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주의 사라진 정자 백운정, 적취정, 낙수정
전주의 백운정, 적취정, 낙수정 어디에 있었을까요.
완산동 백운정
전북의 선비 석정(石亭) 이정직(李定稷,1841~1910)은 53세인 1893년 전주에서 약포(藥鋪)를 운영했지만 그 다음해에 전주성이 함락돼 모든 저술과 가옥이 화재로 소실됐다. 그래서 자신이 태어난 요교마을에 정착했다. '연석산방문고'엔 '청학산기(靑鶴山記)'가 실려 있다. 청학(靑鶴)이라고 이름 지은 것은 학이 천년을 살기 때문



에 지은 것이라고 한다. '나는 병을 핑계삼아 전주의 은송리(隱松里)에서 지냈다. 거처하는 집에서 비스듬한 경사길 오른쪽에 청학산이 있었다. 완산의 첫번째 봉우리의 한 줄기가 동북쪽으로 내려와 작은 봉우리가 됐는데 이를 청학이라고 한다. 높이는 겨우 10여 자 정도 밖에 되지 않고, 둥근 것 같지만 동글지 않고, 모가 난 것 같지만 네모지지도 않는다. 매번 마음이 울적할 때 지붕 위에 올라가서 바라보면 늙은 소나무 10여 그루가 옆으로 누워 있는 것이 마치 서로 기대고 있는 것 같다. 봉우리의 남쪽에 정자가 있어 그 이름을 백운(白雲)이라 한 바, 시인과 묵객(서화를 일삼는 사람)이 모두 그곳에 모여들었고, 왕래하면서 경치를 내려다보는 사람들이 끊이지 않았는데 모두 사라지고 말았다’
이정직이 '지난해에 초토사(招討使, 변란 평정을 위해 임시로 보내는 신하) 홍계훈이 금군(禁軍) 2,000 명을 거느리고 그 위에서 동학군과 싸울 때는 포환이 빗발치고 창과 화살촉이 교차했다고 했다’고 기록한 바 이 작품을 지은 것은 1895년이 거의 확실하다. 하지만 10여 자 정도 높이의 청학산이 어디인지는 어느 기록에도 보이지 않는다. 전주엔 '청학루(靑鶴樓)', 황학루, 황학대, 학산 등 지명이 많지만 아직 산 관련 책자는 발간된 바 없다. 전주의 상징을 스토리로 살리는 노력이 부족한 현실이 참으로 아쉽다.
낙수정, 적취정
'부성팔현(府城八賢)'은 홍남립을 비롯 이흥발·기발·생발 삼형제, 전의(全義) 이씨인 이홍록·후선·순선, 그리고 송상주로, 팔과정 터에서 배출한 선비를 말한다.
'팔과정(八科亭)'은 17세기에 이곳에 살았던 선비 송사심(송면)의 제자 8명이 줄줄이 과거에 급제하자 이를 기념하여 지은 정자이고, 신복리는 당시에 이 지역에서 가장 번창하였던 마을이었다.
이들 형제가 고향 전주에 돌아와 살았던 곳은 기린봉 아래의 적취정(積翠亭) 골짜기이다. 이는 구 영생고등학교에서 국군묘지에 이르는 곳이다.
금재(欽齋) 최병심(崔秉心, 1874∼1957)선생은 '차적취정운(次積翠亭韻)'이란 시를, 고재(顧齋) 이병은(李炳殷, 1877~1960)선생은 '등적취정(登積翠亭)'이란 시를 각각 남겼다.
지금은 적취정이 사라지고 없지만 그가 살아있을 때 분명히 남아있었다. 서울대 규장각 소장의 1872년 채색 지도를 보면 왼편에 성황사와 적취정의 모습이 선명하게 보인다.
산 중턱에 올라 당시의 어지러운 시사를 개탄하고 산중턱에 올라 당시의 어지러운 시사(時事)를 개탄하고 때로는 한운야학(閑雲野鶴)과 같이 음풍농월(吟風弄月)로 여생을 보냈다고 한다.
그가 한 때 사간원 헌납(司諫院 獻納)을 지낸 까닭에 '간(諫)'과 '납(納)'의 두 자를 따서 간납대라고 했다.
'간납대'는 전주시장을 지냈던 이주상 씨의 부친인 이석한 씨의 소유였다고 한다.
남문교회 강홍모 장로는 전라선 철도로 인해 시내와 단절되어 쓸모없는 산으로 보이는 이곳에 이석한 씨의 협조로 영생학원 인가를 얻었다.
신동아학원은 공업전문대학을 전주대 옆으로 이전하고, 간납대를 처분했으며 현재 천주교 전주교구청이 들어왔다.
낙수정 동종이 발견된 곳에서 1909년에 '開元寺'(개원사)라는 글씨가 새겨진 기와가 발견되었는데 이로 미루어 볼 때 이 동종은 전주 개원사라는 절에 걸려있던 종으로 어느 때인지 모르지만 종을 매다는 부분이 깨어지자 땅속에 묻혔던 것으로 여겨진다. 이후 개원사는 폐사되고 낙수정이라는 정자가 들어섰을 것으로 짐작된다.
낙수정은 동고산성 성황사에 물줄기가 발현하여 이곳에 와서 물이 응집되어 마을을 이루게 되었고, 이 지역에서도 많은 콩나물을 예전에는 재배했다고 전한다.
이곳에서는 범종이 발견되어 전 낙수정 동종이라 하여 보물 제1325호로 지정되어 국집전주박물관에 전시되고 있다.
이 범종은 일본인 다까하라 히미꼬 여사가 선대로부터 물려받아 소장해 오던 중 1999년 11월 국립문화재연구소를 통해 기증·반환한 것으로, 종을 매다는 용뉴 부분의 훼손이 있기는 하나 거의 완전한 형태를 갖추고 있다.
전주의 백운정, 적취정, 낙수정 어디에 있었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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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재(欽齋) 최병심(崔秉心, 1874∼1957)선생은 '차적취정운(次積翠亭韻)'이라는 시를 남겼다.
고재(顧齋) 이병은(李炳殷, 1877~1960)선생은 '등적취정(登積翠亭)'이란 시를 각각 남겼다.
지금은 적취정이 사라지고 없지만 그가 살아있을 때 분명히 남아있었다. 서울대 규장각 소장의 1872년 채색 지도를 보면 왼편에 성황사와 적취정의 모습이 선명하게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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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 낙수정 동종(국립전주박물관 소장)
원래의 낙수정 터는 낙수정마을에서 보석사로 들어가는 길목 산 언저리에 있었다고 한다. 낙수정 마을 앞쪽으로 해방 무렵에 피난민들이 정착한 농원 마을이 있었다. 이같은 농원마을은 인후동에도 자리했다.
하지만 낙수정의 정확한 유래와 자료는 없다. 낙수정(樂壽亭)이란 이름엔 '즐겁게 살면 천수를 누릴 것'이란 한자 뜻풀이가 가능해 전주 사람들의 긍정적 삶을 떠올릴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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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학산이 아마도 무학봉일 확률이 있어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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