽음’중 일부)’
지난 2003년엔 이세일 유고시집 ‘훗날 누가 찾거든(신아출판사)’, 2005년엔 동화작가 오영환 유고집 ‘나룻배에 실은 꿈(신아출판사)’ 등 후배 문인들의 죽음을 못내 서러워하면서 작품집을 발간하는 일에도 앞장서왔다. 때론, 기린토월(麒麟吐月), 남고모종(南固暮鐘), 덕진채련(德津彩蓮) , 완산칠봉(完山七峯) 이야기 등 지난 역사를 고증하면서 느낀 바가 진솔하게 담겨 있는 문장으로, 때론 ‘무주군지’. ‘전북문학사’, ‘전북 전설지’ 발간 등 지역의 역사를 올바르게 기술하는데도 약방의 감초로 통하고 있다.
누가 작가에게 ‘수구초심(首丘初心)’을 말했는가. “저는 언제나 촌놈으로 살아갑니다. 때묻지 않은 그 자연을 닮은 촌놈으로 살아가는 것이 좋다는 얘기입니다. 늙어서도 어린 시절 이야기만 하면서 살고 싶습니다. 겨울에는 마을 아이들과 토끼사냥으로 눈 덮인 산골짜기를 오르내리던 어린 시절이 그리운 촌놈으로 말입니다. 어쩌다 오늘같이 함박눈이라도 내리는 날이면 사랑방에 모여 윷놀이나 스케이트 만들기를 하던 동심의 아름다운 추억처럼 말입니다.”
눈을 위해 열어놓은 덕유산 향적봉의 겨울 하늘. 쌓었던 눈만큼 돌아서야 했던 아쉬움이 가슴에 찬, 지난 시절이 자꾸 떠올려지는 눈내리는 오늘 작가는 칠연폭포와 고향집이 더욱 그리워진다. 덕유산의 하얀 눈길 따라 나약함을 꾹꾹 밟으며 새로운 희망을 품으러 작가와 나도 여행을 떠난다.
1.서재균은 누구
서재균씨는 무주군 안성면에서 출생, 대전사범학교를 나와 교직에서 13년을 보낸 후 언론계에 투신, 전북일보사를 시작으로 전라일보사, 전북도민일보사를 거치면서 지방부장, 편집부국장, 편집국장, 논설위원, 수석 논설위원 등을 역임했다. 한국아동문학회 부회장, 한국아동문학인협회 부회장, 전북문인협회 회장을 역임했으며, 현재 국제PEN클럽 이사로, 전북아동문학회 고문과 월간 ‘소년문학’ 대표를 맡고 있다.
저서로 동화집 ‘햇빛이 노는 개울가’로 등단한 이래 ‘아름다운 선물’, ‘산철쭉’, ‘솔매골의 까치’, ‘골선방 할아버지’, ‘할아버지 옛날 이야기’ 등이 있으며, 동시집 ‘산에도 들에도 하얀 들국화’, 동화로 엮은 내 고장 설화집 ‘천배산의 북소리 상, 하’, 컬럼집 ‘삶의 여백을 위하여’, 산문집 ‘게으른 자화상’을 펴낸 바 있다. 그동안 전북문화상, 목정문화상, 한국아동문학작가상, 김영일아동문학상, 월간문학 동리상 등을 수상하기도 했으며, 18일 오후 5시 전주 민촌아트센터에서 제5회 전북펜 작촌문학상을 수상한다.
2.글 한편:너무 허약해진 아이들-교직에 몸담고 있는 제자 P군에게
P군 그 동안 별고 없었나. 요즘 아이들 체력이 너무 허약해졌다고들 하네. 잘 먹고, 잘 입고, 평안하게 생활하고 있는데도 어떻게 된 일인지 자꾸만 체력이 허약해지고 있다는 얘기지. 그야 물론 운동을 안하기 때문이 아니겠는가. 얼마 안되는 거리인데도 버스를 타고 가거나 택시를 타고 가기가 일쑤라는 이야기지. 운동장에 나가 공을 차거나 산 위에 올라가 맑은 공기를 마시는 일은 별로 없고 학교에서 돌아오면 즉시 학원엘 가거나 오락실, 혹은 먹고 잠자는 게 고작이라는 뜻이지. 요즘 아이들 체력만 허약해진 것이 아니라 마음과 정신까지도 허약해졌다고들 하네. 조그마한 일에도 잘 감동하고, 놀라고, 소리지르고, 울기도 잘한다네. 아이들의 정서에 아무 도움도 안되는 텔레비전이나 만화 따위가 그렇게 만든 것이지. 이를테면 어른들이 부르는 가요나 시엠송 등이 그렇게 만든 것이라는 얘기지. 또 요즘에는 노래방이라는 것도 생겨 부모들의 손을 잡고 따라간 자녀들에게 퇴폐적인 영상까지 가슴으로 보고 느끼게 하며 음침한 공간에서 소리소리 고함을 지르게 하는 꼴이란 참으로 한심스러운 일이 아닌가. 어린이들의 정서순화에 각별히 신경을 써야 할 부모들이 이토록 정서가 메말라서야 될 말인가. 노래만 불러댄다고 정서순화는 아니지 않는가. 물론 대중가요라고 모두 어린이들에게 나쁘다는 것은 아니지. 때로는 대중가요 중에서도 아름다운 이야기나 정서가 담긴 노래도 있게 마련이지. 그러나 내가 이야기하고자 하는 것은 어린이들에겐 어린이의 노래가 있고 어른들에게는 어른의 노래가 있다는 얘기지. 어른들 중에는 오히려 어렸을 때의 향수 짙은 동요를 사랑하고 즐겨 부르는 사람도 적지 않다네. 달 밝은 밤에 마을 뒷동산에 올라가 부를 노래는 팝송이나 랩풍의 노래가 아니라 ‘가을 밤’의 동요를 불러보자는 말일세. 어른들도 어린이들도 이젠 좀 생각해 볼 때인 것 같아서 하는 말이라네. P군 자네가 맡고 있는 아이들은 어떠한가 냉정하게 생각 좀 해보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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